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결전 전야 (3)
* * *
혈승들을 치기로 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결전 전야.
작전에 참여할 네 명의 고수가 한 곳에 모였다.
장학송 문주도 본의 아니게 천마와 실력을 겨룬 적이 있으니, 천마를 처음 만나는 것은 소요자 한 명뿐.
정파의 최고 어른이 마교의 교주와 대면하는 것이 어색할 법도 하건만, 그런 것에 얽매이기에는 소요자의 성품이 소탈하고 넉넉했다.
“만마의 종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요. 같은 편에 서게 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구려.”
소요자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미소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한참 연장자인 소요자가 이리 나오니 천마도 예를 갖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는데, 사실은 진심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적인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소요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정파에도 허례에 물들지 않은 인물이 있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허허허, 살아생전 천마께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 오래 산 보람이 있소이다.”
소요자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지만, 환한 미소 이면엔 씁쓸함이 숨어 있었다.
장학송 문주에겐 조금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소요자도 분명 경지를 넘은 인물.
천마의 지금 상태가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온 것이고, 추후 또 다른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자, 내일이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야 하는 전우들인데 술이라도 한잔합시다.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역시 정이니 마니 개의치 않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장학송 문주였다.
천마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술잔을 마다하진 않았고, 소요자도 평소와는 다르게 꽤 여러 잔을 들이켰다.
“강한월 네가 보기엔 내일 대결이 어떨 것 같으냐? 최근에 호랑이 혈승을 꺾은 너니 분명 느낌이 있겠지?”
첫 번째 술병이 비워질 무렵 소요자가 강한월에게 물었다.
경륜과 연배에서 감히 입을 열 입장이 못 되었지만, 혈승과의 싸움에 관해서라면 강한월에게 묻는 것이 맞았다.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이런… 당장 내일 대결을 펼쳐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쓰나? 우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해야지.”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고 대비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기에….”
“하하하, 그냥 하는 말일세. 나 또한 솔직한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고.”
소요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체면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말하라는 듯이.
“천마님과 장학송 문주님은 승산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다만… 소요자 어르신과 저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이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소요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본인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뜻밖의 답이 아니었다.
최연장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거라는 것이 답답하고 쑥스럽긴 했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일전에 강한월이 호랑이의 팔을 잘랐을 때도 자신은 승리에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혈승들의 격이 상승한 지금이라면 결과는 뻔했다.
하지만 강한월은?
승패를 점치기 어렵다면 몰라도 패배를 걱정할 이유는 없을 텐데…?
“다들 아시겠지만 제 상태가 매우 불안합니다. 심기신(心氣身)의 종합적인 경지를 논하자면 저는 아직 초월경이라 보기도 어렵지요. 다만… 간혹 심검과 유사한 무공이 발현될 때가 있어 운 좋게 호랑이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그것도 어렵다는 말인가?”
강한월은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이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점창파 참사에 남겨진 흔적을 보면 호랑이는 확실히 다른 경지에 올라섰습니다. 제가 그때와 똑같은 공격을 펼친다면 호랑이는 능히 막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격이 실패한다면… 저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겠지요.”
“허허… 이거 편하게 할 이야기는 아니구나. 심각한 문제인데… 내일의 계획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천마와 장학송 문주가 승기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소요자와 강한월이 패한다면 다시 제자리.
상당한 승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작전을 감행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 소요자의 생각이었다.
아마 민정화도 이런 정확한 상황을 모르고 작전을 구상한 것일 테고.
“강한월은 지지 않을 것이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천마가 말했다.
사기를 높이려고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내뱉은 것인데, 당사자인 강한월은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정도 실력이….”
“아니. 너는 이긴다. 심검은 격이 좀 올랐다고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는 심검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발동이 될지도 모르고요.”
“되게 만들어라. 내일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마의 태연한 말.
이번에는 장학송 문주와 소요자마저 쓴웃음을 지었다.
심검이 어디 동네 강아지 이름인가?
당장 내일이 결전의 날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 * *
술병 몇 개가 비인 후 자리가 파했다.
홀로 방으로 돌아온 강한월은 품속에 챙겨온 술병을 꺼냈다.
또르르르.
잔에 술을 따르며 강한월은 생각에 잠겼다.
천마는 무슨 근거로 자신이 심검을 펼칠 수 있을 거라 장담하는 걸까?
마신강림을 이룬 후 천마에게 남다른 안목이 생긴 것은 알고 있지만, 설마 그 능력으로 자신은 모르는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술잔을 손에 쥔 채 강한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마와 치열한 대련을 펼친 보름 동안에도 심검은 전혀 펼치지 못했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술잔을 연거푸 비운 강한월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한편 천마는 장학송 문주와 밤길을 거닐고 있었다.
갑자기 풍취가 일어 달빛 산책을 나선 것은 아니었고, 숙소로 돌아가는 천마를 장학송 문주가 무작정 따라나선 것.
“아까 강한월에게 하신 말씀… 그냥 빈말은 아니신 것 같던데…?”
“강한월 그 아이가 해내지 못한다면 빈말이 되겠지.”
“그러지 말고 솔직히 좀 이야기해 주시지요. 도대체 강한월 그 아이에게서 무얼 본 겁니까?”
천마가 발걸음을 멈추고 장학송 문주를 돌아봤다.
조금은 귀찮다는 듯… 그리고 알면서 왜 묻냐는 듯.
“내가 마신의 눈으로 본 것, 장학송 당신도 볼 수 있을 텐데?”
“허허허, 내게 무슨 그런 능력이 있겠소이까?”
사실 장학송 문주도 천지원기를 일으키면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는 있었다.
다만 타고난 성정상 그렇게 들여다보는 것을 스스로 꺼려 할 뿐.
“장학송 당신은 심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요. 내 공부와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공이지요. 무공에 있어 확실한 천재인 강한월이 저리 갈피를 못 잡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무공이 아닌 것 같소.”
“맞아. 잘 보았군.”
그렇게 짧게 답한 후 천마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뭐 이런 황당할 때가.
장학송은 급히 천마를 쫓아갔다.
“이보시오 천마. 그러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시오. 도대체 심검이 가능하다는 거요 아니라는 거요? 혹시 방법을 알고 있다면 어째서 강한월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오?”
“강한월은 심검을 구현할 수 없어. 하지만 결국 심검을 펼칠 것이고. 문제는 그 횟수가 제한적이라는 건데… 아마도 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이겠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놀리는 줄 알고 화를 냈겠지만, 장학송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혹시… 그런 것이오?”
“그래, 그런 것이지. 그러니 심검을 함부로 펼쳐 낭비하면 안 되지. 강한월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게 나아.”
“하지만 그랬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 심검이 발출되지 않으면…?”
“그런들 어찌하겠나? 원래 그런 무공인 것을.”
천마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홀로 남은 장학송 문주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심검은 그런 무공이구나.
무공 이름에 마음 심(心) 자가 들어있으니… 그 마음에 달린 것이겠지.
* * *
한편, 청성 꼭대기 암자에서 열린 술자리도 슬슬 마쳐지고 있었다.
술을 퍼붓는다고 취할 사람들도 아니고 밤에 잠을 못 잔다고 피곤함을 느낄 것도 아니었지만 자리가 즐겁지 않았기에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자리가 불편한 이유는 역시나 양 혈승 때문.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 혈승을 옆에서 모시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질문이 쏟아졌지만 양은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다.
“흥, 사람이 바뀌었구나. 많이 건방져졌어. 자 혈승님을 모시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은가 보구나?”
그만하라고 용이 눈치를 주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않았다.
“바뀌기는. 회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냥 양일뿐이지.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사람이 바뀐 것은 자네들 아닌가?”
“그런 모함은 매우 불쾌하군! 우리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지 모르면 말을 말게!”
“호랑이의 말이 맞아. 우리가 부귀영화를 탐해서 이 자리를 고른 것도 아니고. 이 모두가 자 혈승님의 대업을 위한 것이지 않나.”
“맞아. 만약 자 혈승님의 지시가 있었다면 황실의 귀빈 자리는 얼마든지 걷어찼을 거야. 거지 소굴로 들어가라 하셨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따랐을 거라는 말일세.”
이번에는 용과 뱀마저 호랑이에게 가세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절박했는데, 자 혈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듯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충성심은 무슨… 그저 두렵기 때문이지.
하지만 잠시 후 양은 생각을 바꿨다.
하긴 이들에게 무슨 대단한 충성심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애당초 자 혈승과 나머지 혈승들의 관계는 군대보다도 엄격한 상하 복종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형성하는 핵심은 ‘공포심’이었다.
최근 뱀, 용, 호랑이 이들의 행보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자 혈승이 이십 년 동안 연락 한번 주지 않았으니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양 자신이야 자 혈승을 지척에서 모셨으니 공포심에 기반한 충성심이 항상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고.
그래… 너희들의 탓만은 아니지.
뱀, 용, 호랑이의 눈빛에 물든 두려움을 보며 양은 생각을 바꿨다.
자 혈승의 공포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이상 저들은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휴우, 내 실언을 사과하지. 자네들 모두 고생이 많았어. 황실과 무림맹 그리고 흑사련을 장악한 것은 자 혈승님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이네.”
양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열자 비로소 분위기가 풀렸다.
눈빛과 표정을 어둡게 만들던 공포심은 심연 깊은 곳으로 사라졌고, 옛 전우들이 회포를 푸는 것 같은 제대로 된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보게, 양. 자 혈승님을 모시고 있었다면… 자네도 혈경을 전수받았는가?”
술잔이 몇 차례 돈 후, 호랑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혈경 전체를 제대로 배울 기회는 없었네. 하지만 일부분을 배울 기회는 있었지.”
“그랬군. 그럼 혹시 자네도… 피를 보고픈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그런 일을 겪었는가?”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호랑이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입맛을 다셨다 하는 것이, 이 순간에도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어 보였다.
자 혈승에 대한 공포심이 가라앉으니 다른 감정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
뭐라 말해야 하나 양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저런 부작용을 겪은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저들에게 준 혈경에 자 혈승이 손을 쓴 모양인데….
“걱정할 것 없어. 말 그대로 혈경 아닌가. 피를 보고픈 욕망이 드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이것이 더 심해진다면? 혈경의 무공을 계속 수련해도 될지 솔직히 걱정이 되어서….”
“걱정할 것 없어. 조만간 자 혈승님을 뵙게 될 테니 그때 여쭤보게.”
“조만간이라면… 언제?”
“일단 내일의 전투를 승리해야겠지. 그러면 그분을 뵐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