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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90화 (167/210)

190화. 천마 출현 (2)

* * *

초로의 사내와 젊은 여인이 아미산을 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에 풍채가 당당했고 여인은 아름다웠는데, 겉보기에는 아미산 복호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부녀 같았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한 탓에 한가로이 사찰을 찾는 여행객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아미파는 본교와 감정이 매우 안 좋은 곳인데, 직접 이곳을 방문하시니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몇 세대 전의 악연일 뿐. 그런 묵은 감정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누가 들었으면 천마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칭찬했겠지만, 유선은 외려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천마가 마음이 선해졌기 때문이 아님을 아니까.

앙숙 관계인 아미파에 대해 부드러운 입장을 취하는 건 인간의 감정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구나. 걱정되는 것이냐?”

천마는 감정이 사라지고 있을 뿐, 머리까지 둔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유선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챌 정도로 감각과 예측은 날카로웠다.

“천마께서 하시는 일인데 제가 어찌 걱정을….”

“마음을 숨길 필요 없다. 걱정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천마가 이렇게 말하니 유선의 걱정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천마는 인간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올라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중을 나온 것은 강한월.

물론 천마신교 소속의 광군영, 소영영, 그리고 천마와 인연이 있는 진가린도 함께였다.

“어서 오십시오, 천마님. 먼 길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쓸데없는 인사는 치워라. 그리고 나는 꼭 필요한 사람만 만나겠다.”

천마가 말한 꼭 필요한 사람에는 광군영, 소영영 등도 포함되지 않았다.

원래 괴팍한 사람이긴 했지만, 교의 수장이 격려 한마디 안 해주는 상황은 몹시 서운할 수밖에 없는 일.

하지만 감히 불평을 할 용기는 없었고, 또 그럴 틈도 없었으니 천마는 강한월 만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그가 말한 꼭 필요한 사람… 즉, 민정화를 만나기 위해서.

“만마의 종주를 뵙습니다.”

“하루속히 와 달라고 독촉한 게 너냐?”

“그렇습니다. 전서에서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생겨….”

민정화가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지만 천마는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을 끊지 않는 것이 감사할 지경.

“너희에겐 중요한 변화일지 모르나 난 원래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무조건 수장전을 통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강한월에게 말했는데, 듣지 못한 건가?”

“물론 전달받았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여 민정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호시탐탐 침공할 기회만 노린다고 알려진 천마가 천마신교의 주력을 모두 이끌고 중원으로 향했으면서 전면전은 극구 피하려고 하다니?

그러면서도 본인은 수장전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어쨌거나 그녀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척혈단의 새로운 전략이 천마의 희망과 맞아떨어졌으니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다섯 혈승만 잡으면 이 전쟁은 끝이 납니다. 천마님의 도움을 기대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고요.”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애매한 표현을 쓰는군. 전쟁을 끝내기 위해 죽여야 할 것은 다섯 혈승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 자 혈승이지.”

유선을 곁에 두고 있어 혈승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높아서인지, 아니면 마신강림의 경지에 이르러 신묘한 혜안이 생긴 탓인지… 천마는 정확히 핵심을 짚었다.

“천마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승패는 자 혈승을 잡는 것에 달렸지요. 하지만 불필요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나머지 혈승들도 처리해야 합니다. 점창파가 당한 것 같은 재앙이 반복되면 안 되니까요.”

“흥, 약해 빠진 것들. 다섯을 잡을 계획을 세우던 열을 잡을 계획을 세우던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 내 관심은 오로지 자 혈승밖에 없으니.”

“양해와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민정화가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형식적인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절절한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전쟁의 승패와 천하의 안녕이 절반쯤은 천마의 손에 달린 것이 사실이니까.

“네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싸워주겠다. 상대가 몇 명이던 네가 원하는 대로 죽여주지. 하지만 자 혈승은 내 차지라는 걸 명심해라.”

민정화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자 혈승은 천마와 신주의협이 함께 상대하는 것으로 계획 중이었기에 방금 천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 천마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정답.

“또 한 가지.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이다. 그 안에 대결이 끝나야 한다.”

“한 달이요? 그… 그건….”

천마의 말에 반박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민정화도 당황했다.

자 혈승이 어디 있는지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한 달 내에 대결을 성사시킨다는 말인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민정화가 부탁하려는 순간, 강한월이 먼저 입을 열어 그녀를 제지했다.

“한 달은 짧은 시간이 아니지요. 천마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이건 도대체….

민정화가 황당한 눈빛을 강한월에게 보냈지만, 그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강한월은 확실히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천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마신의 성정이 천마를 지배하게 되면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 * *

아미산 중턱의 작은 암자.

장학송 문주에게 배정된 숙소였고, 그가 온 이후로는 진가린도 이곳에 묵었다.

진가린이 조금 열 받은 표정으로 한참을 떠드는 중이었고, 장 문주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양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마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그렇게나 서운한 거냐?”

“어머? 서운하긴 누가 서운해요! 그런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노인네 뭐가 좋다고요. 그저… 감사 인사나 전하려고 했던 거죠. 무영보도 그렇고 천년하수오도 그렇고,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구나. 조만간 기회가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서운한 걸로 치자면 광군영이나 소영영 그 친구들이 더할 테니까.”

“그건 그래요. 광 선배와 소 선배는 엄청 섭섭했을 거예요. 신처럼 떠받드는 교주라는 양반이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요. 하여간 누가 천마 아니랄까 봐 성격이 그래 가지고…. 사람이 예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부님도 소개시켜드리고 그러려고 했는데….”

진가린이 아쉬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천마에게 사부 자랑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사부에게 천마 자랑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허허, 나 같은 촌 늙은이가 천마와 인사는 해서 무엇 하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들어가 쉬거라. 밤이 벌써 깊었다.”

진가린이 자기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장학송은 조용히 일어나 장포를 걸쳤다.

손님, 그것도 귀한 손님이 찾아왔으니 의관은 갖추고 만나는 것이 예의이니까.

소리 없이 암자를 빠져나온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고개를 하나 넘었다.

은밀한 기파를 쏘아 자신을 부르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진가린 그 아이가 말이 많더군. 하지만… 좋은 아이지. 제자를 잘 키웠어.”

천마는 존댓말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다.

다행히 장학송은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제자가 칭찬받는 것이 마냥 기뻤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전에 은혜를 베푸셨던데 그것도 감사드리고요.”

“교가 도움받은 게 있어 갚아준 것일 뿐.”

진가린을 소재로 한담이 이어졌다.

천마는 처음 만난 누군가와 대화를 이어가기 적합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장학송의 성격은 또 그 반대라 얼추 합이 맞았다.

하지만 실은 천마도 장학송도 대화의 내용엔 그리 관심이 없었다.

마주선 그 순간부터 상대의 경지를 파악하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느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난 그 순간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 밤에 저를 찾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가린이 이야기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으신 데….”

“이곳 아미산에 정파의 고수들이 많이 있더군.”

“그렇지요. 거대 문파의 장문인들은 물론 전대의 원로 고수들까지 모였으니까요.”

“장학송 당신을 특별히 찾은 것은 아니다. 모여 있는 자들 중 최고수를 찾아 발길을 옮기다 보니 그것이 당신이었을 뿐.”

“허허, 이것 참.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십니다. 소요자 선배도 계신데.”

장학송이 손사래를 치며 민망해했다.

낯부끄러울뿐더러 몹시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만마의 종주이자 대대로 정파 무림 최강의 적인 천마에게 칭찬을 받아 좋을 게 없었다.

“소요자가 드문 경지에 오른 것은 맞지만 그 정도라면 마신강림 이전의 나도 충분히 상대했을 수준이더군.”

“소요자 선배께는 죄송하지만 귀하의 말씀이 맞겠지요. 마신강림을 이룬 천마를 누가 상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나본 적은 없으나 신주의협은 가능하겠지. 그리고 장학송 문주 당신도 가능할지 지금부터 알아보려는 것이고.”

“하하하, 저는 어림없습니다. 게다가 혈교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하는 마당에 천마 당신과 겨뤄볼 생각도 없고요.”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천마는 이대로 장학송을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천마에겐 중요한 의미가 있었으니까.

이럴 가능성을 아예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지만, 장학송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천마와의 대결이라니….

쉬이익.

계곡에 부는 뻔한 밤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장학송이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천마의 기세가 변했으니까.

경천동지할 마기가 뿜어져 나오거나 근골이 요란하게 변형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천마의 기세가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장학송에게는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느낌이었으니까.

“마신께서 강림하시는 겁니까? 천지가 개벽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고요하군요.”

“원래 그러한 것이다. 마신강림이란 표현조차 올바른 것이 아니지. 마(魔)는 태고부터 세상에 존재했으니 강림할 필요 없이 그저 현현하면 될 뿐.”

장학송이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온 검을 뽑았다.

천마의 이야기는 현기를 담고 있어 관심이 갔지만, 담론을 되새길 여유는 없었다.

뜬금없이 만마의 전설을 상대하게 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천마는 온전한 마신강림을 이룬 후 한 번도 대결을 펼쳐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상태의 마신을 강림시키는 것도 이번이 처음일 터였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을 펼치기 전에 스스로의 마신강림을 확인하려는 것이겠지.

그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니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매우 영광이기도 했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 욕구가 있던 터요. 하지만 참고 또 참아야 했지. 어디 오늘 한번 풀어봅시다.”

대자연의 천지원기가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장학송의 몸으로 몰려들었다.

천마의 기세가 아득해지는 것처럼 장학송의 기세도 무채색이 되어갔다.

마신의 길이나 신선의 길이나 인간의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

태초부터 인간 세상에 있었지만 인간의 것은 아닌 두 힘이 격돌했다.

천지를 울리는 폭음이나 계곡이 파헤쳐지는 요란함 없이… 아주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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