소설리스트

회귀추적-187화 (164/210)

187화. 삼혈승 출동 (2)

* * *

신주의협이 활동을 시작한 것인가?

천산 백응신장의 이 물음에 모두의 귀가 솔깃했다.

척혈단과 뜻을 같이하고 있는 원로들과 각 문파의 대표들은 실은 한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적이 강하다 한들 신주의협이 있는 한 우리가 이길 거라는 희망이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에 대한 믿음이었고, 공정과 협의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닌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여온 것.

지금까지 신주의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어디선가 은밀하게 천하를 구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맹목적인 믿음.

하지만 민정화의 답변은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다.

“글쎄요… 아무래도 천궁 같기는 한데… 신주의협께서 움직이신 것 같지는 않아요.”

“무슨 그런 애매한 말이.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하오문 정보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흑사련의 기지로 약 오십여 명이 침투했는데 불과 두어 명만 살아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즉 완패를 당한 거예요.”

민정화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신주의협이 직접 개입했다면 용 혈승도 없는 흑사련 따위에 참패를 당할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천궁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 질문에는 민정화와 제갈윤도 답을 못했다.

“의문이 남아 찜찜하지만 그걸 밝힐 여유는 없을 것 같아요.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흑사련이 의문의 조직에 습격당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청성에 잠입한 정보원들이 방금 전 보내온 전서입니다. 어제부터 청성 주봉의 경계가 강화되어서 정보를 캤는데, 아무래도 황궁의 귀빈, 무림맹주, 흑사련주… 즉 세 혈승이 드디어 사천에 온 것 같아요.”

“드디어 우두머리들이 나타났군. 그나마 다행이네. 우리 별동대의 작전이 끝난 후여서.”

“어쨌든 이로써 적들은 모든 전력이 갖춰졌습니다. 반면 천마신교는 아직 사천에 당도하지 않았지요.”

민정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에는 천마신교가 너무 빨리 올까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늦을까 걱정해야 하는 상황.

당장 천마신교의 대공자와 유선에게 전서를 보내 진군 속도를 높여 달라고 해야 했다.

“그리고 천마신교가 도착하기 전 전쟁이 시작된다는 가정하에 작전을 짜야 합니다.”

“그들이 당장 움직일 거라고 보나?”

“두 곳이 습격을 당했으니까요. 분명 보복이 있을 겁니다.”

“보복이라면… 어디를 공격한다는 말인가?”

위무진 맹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정화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직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청성산 인근에 정보원을 많이 풀었으니 무언가 알아내기를 기다려 봐야죠. 적의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목표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저희가 즉시 도우러 가야 합니다.”

합리적인 대책이었고,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나중에 민정화는 땅을 치고 후회를 했는데, 적들이 부대를 움직이지 않고 혈승 셋만 출동할 거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하오문의 정보원들이 혈승들의 은밀한 움직임을 알아챌 능력도 없었고.

* * *

아미산 서남쪽으로 반나절 거리의 넓은 들판.

점창파는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천이 넘는 인원에 말만 해도 오백 마리가 넘으니 다른 문파들처럼 아미파에 신세를 질 수는 없었던 것.

하지만 크게 불편을 느끼지도 않았다.

점창파의 무인들은 평소 군대식 훈련을 받기 때문에 야외에 진지를 구축하고 천막생활을 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들판에 정렬한 창기병.

오와 열을 맞춘 오백 마리의 군마 위에 앉아 번쩍이는 창을 든 모습이 당당했다.

그리고 창기병 뒤에서 검진을 이룬 오백 명의 무사들.

찌르기에 특화된 폭이 좁은 협봉검을 쥔 점창의 검수들은 모두 천령개가 도드라지고 눈빛이 번뜩이는 것이 내공과 의지가 남달라 보였다.

언덕 위에 서서 제자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점창파 장문 노익찬은 감격스러웠다.

자신이 보기에도 제자들은 모두 뛰어났고, 점창의 전력은 대단했으니까.

“하하하, 장문 사형. 점창을 벗어나 이곳 사천에 와서 제자들이 도열한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일 장로 호육손이 제자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고, 벅찬 감정은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습니다, 장문 사형. 어쩌면 이번 전쟁이 우리 점창파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점창파의 두뇌인 이 장로 문소발의 말이었는데, 노익찬 장문도 공감하는 바였다.

강호인들은 점창파를 구파일방의 말단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점창으로서는 몹시 못마땅했다.

물론 일 대 일로 무공을 겨룬다면 소림, 무당, 화산에 비하여 한 수 뒤처지는 것이 사실.

그렇지만 문파 대 문파의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오백의 창기병을 앞세운 점창은 그 어떤 문파라도 반나절 만에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소림의 백팔나한진도 격파할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점창쯤 되는 거대 문파가 타 문파와 전면전을 벌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혹시 싸움이 나더라도 그저 그런 사파 무리나 도적 떼가 고작.

그러니 점창의 진정한 힘을 선보여 소림, 무당과 나란히 설 기회를 목놓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인 것,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이다. 정파와 사파는 물론 마교까지 참전하는 전쟁이니 우리의 진정한 힘을 만천하에 선보일 둘도 없는 기회. 그러니 제자들의 훈련과 대비에 추호도 차질이 있어선 안 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약실을 탈탈 털어 모든 제자들에게 일공단을 제공했으니 평소보다 두 배의 힘을 낼 것입니다. 하하하.”

노익찬 장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점창과 자신이 찬란한 미래가 그려졌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구파일방 중에서도 최고의 문파로 우뚝 서는 모습.

절대로 헛된 꿈은 아니라 믿었다.

역대 어떤 장문인도 이루지 못한 역사를 바로 자신의 손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반면 노익찬 장문 외에도 점창파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로 멀찍이 떨어진 나무 위에서 점창의 진영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

과연 이 먼 거리에서 무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들에게 이 정도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흠.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비무대회가 열린다면 점창의 자리는 없지만, 전쟁이 벌어진다면 점창만큼 힘을 발휘할 곳도 없다고.”

“그래. 호랑이 자네 말이 맞아.”

용과 뱀이 맛있는 먹잇감을 노리듯 입맛을 다셨다.

새로운 무공을 시험할 대상으로 영 부족한 것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그럭저럭 손맛을 느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욕심 같아서는 나 혼자서 모두 상대하고 싶지만, 자네들이 동의하지 않겠지?”

뱀이 슬쩍 운을 띄워봤지만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혈경을 익힌 후 향상된 경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으니까.

점창 사람들이 들었다면 자존심이 상해 쓰러졌겠지만, 서로 더 강한 자를 상대하겠다고 잠깐의 실랑이를 벌인 후 다음과 같이 결론이 났다.

용의 먹잇감으로는 오백의 창기병.

뱀이 데리고 놀 상대는 오백의 검수들.

그리고 장문인과 장로들을 포함한 대략 스무 명의 점창파 수뇌부는 호랑이가 상대하기로 했다.

“마침 이곳이 사천이다 보니 관우가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 술이 식기 전에 적의 목을 베고 오겠다는.”

목을 좌우로 꺾어 몸을 풀면서 용이 말했다.

“자네는 빨리 끝내고 싶은가? 난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새로운 무공을 시험할 생각인데….”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말라고. 해지기 전에 근사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술 한잔해야 하니까.”

뱀이 먼저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곧장 따라나서는 용과 호랑이.

드넓은 평야 위에 흙먼지와 함께 세 줄기 돌풍이 일었다.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 노익찬 장문인이 놀란 눈을 부릅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오는 강력한 기운.

처음엔 무엇인지 몰랐다.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안력을 한껏 돋구니 흐릿하게나마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 장로! 어서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제자들에게 일공단을 복용케 하라!”

장문인이 보는 방향을 장로들도 보고 있었으니 대략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그럼에도 장문인의 명령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장문 사형. 일공단은 최후의 전투에서 사용해야 하지 않습니까? 흑사련을 때려잡을 때나….”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게! 잘못하면 지금이 최후가 될 수도 있어.”

점창 장문인은 감이 좋았고, 문파의 최고수답게 보는 눈도 있었다.

사납게 달려오는 저들이 악의를 품고 오는 거라면, 오늘 점창에겐 길보다 흉이 클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장로들이 서둘러 몇 가지 호각을 불었다.

매우 급작스러웠지만 확실히 점창의 제자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호각 소리가 들리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전투 대형을 갖추고,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일천 명의 몸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강한 투기.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된 노익찬 장문인이 이제는 제법 가까이 다가온 혈승들을 향해 외쳤다.

“멈춰라! 너희는 누구이기에 감히 대점창의 진지로 뛰어드는 것이냐?”

내공이 가득 담긴 외침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점창의 이름까지 건 호통이니 상대가 주춤할 만도 하건만 달려오는 속도는 줄지 않았고, 외려 조소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쯧쯧. 어디다 대고 반말인 건가? 점창이 특별한 실전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고마워하지 않고.”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

의아해하는 순간 한층 거리가 가까워지며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이남 일녀.

다른 둘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이자 현 무림맹주.

바로 자신이 무당, 화산, 아미와 함께 반기를 들게 한 사람.

“거창! 발검! 개진!”

노익찬 장문이 단호하게 외친 후 본인도 검을 뽑았다.

“장문 사형.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들은 또 누구이고요?”

“저자는 남궁 맹주다. 그러니 나머지 둘은 아마도 흑사련주와 황궁의 귀빈이겠지.”

“네? 그들이 어째서 이곳에…?”

“지금 그런 한가한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오늘이 점창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어!”

“장문 사형. 무슨 그런 말씀을? 적들은 고작 세 명인데….”

장로들은 장문인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궁세가가 아무리 오대세가의 수장이라지만 그래봐야 구파일방의 아래.

남궁 맹주는 정치력이 좋아 무림맹주가 된 것이지 무공이 천하제일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닥치고 정신을 집중해!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공이 강한 제자 하나를 당장 아미파로 보내 이 상황을 알려라!”

노익찬 장문인이라고 남궁세가를 무시하는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벌판을 질주해오는 속도 하나만 가지고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꿈도 꿀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경지.

겨우 속도 하나 가지고 뭘 그러냐 싶겠지만, 무공에서 속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이상.

점창의 최고 절기인 사일검법도 오로지 속도에 방점을 찍은 무공이다 보니 노익찬의 놀람은 더욱 컸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빠른 속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뱀, 용, 호랑이는 벌써 점창의 진지에 도착했다.

뱀은 단단한 흙바닥에 칼로 그은 듯한 뚜렷한 궤적을 남기며 점창 검수들을 향해 쏘아졌고, 용은 능공허도인가 싶은 도약을 선보이며 하늘을 날아 창기병에게로 향했다.

점창의 수장들은 제자들을 향해 짓쳐 드는 적을 보면서도 꼼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앞에 호랑이가 나타났기 때문.

이렇게 삼혈승과 점창파의 대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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