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삼혈승 출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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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창파의 말은 뛰어났다.
품종이 좋은 데다 수백 년간 누적된 경험과 기술로 잘 훈련시켰는데, 창기병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말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정기적으로 내공을 써 근골을 만져주고, 구하기 힘든 귀한 약재도 꾸준히 먹였다.
“으아아악!”
그러니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던 창기병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같던 말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한 줌 혈수로 변하는 모습이 심장을 후벼 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절규도 고작 한순간이었는데, 복수를 다짐하며 용에게 달려들다가 창과 함께 깔끔하게 네 동강이 난 것.
“쯧쯧. 점창의 창기병이 강하다던 것은 헛소문이었나? 이래서야 새로운 무공을 시험해볼 여지도 없겠어.”
불만을 쏟아내던 용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창기병들을 바라봤다.
저들의 강함은 집단전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신이 급습을 하여 전열을 흩은 것이 어쩌면 잘못일 터.
그렇다면 차라리 시간을 좀 주는 것이….
생각을 바꾼 용이 풀쩍 뛰어 백 장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창기병들이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흥분한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진정시킨 그들이 쐐기 모양으로 집결하며 투지를 끌어올렸다.
때마침 복용했던 일공단의 약효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후후후. 이제 좀 볼 만하군.”
냉정을 되찾은 창기병의 기세가 하나로 모였고, 주인의 감정을 느꼈는지 말들도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방금 전 용의 손에 몇몇이 당했지만 아직도 오백에 육박하는 숫자.
창기병과 말이 하나가 되고 그 기운이 창끝에 어리자, 창기병 집단은 하나의 거대하고 포악한 괴물로 변했다.
“좋아! 이제 제대로 해보자!”
용이 붉은 기운을 뭉게뭉게 뿜으며 쐐기꼴의 대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아앙!
한편, 뱀은 검진을 이룬 오백의 검수들과 대치 중이었다.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공격을 가했다면 검수들이 열세를 면키 어려웠겠지만, 용과 마찬가지로 뱀 또한 원하는 건 무공의 실전 연습.
그렇기에 검수들이 차분히 검진을 완성할 시간을 주는 것.
점창파쯤 되는 명문의 검진이라면 분명 공력과 감각을 서로 감응해 힘을 극대화하는 묘리가 있을 것이고, 그쯤 되어야 혈경 무공의 연습 상대로 의미가 있었다.
흠… 기대가 너무 컸나?
검수들 간의 연계가 완성되며 급격히 확장되는 기세를 느끼면서도 뱀은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검수들의 합치된 기운은 충분히 가공스러웠지만 검진 자체의 배치가 어정쩡한 것이 한 점에 공격력을 모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검수들이 형성한 관일분광검진(貫日分光劍陣)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초극강의 적을 상대한다는 가정도 있었지만, 오백 명이 단 한 명을 상대하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그러니 검수들의 방위가 어정쩡했고,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최상의 전력을 뽑아내긴 애당초 힘들어 보였다.
뭐… 이게 검진의 한계라면 내가 맞춰줄 수밖에.
뱀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방위와 변화를 따져봤다.
저 검진이 최상의 효능을 발휘하려면 일곱 개의 핵이 발현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검진의 일곱 핵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일곱 명으로 늘어나면 될 일. 마침 새로 익힌 혈경의 무공 중에 그러한 것이 있었다.
생각을 마친 뱀이 행동에 나섰다.
여섯 개의 분신과 함께.
그 순간, 제일 그럴듯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은 호랑이였다.
쿠르르릉!
쐐애액~ 콰아앙!
스무 명의 점창 수뇌부와 경천동지의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온갖 종류의 검강과 검기가 하늘을 가득 덮었다.
제법이군.
상대의 실력에 실망한 용이나 뱀과 달리 호랑이는 점창 수뇌부의 실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익찬 장문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고수인 것도 한몫했지만, 점창의 무공이 합공에 매우 유리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사실 합공이라는 것은 손발이 잘 맞으면 상승의 장점을 발휘하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이고, 그것은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그랬다.
게다가 공간의 한계 때문에 한 명의 적을 둘러싸고 공격할 수 있는 것은 많아야 셋 아니면 넷.
하지만 점창은 사일검법이라는 이름난 절기를 보유하고 있고, 누구나 알고 있듯 사일검법이 유명해진 이유는 찌르기에 있어서는 강호 최강의 무공이기 때문.
찌르기란 손바닥 반만 한 공간만 있어도 가능한 것이니, 스무 명이 한 명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쐐액, 피잉~
송곳 같은 찌르기가 호랑이의 전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구파의 장로쯤 되면 내공의 깊이와 정순함은 물을 것도 없는 법. 그 강한 내공이 한 점으로 응축되어 쏘아지니 얼마나 위력적이겠는가?
빛살처럼 쇄도하는 스무 개의 사일검을 보며 호랑이는 기뻐했다.
즉시 혈경의 기운을 끌어올리며 초감각의 영역에 진입했는데, 그러자 주변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날아오던 사일검들도 이제는 뭐가 더 빠르고 무엇이 느린지 알 것 같았다.
호랑이는 찰나의 순간을 스무 개로 쪼개어 날아드는 공격에 순번을 붙였다.
파아앙!
음속을 돌파하는 소리가 터지며, 호랑이의 외팔이 휘둘러졌다.
혈경의 진기를 가득 담은 손가락이 순번에 맞추어 날아드는 사일검의 응축된 기운을 하나씩 찍었다.
퍽퍽퍽퍽….
스무 명의 점창 수뇌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보지 못했다.
그들 눈에는 호랑이가 마술을 부려 공격이 일시에 소멸된 것처럼 보였을 뿐.
“사, 사술이다! 맹주가 사악한 술법을 쓴다!”
누군가 겁에 질려 외쳤다.
억울한 소리였지만 호랑이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술법으로 보일 정도로 자신의 속도가 초월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이니까.
실은 호랑이가 속도에 집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한월이 펼친 미완성의 심검에 한쪽 팔을 잃었을 때, 자신의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
점창 최고수 스무 명의 사일검을 찰나에 막아낸 이 속도라면… 이제는 심검도 두렵지 않았다.
“후후후, 태양도 꿰뚫는다는 사일검이 고작 이 정도인가? 이렇게 느려서야 원….”
호랑이는 좀 더 빠른 무언가를 기대하며 점창을 도발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여차하면 오늘부로 문파의 이름이 강호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점창파 수장들이 모를 리 없었다.
후웁.
비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한 노익찬 장문이 본인 몸의 요혈을 빠르게 찍었다.
혈도를 불태워 잠력을 이끌어내는 점창파의 비기였는데, 이런 류의 수법들이 대부분 그렇듯 부작용이 엄청났다.
이 모습을 지켜본 장로들도 장문인을 따라 일제히 요혈을 짚었다.
목숨을 잃고 점창이 멸문하는 것보다는 부작용으로 인해 불구가 되는 것이 나으니까.
“모두 목숨을 건다! 단숨에 끝내고 제자들을 지켜야 해!”
유언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장문인은 검에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노익찬 장문이 그렇게 말할 만했다.
제자들의 싸움이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콰아아앙!
쐐기꼴 진형으로 용을 향해 돌격하던 수백 마리의 말들이 와르르 흩어졌다.
화산이 폭발하듯 분출된 핏빛 기운이 창기병의 선두를 강타하자, 쐐기꼴의 앞머리가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한 번의 충돌로 스러진 창기병은 무려 오십 명.
오백 명의 힘에 말들이 질주하는 힘까지 더해졌는데도 용의 주먹 한 방을 이기지 못했다.
흐흐흐.
용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기분이었다.
혈제 영역을 펼치거나 성전을 선포해 수천수만 명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자신의 주먹 한 방으로 수십 명을 뭉갤 수 있다니!
혈경의 무공을 익히기 전 용의 본신 무공은 최강이라 부르기엔 많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부친인 전대 흑사련주도 정면 대결로 죽이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던 것.
제사장의 능력에 더해 순수한 무공마저 이 경지에 오르니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용만이 아니었다.
뱀도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쉭, 쉭, 쉭….
관일분광검진 속으로 뛰어든 뱀과 분신들은 물 만난 고기라도 된 양 날뛰었다.
점창의 검수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사일검법을 흉내 낸 찌르기로 검수들을 겁박했는데, 한번 빛이 번득할 때마다 어김없이 검수 한 명의 관자놀이와 미간이 꿰뚫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젓는 움직임 앞에서는 진법의 묘용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손맛이 좋군.
순식간에 절반에 가까운 검수들이 머리에 구멍이 뚫려 쓰러지자, 뱀은 분신들을 거두어들였다.
남은 검수들을 죽이는 기쁨을 분신들에게 나눠 주기는 아까웠던 것.
“인원이 줄었으니 일곱 개의 핵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 이, 곤, 태 삼방으로 핵을 나눠 검진을 새로 짜는 것이 효과적일 거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점창 검수들에게 조언까지 해준 뱀은 붉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콰아앙!
슉슉슉슉슉~
쌔애액~ 콰앙!
무지막지한 폭음, 음속을 돌파하는 파공음에 더해 두개골을 꿰뚫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점창파 입장에선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
경천동지할 대전투를 펼치는 거면 죽을 때 죽더라도 통쾌하기라도 할 텐데… 이건 그냥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용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수십의 창기병과 말이 육젓으로 변해 곳곳에 고깃덩어리 봉분이 생겨났고, 뱀이 스르륵 움직이는 좌우로는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린 시체가 쌓였다.
육칠백 명이 손 한 번 못 써보고 죽음을 당한 후, 나머지 점창 무사들은 도주를 택했다.
구파일방 명문정파의 자존심 따위는 극한 공포와 좌절감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
하지만 무공의 재미가 한껏 오른 용과 뱀이 도망자를 놔줄 리 없었다.
점창 무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지만 용과 뱀이 속도를 높이자 벗어나질 못했다.
이제부터는 혈경의 무공을 시험하는 것도 아닌 그저 사망을 선고하는 몸놀림.
콰아앙!
퍼엉, 펑!
비명 소리가 연달아 터졌지만 경력이 폭발하는 소리에 묻혔고, 그렇게 일각 정도가 더 흐른 후 더 이상 숨을 쉬는 창기병과 사일검수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소?”
넋이 빠진 노익찬 장문이 호랑이에게 물었다.
호랑이와 점창 수장들의 싸움도 거의 끝이 난 것 같았는데, 스무 명의 장로급 고수들 중 장문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닥에 쓰러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전쟁 아닌가? 약한 쪽이 죽는 게 당연한 법.”
“당신… 당신은 명색이 정파의 맹주 아니오? 아무리 사람이 변했다고 한들 어찌 이리 잔인하게….”
노익찬 장문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
지금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너무 한탄할 필요 없네. 점창이 조금 먼저일 뿐, 조만간 무당, 화산, 아미도 같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흥, 점창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하군. 모든 일이 당신들 마음대로 될 것 같소? 잊지 마시오. 당신의 전전대 맹주가 누구였는지!”
“그래, 나도 기억하고 있다.”
노익찬 장문은 신주의협을 언급하며 호랑이의 기를 꺾어주려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혈경을 익힌 호랑이는 더 이상 신주의협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만에 하나 혼자서 이기지 못하더라도 뱀, 용과 힘을 합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비단 신주의협뿐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라도 그들 셋을 이길 수 없다고 믿었다.
“그건 천마도… 자 혈승도 마찬가지.”
“자 혈승? 그건 또 무슨 말이요?”
“후후후. 너는 알 필요 없어.”
호랑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노익찬 장문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터졌다.
이로써 당당한 구파일방의 일원인 점창이 강호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