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결전 전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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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산 최고봉의 암자.
여느 때처럼 뱀, 용, 호랑이가 모여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회의라기보다는 환담 수준이었는데,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
점창을 전멸시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그 흥분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
“몸이 다시 근질근질하네. 새소리밖에 안 들리는 암자에 처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뱀이 말했다.
눈빛마저 번들거리는 것이 욕망을 억제하느라 꽤나 애를 쓰고 있는 듯했다.
“점창 아이들을 짓이겨줄 때의 손맛을 잊을 수 없나 보군?”
“흥, 겨우 점창 정도가 손맛은 무슨.”
“그래도 많은 피가 흘렀지 않나?”
피라는 단어가 내뱉어지자 방 안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말을 꺼낸 용은 물론 뱀과 호랑이까지 잠시 눈을 감고 그날의 희열을 되새겼다.
“혈경의 무공을 제대로 완성하려면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 않겠나? 어떤가? 무당이나 화산 중 하나를 골라 우리 셋이서….”
뱀의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다.
게다가 무당이나 화산이라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제법 수준이 되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은 곳이니 무너뜨릴 때의 손맛도 분명 점창보다 쫄깃할 테니까.
“좋은 생각이군. 어차피 가만둬서는 안 될 놈들이니 미룰 것 없이 우리 손으로….”
“잠깐.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다시 생각해보세.”
용은 적극 찬성이었지만, 호랑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제동을 걸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피가 끓어오르는 것은 호랑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기에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무얼 다시 생각해? 설마… 무당과 화산이 무림맹에 속한 문파라고 편을 드는 건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왜?”
“우리 자신을 위해서일세.”
호랑이가 굳은 표정으로 뱀과 용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감정. 수백 수천의 심장을 가르고 피를 뿌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 이 상태가 정상인가?”
물론 그들은 수많은 살생을 저질렀다.
전생에 척혈단과의 전쟁에서도, 그리고 회귀 이후 현생에서도.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타인의 생명이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피 자체를 갈망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의 대상인 무당과 화산을 친다는 핑계를 달았지만 실제 목적은 그것이 아님을 호랑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피에 대한 갈망일 뿐이라고.
“호랑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혈경을 익힌 후… 우리는 변했네. 괴물이 되어가고 있어.”
“후후후, 무슨 그런 소리를. 우리가 언제 괴물이 아니었던 적 있는가? 비술을 써서 회귀해 남의 몸을 차지해 놓고 정상인이기를 바랐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용이 코웃음을 쳤다.
뱀도 용과 같은 입장이었다.
무공광인 호랑이는 예전부터 비술을 싫어했고 다른 혈승들보다 살생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런 약해 빠진 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우린 이미 괴물이지. 하지만 괴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내가 원한 것은… 기왕 괴물이 되려면 자 혈승 같은 괴물이 되는 것이었네.”
“자 혈승 같은 괴물…?”
호랑이의 이 말은 효과가 있었다.
조금 전 ‘피’라는 단어에 반응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동요가 일어났다.
“그래. 자 혈승 같은. 내가 혈경을 익힌 것은 자 혈승의 경지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게. 우리는 자 혈승의 길로 가고 있는가?”
“무슨 뜻이지? 물론 우리 경지는 아직 자 혈승에 미치지 못해. 하지만 그것은 혈경을 익힌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
“아니, 그렇지 않아. 자네들… 자 혈승이 살인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뱀과 용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멍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들이 직접 자 혈승의 살인을 목격한 적은 없었다.
자 혈승은 분명 괴물 중의 괴물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데… 어째서 손에 피를 묻힌 기억이 없는 것일까?
“호랑이… 자네가 말하려는 것은…?”
“그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네. 혈경을 익혀 무공이 강해졌지만, 이 길로 계속 가면 자 혈승의 길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자 혈승이 일부러 잘못된 혈경을 주었다는 말인가?”
“그건 모르지. 원래 혈경을 익히면 피에 굶주린 괴물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자 혈승이 혈경을 손 봐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끈 것인지. 답은 알 수 없지만, 자 혈승이 걸은 길이 아님은 분명하네.”
뱀과 용은 머뭇거리며 서로를 돌아봤다.
호랑이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심장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욕망을 어떻게 자제한다는 말인가?
“자 혈승과 다른 길이면 어때? 강해지기만 하면 되지.”
“피에 굶주린 혈귀가 되어도?”
“무슨 상관이야. 전생에서 내가 선포한 성전 때문에 죽은 사람만 몇만 명인데….”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용 자네도 알 텐데?”
“그래서 어쩌자고? 이미 익히기 시작한 혈경의 무공을 포기하자는 말인가? 그럴 방법은 있고?”
이번에는 호랑이가 답을 하지 못했다.
혈경의 무공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강한월에게 팔 한 짝을 내어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경지를 더욱 높이면서도 피에 굶주린 악귀로 변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침묵 속에 술잔만 기울이던 뱀과 용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호랑이가 영 못마땅했다.
그 때문에 무당이나 화산을 치자는 이야기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도 화가 났고.
이렇게 분노가 치솟는 것도, 그 분풀이를 할 대상을 찾아 피를 보고 싶은 것도 모두 혈경의 부작용이었지만, 뱀과 용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호랑이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야.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무당과 화산을 용서해줄 필요는 없지.”
“무슨 뜻이지?”
“어차피 전쟁 중이지 않나? 이유야 무엇이든 싸워 무찔러야 하는 것들이고.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손을 쓰자고. 무당과 화산을 쓸어버리고 그 후에 혈경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세.”
마지막으로 한 번.
이 말이 가진 마법 같은 힘은 대단했다.
심지어 호랑이마저도 혹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떤가, 마지막 한 번인데.
고작 한 번 더 손에 피를 묻힌다고 혈경의 부작용이 더 심해질 것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군. 그렇다면 무당과 화산 중 누가 좋겠는가? 아니면 이참에 둘 다….”
가슴에서 맹렬한 욕망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호랑이가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점점 더 참기 어려웠고, 당장에라도 대상을 정해 쳐들어 가고 싶어졌는데… 하지만 이 대화는 계속되지 못했다.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암자로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누구지?”
“이 정도 기운을 뿜는 자라면… 게다가 분명한 혈령의 냄새….”
“틀림없군. 이건 양이다.”
뱀, 용, 호랑이가 암자 밖으로 나갔다.
저만치 짙은 어둠 속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
“여기까지 왔으면 냉큼 달려와 인사나 하지, 뭘 주저하는 것인가?”
호랑이의 말이었다.
양은 분명 무공계열의 혈승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아래라는 뜻.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뱀, 용, 호랑이. 오랜만이군.”
짙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양이 말했다.
이것도 인사라면 인사가 맞지만, 호랑이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호랑이? 나를 그렇게 부른 것이냐? 호칭이 빠진 것 같군. 그사이 존대하는 법도 잊은 것 같고.”
호랑이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기분이 언짢은 건 뱀과 용도 마찬가지였고.
원숭이의 전례가 있지 않은가?
양은 자신들을 ‘대형’이라 칭해야 마땅했다.
“내가 존대하는 법을 잊었다고? 흥, 그러는 호랑이 자네는 팔을 하나 잃었군.”
명백한 도발이자 하극상.
혈경의 부작용 때문에 가뜩이나 심장이 부글대던 호랑이가 이런 도발을 참아줄 리 없었다.
휘익.
호랑이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양의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앞으로 내민 손에는 분명 양의 목이 잡혀야 했지만… 움켜쥔 것은 공기뿐.
호랑이가 선보인 것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양이 피한 것이다.
“이놈이…?”
호랑이의 놀람은 컸다.
혈교에서 무공을 담당한 만큼 양은 분명 강자였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한 수 뒤처졌기에 호랑이 본인이 무공의 수장을 맡았던 것인데….
게다가 지금은 혈경을 익혀 월등히 강해졌는데도 양의 옷깃 하나 건들이지 못한 것이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동료에게 다짜고짜 손을 쓰다니. 제법 감사한 환대이군.”
양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굳이 이렇게 호랑이를 도발한 필요는 없었다.
전생에 그와 호랑이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회귀한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호랑이를 대형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자 혈승을 옆에서 모셨고, 실력도 모자라지 않다고 확신했으니까.
“자, 인사는 이만하면 되었고, 안으로 들어가서 회포나 푸세. 술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용이 환하게 웃으며 양의 팔을 잡아 끌었다.
굳이 직위의 고하를 따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의 호랑이는 뱀이 잡아 끌고 암자로 들어왔다.
“그래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나?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고?”
“잘 지냈지. 자네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아니지만.”
“말속에 뼈가 있는 것 같군?”
불끈하는 호랑이를 자제시키며 뱀이 싸늘하게 물었다.
양의 실력이 제법인 것 같고 남은 혈승도 몇 안 되는 상황이라 굳이 상하 관계를 따질 생각은 없었지만,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까칠한 모습을 반복하는 양의 태도는 한 번 손 봐줄 필요가 있었다.
“왜, 뼈가 있으면 안 되나? 황궁, 무림맹, 흑사련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사실 아닌가?”
“사실이지. 하지만 잘못된 일은 아니야. 회귀하기 전 이미 계획을 세운 것이고 이 모든 것은 자 혈승을 위한 것이니까.”
“후후후, 그렇군. 자 혈승님을 위한 것이었군.”
“그러는 양 너는 어디서 무엇을 했길래 우리를 비난하는 건가?”
용은 정말로 궁금했다.
양은 그사이 어떤 조직을 장악한 것일까?
천하의 웬만한 조직의 사정은 다 확인했지만, 양이 웅크리고 있었을 법한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난… 자 혈승님을 모시고 있었다.”
“뭐, 뭐라고?”
뱀, 용, 호랑이 모두 눈을 부릅떴다.
양이 자 혈승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만, 어쨌든 믿기 힘든 말이었다.
“양 네가 천마신교에 있었다는 말이냐?”
순간 양의 눈이 반짝였다.
뜬금없이 천마신교라니… 이들은 천마가 자 혈승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양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멍청한 동료들에게 사실을 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 혈승님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이봐. 우리는 같은 혈승이라고!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말이냐? 자 혈승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어서 이야기를….”
“언젠가… 아니 조만간 다 알게 될 거야. 그보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지 않을까?”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니?”
“내가 이곳에 온 이유이지. 뱀, 용, 호랑이 너희를 도와주러.”
“도대체 무슨 소리야?”
자 혈승이 언급된 순간부터 주도권은 이미 양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니 양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와주러 왔다니…?
무슨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돕는다는 말인가?
“너희는 습격을 받을 거야.”
“습격? 언제? 누가 감히 우리를…?”
“누구기는 누구겠나? 척혈단. 시간은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