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청성 혈전 (1)
* * *
“그들은 아직 청성 주봉의 암자에 있습니다. 청성의 접객원, 요리사는 물론 무림맹과 흑사련에 잠입해 있는 첩보 요원들을 통해 거듭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청성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오문의 정보대 대주가 다가와 강한월에게 보고했다.
최선을 다해, 심지어 목숨을 걸고 확인한 정보이겠지만 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뱀, 용, 호랑이 같은 초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모르게 봉우리를 떠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테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할 터이니 모든 요원들은 지금 즉시 철수시켜 주세요.”
정보대 대주를 물러 보낸 후, 강한월 일행은 청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마, 장학송 문주, 소요자, 그리고 강한월.
어쩌면 무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습격조라 불릴 네 명의 고수.
기습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들은 벌건 대낮에 행동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산길 곳곳에 청성파, 무림맹, 흑사련의 경비대는 물론 동창의 고수들까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번 습격조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어떨 때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쾌속으로 통과했고, 어떨 때는 자연의 기와 동화된 채 느긋하게 지나갔는데… 방법이 무엇이든 결과는 같았다.
경비무사 누구도 이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강한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을 오르려는 천마를 일개 경비무사들이 막는다?
청성산 곳곳이 피로 물들게 될 것이 뻔했다.
강한월은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적들은 점창파 일천 명을 몰살시켰지만, 강한월은 오늘 단 세 명의 피를 볼 생각이었다.
뱀, 용, 호랑이. 이 셋이면 족한 것이다.
“저곳인가 보군.”
느긋하게 걷는 듯했지만 실은 꽤나 빠른 속도였고, 결국 목적지에 도달했다.
봉우리 정상의 암자가 눈앞에 들어오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 같군.”
천마가 나직이 내뱉은 말에 장학송 문주가 답했다.
“그렇군요. 족히 백 명은 되겠는데요?”
“혈승도 셋이 아니라 넷이군. 뱀, 용, 호랑이 외에 누가 또 온 것일까?”
“아마 양일 겁니다. 느낌이 낯이 익어요.”
셋을 치러 왔는데 백이 넘는 적이 대비하고 있다?
게다가 만만치 않은 초고수인 양까지 나타났으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하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조금 의아했고 귀찮아졌다고 느꼈지만 그뿐,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게 다일까요?”
강한월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적이 백이건 이백이건 상관이 없지만, 그 한 명이 있는지는 확인하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맞았다.
천마와 장학송 문주가 다시 한번 기감을 가동했다.
주변에 자 혈승이 숨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 * *
강한월 일행이 기감을 터뜨려 주변을 훑고 있을 때, 암자 안의 혈승들도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양의 말이 사실이었군. 정말로 왔어.”
“흥, 겁도 없는 것들. 달랑 넷이서 왔군. 강한월과 소요자 이 둘의 기운은 알겠는데… 나머지 둘은 누굴까? 만만치 않은 고수들 같은데….”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느낌으로 볼 때 진짜 조심해야 하는 강자들은 그 둘인 것 같은데 도무지 예상이 안 됐다.
둘 중 하나는 기운이 청명한 것이 분명 정파의 고수인데, 명색이 무림맹주인 자신이 감도 못 잡는 숨은 고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나는 장백산에서 온 장학송이야.”
민정화를 죽이러 갔던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양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오늘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레 정해졌다.
“장학송? 들어본 적이 있군. 동방선도의 맥을 이었다지? 하지만 이 수준의 고수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보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굴까?”
용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모호하지만 선명하고 순수하지만 혼탁한 기운.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정인지, 사인지, 마인지조차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인물.
기감을 슬쩍 터뜨리는 것만으로 상대 공력의 뿌리까지 샅샅이 파악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이것이 천마의 기운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마신강림이 완성되면서 천마의 기운의 성격이 완전히 탈바꿈했으니까.
마공의 특징들이 정점을 지나 다른 차원에 이르면서 인간이 짐작하기 어려운 향기를 뿜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직접 만나 따져보면 알겠지. 어쨌든 무시무시한 적인 것만은 분명해. 양 자네가 와주지 않았다면 낭패를 볼 뻔했어.”
자존심 강한 뱀이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적들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양은 어색하고 무안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혼자만이 적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 요상한 기운의 주인이 바로 천마라는 것은 당장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 이들은 천마가 곧 자 혈승이라고 믿고 있으니 스스로 알아챌 때까지 놔둘 생각이었다.
“적들이 저 수준인데, 과연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쓸모가 있을까? 아까운 자원만 낭비하는 것은 아닐지….”
“아깝기는 뭐가 아까운가? 어차피 소모품인 것을. 적이 강하니 더더군다나 시험을 해볼 필요가 있어. 우리는 그사이 힘을 비축하고 저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것이지.”
“그렇기는 하지만….”
뱀은 그래도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자원들은 자신의 혈령을 써서 만든 것이니까.
“아쉬워하지 말게. 이번 전쟁만 이기면 이따위 것들 얼마든지 새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이제는 물릴 수도 없지 않은가?”
용이 뱀을 달래던 그 순간, 암자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앙!
* * *
“허허허, 저것들로 우리를 막을 생각인가 봅니다.”
기감을 퍼뜨려 주변을 탐색하던 장학송 문주가 씁쓸하게 웃었다.
암자 주변 곳곳에서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들이 어떤 괴인들인지 알겠는가?”
소요자가 강한월을 돌아보며 물었다.
강한월이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꿈속에서 수백 번도 더 싸워봤던 괴인들이고, 대부분 현실에서도 부딪혀 본 것들이니.
“뱀, 용, 호랑이가 비술로 제조한 것들입니다. 소요자 어르신도 겪어 보신 음양혈인과 귀장들, 그리고 용의 주특기인 혈제와 성전의 괴인들도 있네요.”
“각각은 위협적이지 않지만 수가 많군.”
“네. 아마도 저희 힘을 빼놓으려는 수작 같습니다.”
“하지만… 저 암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저들을 거쳐 갈 수밖에 없겠군.”
소요자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장학송 문주도 평소와는 다르게 검을 꺼내 들었다.
매우 눈에 익은 검이었는데, 위험한 임무에 나서는 사부가 걱정된다며 진가린이 들려 보낸 백학이었다.
“필요 없다고 했었지만, 이제 보니 검을 빌려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고 저들을 뚫고 가는 데 도움이 되겠어요.”
장학송 문주의 손에 들린 백학에서 반짝거리는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소요자가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처음 진가린이 백학에서 빛을 뿜는 것을 지도한 것이 바로 소요자 자신.
장학송의 손에 들린 백학은 차원이 달랐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동료의 초월적인 힘을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장 문주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소.”
“글쎄요. 못난 모습을 보일까 걱정입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은 익숙하지 않아서요. 저보다는 역시 천마께 기대를….”
장학송 문주가 천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치열하고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천마만큼 든든한 우군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장학송의 기대가 빗나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던 천마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으니까.
“당장에는 내가 낄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수고들 하시게. 나는 어디를 좀 다녀올 테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천마가 휙 사라졌다.
“이보시오. 천마….”
장학송 문주가 천마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순간 괴인들이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콰아아앙!
첫 번째로 들이닥친 것은 귀장들.
뱀이 제조한 귀장들 중에서도 최상위 고수들이기에 뿜어내는 장력과 권폭이 무시무시했다.
폭음과 함께 봉우리의 한쪽 귀퉁이에 큰 웅덩이 생길 정도.
위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
뿌연 흙먼지 사이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찰랑거리는 순간, 귀장 둘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이자들은 나에게 맡기고 어서 다른 자들을…!”
물결을 헤치듯 부드럽게 태극혜검을 펼치며 소요자가 외쳤다.
“아이고, 어디서 이런 얼음덩이와 불덩이들이….”
그 순간 장학송 문주는 음양혈인들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혈령까지 제대로 주입된 혈인이 무려 네 쌍.
총 여덟 명의 최상급 괴인이 만들어내는 음양기진이 장학송 문주를 옥죄었다.
음양이 반복되며 펼쳐지자 주변의 공기 흐름이 요동치며 기이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는데, 웬만한 고수는 그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압력이었다.
엄청난 위력이었고, 대단한 압박이었지만… 음양혈인들의 실수는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것.
이 공격이 소요자에게로 향했다면, 무당의 최고 원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음양혈인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동방선도의 유일한 계승자.
천지원기와 소통하는 것이 입신의 수준에 오른 장학송 문주에게는 극단적인 음양의 변화는 그저 귀찮고 변덕스러운 날씨 정도에 불과했다.
“춥고 더운 것을 서로 나누면 좋지 않겠나?”
장학송 문주의 백학이 빛가루를 뿌리며 춤을 췄다.
검이 마치 지휘봉이라도 된 듯 천지원기를 조정했고, 음양혈인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음과 양의 부조화를 천지원기들이 메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소용돌이.
이지가 제한된 음양혈인들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장학송 문주에게는 음과 양을 활용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순수한 힘으로 공격할 수밖에.
“쿠오오오!”
야수와 같은 괴성을 지르며 혈인 몇이 장학송 문주에게 쇄도했다.
수백 마리 반딧불이 나는 것처럼 빛가루가 뿌려졌고, 팔다리 몇 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것 참… 역시나 목을 베는 것은 영 못하겠군.”
장학송 문주가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나머지 음양혈인들을 잡으러 갔다.
사람을 베어야 한다는 자책감만 아니면 그에게는 손쉬운 승부였다.
음양혈인을 상대하기엔 동방선도가 최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상성의 덕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한월을 둘러싸고 있는 오십여 명의 괴인들.
용이 데려온 괴인들 중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성검사(聖劍士) 무리였다.
각각이 성전 선포를 할 수 있는 힘을 갖춘 혈교의 수호 전사들, 게다가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어 혈제 영역을 펼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이것 참….
환생거사 사건 때 상대했던 닭 혈승의 혈제 영역을 떠올리며 강한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죽이고 또 죽여도 되살아나고,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적들.
게다가 문제는 성검사들은 심장이 터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강한월이 사용하는 미완성의 심검을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심장을 베어도 죽지 않고 살아낼 테니.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이다.
뭐, 상관없겠지.
보름 동안 천마와 맨몸 격투를 벌였던 것을 상기하며 강한월이 성검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휘이익~ 퍼엉!
주먹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성검사의 머리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성검사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지만, 그의 힘은 혈제 영역을 강화하며 다른 성검사에게로 전이되었다.
좋아, 누가 이기나 해보자.
최후에는 성검사 한 명에게 나머지 사십 구인의 힘이 모일 터였다.
오십 명의 힘을 한 몸에 지닌 성검사도 때려눕힐 수 있을 거냐고?
해보면 알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