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청성 혈전 (2)
* * *
물론 암자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았지만 네 명의 혈승들은 초감각을 지닌 위인들… 밖의 상황이 어떤지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역시나 저런 자원들로 막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군. 일 각은 더 버틸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귀중한 자원이 모두 폐기되기 전에….”
뱀과 호랑이는 더 이상 참기 어려운 것 같았다.
애써 제조한 괴인들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근질거려서 그러는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불필요한 일이야. 지금 우리가 돕는다고 그것들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용이 고개를 흔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흥, 자네의 성검사들이야 성전을 발동했으니 이기든 지든 모두 순교의 죽음을 맞겠지. 하지만 내 음양혈인들은 충분히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말일세!”
뱀, 호랑이, 그리고 용은 서로 으르렁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역시나 높은 자리에 올라 배에 기름때가 낀 거라고 양은 생각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나?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성검사나 음양혈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지?”
“이보게 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소모품이나 다름없는 수하들 신경 쓰느라 심력을 낭비하지 말고, 적들의 실력과 수법을 파악하는 데 집중하라는 말일세. 저들은 만만치 않아.”
“흥, 너무 걱정이 과한 것 아닌가? 우리가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호랑이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자신의 밑이었던 양과 대등한 관계로 대화하고 있는 것 자체가 편치 못한 터라, 양이 겁쟁이인 것처럼 치부하고 싶은 속셈이었다.
“그래, 우리가 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어. 특히 장학송은 강하니 그와 맞붙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어. 그것이 호랑이 자네가 아니라는 법은 없지.”
“뭐라고? 이 건방진!”
호랑이는 발끈했지만, 뱀과 용에게는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기감을 집중해 장학송 문주의 무위를 살피니, 과연 양이 우려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자신들의 무공도 그러했지만, 장학송 문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원의 무공과는 결이 달라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신선이 하강하여 무공을 펼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게다가 아직 본격적으로 힘들 드러내는 것 같지도 않았고.
“양의 말이 맞군. 장학송 이 자는 몹시 위험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그런데….”
뱀이 장학송 문주에 대한 경계심을 표할 때, 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는 걸까? 그자의 기운도 범상치 않았는데….”
이 질문에는 양도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아까부터 궁금하던 차였다.
도대체 천마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 *
그 시각 천마는 이웃한 봉우리에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오늘 작전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될 만큼 혈승들의 실력이 만만하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천마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기척을 느꼈거나 정보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실은 위험을 예고하는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하지만 마신강림이 완성되면서 생긴 인간의 것이 아닌 어떤 능력이 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곳은 혈승들이 있는 암자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고.
주변을 휙 둘러본 천마는 널찍한 바위 위에 편하게 앉았다.
그렇게 느긋하게 앉아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동료들은 피 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게 뭔 짓인가 싶겠지만… 이것도 나름 싸움이라면 싸움이었다.
어쩌면 암자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보다 더 치열한.
* * *
자 혈승은 봉우리의 반대편에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점, 그리고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는 점은 천마와 다르지 않았다.
천마… 확실히 범상치 않군.
이것이 천마의 첫인상에 대한 간결한 평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이곳으로 온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어떤 기척도 흘리지 않았고 완벽히 자연에 동화되어 있으니 어떤 고수라도 자신을 알아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마는 이곳으로 왔다.
역시 마신강림.
인간과 신의 영역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경지.
자 혈승은 천마에게 관심이 동했다.
정말로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친 건지 확인하고 싶었고,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깨부수고 싶었다.
자신의 지난 삶이 그러했으니까.
천리를 거스르고 깨부수는 것.
잠시 고민하던 자 혈승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다.
혼란을 일으키고 균형을 깨는데 아직은 천마의 역할이 필요했다.
그래, 조금 더 살아남아라.
자 혈승은 보이지도 않는 천마를 향해 차가운 미소를 보냈다.
* * *
오늘의 이 싸움을 사람들이 보았다면 소요자에 대한 평가가 수정되었을지 모른다.
정파의 최고 어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소림의 송목 대사보다는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지금 펼치는 활약은 그런 평가를 깨기에 충분했다.
전혀 부족할 리 없는 내공을 가졌지만, 유비무환이라고 이곳으로 오기 전 자소단까지 섭취했다.
양이심공을 가동해 좌, 우 각기 다른 무공을 선보였는데, 오른손에 쥔 검으로는 태극혜검을 펼치고 왼손으로는 십단금의 장력을 쏟아내니 부드러움과 강함, 느림과 빠름이 조화되어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승화되었다.
휘리릭~ 타앙!
소리 없이 검이 휘저은 후 간결한 장력이 뻗을 때마다 귀장들의 몸 어디 한군데가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귀장들은 벌써 열댓 명.
물론 소요자라고 아주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귀장 한 명의 손톱에 걸려 허벅지에 가는 혈선 몇 개가 그려졌고, 귀두도를 든 귀장 하나가 난리를 친 탓에 멋지게 기른 수염 한쪽이 싹둑 잘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결론으로 끝맺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상황.
남은 십여 명의 귀장들을 모두 처리하는 데에는 채 일각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한편, 장학송 문주는 소요자보다도 여유가 있었다.
남은 네 명의 음양혈인이 혈령의 힘을 모조리 뽑아내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덤비고 있었고, 오행의 기운을 하나씩 품은 것 같은 다섯 괴인이 추가로 나타나 협공을 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진작에 싸움을 끝낼 수 있었지만 장학송 문주는 일부러 느린 길을 택했다.
상대를 데리고 놀 생각에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간절한 필요가 있을 뿐.
장학송 문주는 고수와의 실전 경험이 거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절정급의 고수조차도 찾아보기 힘든 장백산 외진 마을에서 실력을 숨기고 살았으니, 어디 제대로 싸워볼 일이나 있었겠는가.
기껏해야 시간의 돌을 탈취하러 온 옥룡과 붙었던 것이 다이고, 최근 양 혈승이나 천마와 대결했던 것은 그저 경지를 비교하는 겨루기에 불과했으니.
지금 음양혈인들 그리고 오행괴인들과의 싸움은 한 동작 한 동작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동방선도의 깨달음이 어떻게 공격으로 승화되는지, 상대의 공격은 어떻게 방어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한 초식이 펼쳐질 때마다 실전의 깨달음이 더해졌고, 이 짧은 시간에 장학송 문주는 점점 더 고수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치열한 혈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역시 강한월.
성전 선포에 혈제 영역까지 가동한 성검사들은 두려움을 몰랐고, 웬만해서는 죽지도 않으니 골치 아픈 상대임이 분명했다.
휘익, 퍼어엉!
마흔 번째 성검사의 머리를 가루로 만든 후 강한월은 쓴웃음을 삼켰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적중시킨 것인데, 그만큼 남은 성검사들이 빠르고 강해졌다는 증거.
당연했다. 이미 죽은 사십 명의 힘이 고스란히 나머지 열 명에게로 옮겨졌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에 당황하기에는 강한월의 경험이 너무 풍부했다.
빠직, 퍼엉!
무릎뼈를 박살내 움직임을 봉쇄한 후 채찍처럼 손을 휘둘러 마흔한 번째 성검사의 머리를 폭파했다.
이어서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연환각을 날려 마흔두 번째와 세 번째의 머리에 연달아 꽂아 넣었다.
이미 상대는 더욱 강해져서 발끝이 찌릿할 정도의 반발이 느껴졌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강한월의 전투 감각은 살아났다.
이제 남은 성검사는 단 일곱 명.
당연히 더 빠르고 강해지겠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일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남은 일곱의 힘이 하나로 합쳐지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들었다.
물론 단 한 초식에 머리를 박살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어?
어떤 식으로 남은 적들을 처리할까 구상하던 강한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곱 명의 성검사 뒤쪽에서 바람막이를 깊이 눌러쓴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
하지만 익숙하다고 하기에는 생경한 느낌이기도 해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쌔애액~
강기를 뿜으며 날아오는 성검사의 검을 피하며 강한월은 바람막이 괴인을 살폈다.
술법사의 옷을 걸쳤지만 느낌으로는 분명 비술 괴인.
어떤 능력을 가진 괴인일까?
퍼어엉!
팔꿈치 공격으로 성기사 한 명을 쓰러트리는 동안에도 강한월은 바람막이 괴인을 계속 살폈다.
왠지 성기사들보다 더 까다로운 적일 듯하여 신경이 쓰였다.
휘이익, 타악, 퍼엉!
또 다른 성기사의 손목을 낚아채 땅에 메다 꽂은 후 머리를 밟아 터뜨리는 순간… 강한월은 그, 아니 그녀가 누구인지 감이 왔다.
골격은 더 컸지만 비술로 강화되었다면 이 정도는 이상할 것이 없었고, 강렬한 비술의 요기 속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익숙한 기운은 분명 그녀였다.
정옥수.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용의 딸이자 흑사련의 금지옥엽인 그녀가 어째서?
주교 제조실이 폭파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강한월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때, 바람막이 속에서 정옥수가 차갑게 웃었다.
강한월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것을 그녀도 알게 된 것이다.
비술에 잠식되면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강한월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 목을 꺾어 놓을 수만 있다면, 저 심장에 구멍을 뚫고 피를 빨아 마실 수만 있다면….
그녀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욕망이 불같이 끓어올랐다.
“아슈카 이베 시레무. 오수이 샤카 블러디아….”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강한월은 흠칫 놀랐지만, 사실 그가 놀랄 필요는 없었다.
정옥수의 비술 주문은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성검사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순서를 건너뛰고 성검사들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슈우우욱~
움직임을 멈춘 성검사들의 몸이 마치 불탄 듯 가루로 흩어졌고, 그곳에서 빠져나온 힘이 바람을 타고 정옥수에게로 흘러들었다.
같은 성전으로 연계되어 있으니 힘의 이동이 가능했고, 그녀가 혈제 영역의 최상위 포식자이니 당연한 일.
“강… 한… 월.”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강한월의 이름을 부르는 정옥수는 분명 웃고 있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이것 참….
꽤나 끈질기면서도 불편한 악연이네.
강한월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요자도 그리고 장학송 문주도 얼추 싸움을 마무리 짓는 상황.
자신도 얼른 끝맺음을 해야 했다.
“오시오, 정옥수 소저. 우리 인연을 끝냅시다.”
“쿠오오오!”
봉우리가 무너질 듯 괴성을 지르며 정옥수가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