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결전 전야 (1)
* * *
“자 혈승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천사장 양 혈승이 자 혈승의 처소를 찾았다.
사천의 상황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위태로웠지만 어쩐 일인지 자 혈승은 최근 처소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고, 지금처럼 보고할 것이라도 있지 않으면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다.
“사마염이 방문한 것 때문이냐? 말하라.”
역시 자 혈승.
양은 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따로 보고한 사람이 있을 리도 없는데, 장원 가장 깊숙한 심처에 앉아서도 손님의 방문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 호법이 지금 만나보고 있습니다만, 요지는 신주의협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
“네. 아무래도 선공을 펼칠 계획을 세운 것 같습니다. 뱀, 용, 호랑이가 대상이겠지요.”
고민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자 혈승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고 술잔만 기울였다.
“그냥 지켜만 보실 생각이십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이번 것은 관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뱀, 용, 호랑이가 혈경을 익히고 격을 높였으니 척혈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지요.”
“천마가 왔다.”
“네? 천마신교의 진군상황은 매일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청해성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마교의 본진이 아니라 천마가 단독으로 먼저 움직였다는 말이다.”
자 혈승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양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척혈단의 현 전력에 천마가 더해져도 뱀, 용, 호랑이가 이길 수 있을까?
“천마가… 큰 위협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장학송 정도가 아닐지…?”
“쯧쯧, 네가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부족하구나. 하긴 네가 밟아보지 못한 경지에 있는 자들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에둘러 표현했지만 천마의 경지가 더 높다는 말이며, ‘그’가 아닌 ‘그들’이라 말했으니 장학송 문주의 경지도 그러하다는 뜻.
양이 자존심 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뱀, 용, 호랑이가 위험하겠군요. 제가 가서 돕겠습니다.”
“네가?”
자 혈승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양을 쳐다봤다.
너는 도움이 안 된다고 비웃는 걸까?
양의 자존심은 한 번 더 상처를 입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네. 아무리 그들의 충성심이 의심받고 있다고 한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후후,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네가 갑자기 나타나면 많이 놀랄 텐데? 여러 가지 질문이 있을 것이고….”
“둘러댈 이야기를 준비하겠습니다.”
“어쨌든 싸움은 더 재밌어지겠군.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마염에게는 뭐라고 답을 할까요?”
“신주의협은 당분간 도우러 갈 수 없을 거라고 해라. 홀로 자 혈승의 뒤를 쫓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될 거다.”
* * *
척혈단의 회의실에 간만에 활기가 돌았다.
점창이 참사를 당한 이후 한동안 침울한 분위기였고 분위기가 그러하니 자주 모이지도 않았었는데, 오늘은 다른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복수의 의지랄까… 강한 적에게 크게 한 방 먹이겠다는 희망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신주의협이 자 혈승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 아니요?”
백응신장의 질문에는 기대가 잔뜩 묻어 있었고, 대답하는 사마염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최강의 적인 자 혈승이 이곳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하하하. 그렇다면 뱀, 용, 호랑이 그것들을 잡을 확률이 확 올라간 것이지요.”
사마염이 천궁을 방문하고 들고 온 소식은 사실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당분간 신주의협이 합류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희망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긍정적인 의미를 찾았고, 신주의협이 자 혈승을 쫓고 있으니 자 혈승도 혈교 무리에 합류하지 못할 거라는 건 충분히 좋은 소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희망 때문에 불필요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는데….
“강 단장, 민 소저.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계획을 수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월사태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계획을 바꾸다니요? 사태께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수월사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되었지만, 민정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문했다.
“자 혈승은 배제하고 작전을 짜도 되는 상황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뱀, 용, 호랑이 이 셋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니….”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어쨌든 상황이 보다 긍정적인 것은 맞고요.”
“자네 내 말 뜻을 이해했으면서 시치미 떼는 것 아닌가? 상황이 이러한데 굳이 천마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냐는 말일세!”
“아, 그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천마라는 강력한 패가 있는데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겐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마교와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식인 것을!”
누가 아미파가 천마신교와 앙숙 관계 아니랄까 봐.
천마가 아미산에 도착한 날부터 심기가 불편했던 수월사태는 오늘 작심을 한 것 같았다.
“민 소저. 보다 확실한 승리를 계획해야 하는 군사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수월사태의 말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네. 우리는 명색이 정파 아닌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기느냐도 우리에게는 중요하거든.”
천산 백응신장이 수월사태를 거들고 나섰다.
보아하니 원로들은 물론 각 파의 장문인들까지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원로님들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정파의 입장에서 싸우는 것은 아니니까요. 회귀자와 혈교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정과 마 그리고 황태자의 군대까지 한데 모여….”
“어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림맹과 흑사련 전체를 상대할 때는 민 소저의 말이 맞겠지. 하지만 이번 작전은 뱀, 용, 호랑이 이 셋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지 않나? 이는 비참한 꼴을 당한 점창파에 대한 복수라는 말일세! 구파일방의 일원이자 유서 깊은 정파의 기둥인 점창파의 복수를 마교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수월사태는 이제 탁자까지 내리치며 목에 핏대를 올렸다.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보나 원로들의 말은 가뜩이나 거부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화까지 내며 압박하니 민정화 입장에선 참으로 난감했다.
“사태께서는 진정하시지요. 사태의 말도 일리가 있고 민 소저의 말도 그러하니 차분하게 상의를 해봅시다.”
민정화가 안 돼 보였는지 소요자가 슬쩍 끼어들었다.
배분 때문에 민정화가 말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소요자의 말에는 수월사태도 토를 달기 어려워야 맞지만, 다른 원로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번엔 수월사태가 물러서지 않았다.
“소요자 선배님을 존경합니다만, 이 일만큼은 저도 입장을 굽힐 생각이 없습니다.”
“허허, 누가 사태의 입장을 굽히라고 했나? 입장을 존중하니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자는 게요. 천마가 빠져도 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럼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요.”
“좋소. 자 그럼 사람을 뽑아 봅시다. 누가 천마를 대신해 작전에 나갔으면 좋겠소?”
원로들과 장문인들이 슬 눈치를 살폈다.
상대가 강하다고 겁을 먹을 위인들은 아니니 다들 손을 들고 싶어했지만,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다가 망신을 당하기는 싫었다.
“점창의 복수를 위해 나서고 싶은 마음은 모두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결국 실력이 가장 고강한 사람을 뽑아야 할 텐데… 역시나 백응신장 선배님이나 수월사태 선배님이….”
위무진 맹주가 두 선배를 추천했다.
마음 같아서는 본인이 나서고 싶지만 실력에서 한 수 밀리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그렇군. 역시 백응신장과 수월사태 두 분 후배가 자격이 되시겠지. 그럼 두 분 중 한 분을 선정하면 될 텐데… 이렇게 합시다. 각각 장학송 문주와 강한월 단장의 공격을 한 번씩만 받아 보시오.”
“네? 소요자 선배님 굳이 그렇게 시험을 할 필요가….”
“반드시 필요하오. 우리 중 혈승과 제대로 붙어본 사람이 누가 있소? 장학송 문주는 얼마 전 양 혈승을 상대해 보았고 강 단장은 말할 것도 없지. 두 사람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겪어보고 사람을 정하는 것이 맞지 않겠소?”
난데없이 호명이 된 장학송과 강한월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하지만 소요자가 의도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기에 불편하더라도 나서야 했다.
“소요자 선배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좋아요. 시험을 받겠습니다.”
수월사태가 호기롭게 나서니 백응신장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 앞 정원으로 장소가 옮겨졌고, 수월사태와 백응신장이 장학송과 강한월을 마주 보고 섰다.
“어느 분이 가르침을 주시겠소? 나는 준비되었으니 공격하시오.”
역시나 먼저 나선 것은 수월사태.
장학송과 강한월이 고수인 것은 알지만, 그녀도 아미파의 정종 무공을 칠십 년 넘게 수련해왔으니 두려울 것은 없었다.
게다가 고작 한 번의 공격을 받아내면 되는 것… 그쯤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제가 무례를 무릅쓰고 공격을 하겠습니다.”
장학송 문주가 씁쓸하게 웃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얼마든지 와보라는 듯 수월사태가 가슴을 폈고, 장학송 문주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세 걸음, 네 걸음째 내디뎠을 때, 수월사태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 이상했다.
숨이 막히는 것도, 내공이 방해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초대받지 않은 집에 들어간 것처럼 갑자기 공간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천지원기가, 이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의 모든 기운이 장학송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만약 장학송이 마음만 먹는다면… 손쓸 틈도 없이 바닥에 쓰러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만. 이제 그만 되었소.”
수월사태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서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파악한 사람은 강한월과 소요자밖에 없었다.
“장학송 문주께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셨군요. 만약 상대해야 할 혈승들이 그런 경지라면 저는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수월사태가 패배를 인정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백응신장에게로 향했다.
천마를 대신해 출전할 사람은 그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하지만 선택을 받은 사람치고는 백응신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휴우. 나도 감히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겠소.”
“아니, 왜요? 제가 안 되니 백응신장 선배 당신이라도….”
“실은 수월사태가 패배를 인정하기 전에 내가 먼저 패했다오.”
사람들의 놀람은 수월사태 때보다 더 컸다.
장학송 문주는 걸음을 옮기기라도 했지, 강한월은 언제 공격을 가했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실은 강한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었던 일은 단지 백응신장이 강한월을 지긋이 바라보며 홀로 수 싸움을 한 것.
내공을 겨룬 것도 아니고, 기세 싸움을 한 것도 아니지만… 강한월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대결을 구상하던 백응신장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로 짜릿한 긴장이 밀려들고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당장 검에 베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던 차에 수월사태의 패배 인정이 들려왔다.
백응신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끌어올렸던 공력을 풀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이미 패했으니까.
“내 실력이 부족함은 인정하네. 그럼에도 한가지 확인할 수밖에 없군. 강 단장, 천마의 경지는 자네보다 더 높은가?”
강한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그렇군. 수월사태.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소. 점창의 복수를 원한다면 천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