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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191화 (168/210)

191화. 천마 출현 (3)

* * *

“아직까지 안 자고 기다린 거냐?”

진가린은 암자 앞에서 안절부절 서성이고 있었다.

장학송 문주 딴에는 몰래 빠져나온다고 한 것인데 그녀가 눈치챈 모양.

“사부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천마랑 싸우러 갔는데 잠이 올 제자가 누가 있겠어요?”

“허허, 싸우기는 누가? 그냥 인사나 하고 온 것이지.”

진가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사부를 요모조모 살폈다.

어디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고 의복도 멀쩡한 것이 정말로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천마가 고작 인사나 나누자고 사부를 불렀다고?

“흠… 그런 것 치고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는데요?”

“그러게 말이다. 천마가 예상외로 말이 많더군.”

장학송이 싱긋 웃으며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진가린에게는 반농담 삼아 둘러대고 있지만, 실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온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경험.

공격을 주고받는 험악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외려 더 위험한 대결이었다.

바로 격을 견주는 대결.

상대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순식간에 소멸되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천마는 온전한 마신의 격을 불러왔고, 장학송도 어쩔 수 없이 격을 높여야 했다.

신선의 도를 좇는 동방선도의 전승자이기에 그 방법이야 알고 있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매우 위험한 부작용이 있기에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것.

마신의 신격으로 물든 천마는 점점 더 아득해졌고, 장학송은 천지원기에 동화되며 존재가 투명해졌다.

말로 하기엔 멋지고 인간의 힘을 월등히 초월하는 능력이 뿜어져 나왔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둘 다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

이 상태가 지속되면 큰일 날 것 같아 장학송이 천천히 격을 낮췄다.

양측의 균형이 깨질 경우 일순간에 소멸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인간도 뭣도 아닌 이상한 존재가 되느니 없어지는 게 좋다는 장학송의 생각이었다.

다행히 천마도 마신강림을 풀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오듯 서로 맞춰가며 격을 낮추는 것으로 이상한 대결은 막을 내렸다.

“그래서… 결국 누가 이긴 건데요?”

“허허, 싸우지 않았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만약 싸우게 된다면요?”

“그러면… 내가 지겠지.”

* * *

비슷한 대화가 다른 곳에서도 오갔다.

장학송과 진가린의 대화처럼 부드러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장학송 문주는 어땠습니까? 천마께서 직접 확인하실 가치가 있었는지요?”

“그는 뛰어났다. 경지의 벽을 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벽 위에 서 있더군.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음에도 말이다.”

유선으로서는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천마가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다.

“이번 전쟁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 장학송 문주가 그처럼 강한 무공의 소유자라면….”

“그는 경지를 초월한 인간이지만 강한 무사는 아니었다.”

유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경지가 높다는 건 곧 무공이 강하다는 뜻 아닌가?

단순히 높은 정도를 넘어 초월했다는 표현을 쓰면서도 강하지는 않다니?

“천마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방선도는 방향성이 명확하더군. 그가 격을 높이자 천지원기와 융화되며 자연을 닮아갔다.”

“그렇다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초인… 선인… 무엇이라 불리든 간에….”

“대단한지 아닌지를 논한다면 그렇지. 하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동방선도의 격은 마신의 파괴력에 미치지 못한다.”

사실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려는 마신의 길과 대자연과의 동화를 추구하는 선도의 길은 달라도 많이 다르니까.

“그렇다면….”

“그래. 장학송 그자는 자 혈승의 상대는 못 될 것이다.”

아쉬워하는 유선을 뒤로하고 천마는 숙소로 들어갔다.

장학송을 만난 이유는 이게 다가 아니었지만 굳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사실 천마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장학송의 무공을 시험하는 게 아니었다.

온전한 상태의 마신이 강림한 후에 과연 자신이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장학송 앞에서 마신강림을 행한 것이었고, 결과는 다행히 성공이었다.

마신이 강림하며 정신이 아득해지고 정신과 몸의 주도권이 마신의 격에게 넘어갔지만, 마신강림을 해제하는 심공을 일으키는 순간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마신의 입김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

마신강림을 행하지 않는 평소에도 마신의 기운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일 년 후, 한 달 후, 혹은 내일이 바로 그 날일 수도 있으니….

민정화에게 못 박은 한 달이라는 시간은 천마로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최대한 양보한 기간이었다.

* * *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은 민정화도 마찬가지.

원래도 급했지만 천마가 한 달로 기한을 정해버리니 더욱 급해졌다.

혼자서 고민하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이었으니 강한월과 제갈윤도 침소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녀에게 붙들릴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 천마께서 한 달 기한을 못 박은 것은… 마신에게 잠식될까 걱정하기 때문일까요?”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이유가 맞을 겁니다.”

강한월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듣는 사람들까지 담담할 수는 없는 내용.

얼굴이 하얘진 제갈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산 넘어 산이네요. 이번 전쟁에서 회귀자들을 무찌른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겠는데요? 차라리….”

제갈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이 무엇인지 강한월과 민정화는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천마와 혈승들이 싸우다 양패구상을 당하면 좋겠다는 말.

하지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척혈단과 천마신교가 동맹을 맺는 동안은 좋든 싫든 같은 편이니까.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해도 늦지 않아. 천마신교의 위험이야 새로운 것도 아니고. 지금은 천마께 감사해야 하는 상황임을 잊지 말아라. 그분이 없었으면 혈승들과 전쟁을 치를 엄두가 안 났을 테니.”

“쩝… 그건 단장 말씀이 맞네요.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맞죠.”

“그래요. 당장의 전쟁만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뱀, 용, 호랑이 이 세 혈승들의 격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단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이들은 상대하는데 인원수가 의미가 있을까요?”

다수로 압박하면 승산이 올라갈 것인지 묻는 것이었고, 강한월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수준에서는 머릿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일정한 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싸움에 참여하는 즉시 낭패를 보게 될 것이고, 오히려 같은 편의 입장만 어렵게 만들겠죠.”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여쭤봤어요. 어쨌든 싸움에 참여할 격이 맞는 사람은 저희 쪽에서는 신주의협과 천마, 장학송 문주님, 소요자님, 그리고 단장 이렇게 다섯 분밖에 없는 거죠?”

강한월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소림에서 송목대사를 모셔오면 가능할까?

자신에게 대부분의 내공을 넘긴 후 약해졌지만 그래도 경지의 격은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강한월은 즉시 마음을 접었다.

인간으로 살다 죽기 위해 경지를 포기한 분을 억지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법.

“현재로서는 다섯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혈승 다섯을 상대해야 하는데 우리도 다섯 인원은 맞출 수 있으니. 자 혈승을 상대하는 것을 신주의협과 천마 두 분께 부탁드리려 했는데 오 대 오의 싸움이라면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요. 하지만… 오히려 상황은 명확해졌어요.”

“뱀, 용, 호랑이를 먼저 치자는 것이죠?”

역시 제갈윤은 머리가 좋았다.

민정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한 것이다.

현재 오 대 오의 대결이 불가능한 이유는 뻔했다.

자 혈승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또한 신주의협을 한 달 안에 모셔올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기 때문.

그렇다면 자 혈승이라는 최대 변수를 미뤄 놓고 나머지 적들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맞으니까.

“그래요. 신주의협께서 얼른 합류해주시면 최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머지 네 분이 뱀, 용, 호랑이 이 셋을 잡아 주시는 거죠. 어때요, 단장님? 가능할까요?”

강한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뱀, 용, 호랑이의 격이 올라갔다고 해도 천마나 장학송 문주가 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머릿수가 의미 없는 수준의 대결이라지만, 격이 맞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역시나 머릿수는 중요했다.

뱀, 용, 호랑이 셋 중 둘만 확실히 잡을 수 있다면 승패의 결과는 분명한 것이다.

“좋아요. 그럼 뱀, 용, 호랑이를 먼저 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죠. 시점은 열흘쯤 후가 어떨까 해요.”

“열흘이나 기다릴 필요가 있나요? 말 나온 김에 즉시….”

제갈윤이 시점을 앞당길 것을 제안했지만 민정화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신주의협께서 오실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니까요. 사마염 원로원주께서 천궁으로 찾아가셨으니 며칠 내에 답이 올 거예요.”

“그건 그렇네요. 신주의협께서 함께 하시면 승률은 십 할이겠죠.”

천하의 운명을 가를 대결의 일정은 이로써 확정되었다.

세 혈승이 청성을 벗어나지 않을지 확인하기 위해 민정화는 정보력을 최대한 가동할 터였고, 혹시라도 점창과 같은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를 강화하는 일은 제갈윤이 지휘하기로 했다.

남은 열흘의 시간 동안 강한월이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최대한 경지를 더 끌어올리고 안정시켜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침소로 가는 도중 강한월은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경지로 혈승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점검을 해보는 것이었다.

패배했던 호랑이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 일전에 당했던 수법에는 다시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즉, 강한월 스스로의 수준이 호랑이와 싸웠던 그때에 머물러 있다면 이제는 승산이 없다는 뜻.

휴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그도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천마와의 대련을 통해 많이 성숙했다.

하지만 온전한 심검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

심검이 완전치 않다면 격이라도 더 높여야 하는데, 그것이 강한월에게는 여의치 않았다.

한 우물을 판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몸 안의 역근경을 기반으로 하자면 열반을 목표로 정진해야 했고, 장학송 문주가 깨닫게 해준 자연체를 기반으로 격을 높이자면 신선이 되는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강한월의 몸에 맞는 옷은 아니니.

역시나 어려서부터 자신의 기반을 다져준 것은 사부 신주의협의 가르침인데… 불가도 아니고 선도도 아닌 사부의 무공이 격을 높여가면 어떤 모습일지는 아예 모르겠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강한월은 침소에 들었다.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을 생각하면 잠자는 시간을 없애고 내공을 가다듬거나 명상에 들어야겠지만, 강한월은 그대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가 게을러졌을 리도 없었고 잠이 모자라 몸이 피곤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불가도 아니고 선도도 아니며 신주의협의 길도 아닌… 강한월 그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서 잠을 청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장면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악몽이지만,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된 바로 그 꿈을 꾸기 위해.

강한월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고, 어김없이 꿈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보이는 혈교 무사들의 무공 초식이나 날뛰는 괴인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지금 강한월이 꿈에서 보고 있는 건 혈교와 싸우다 쓰러져가는 무인들.

그들의 분노와 좌절의 표정, 고통스러운 비명은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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