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197화 (174/210)

197화. 청성 혈전 (3)

* * *

섬뜩했다.

꿈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수많은 괴인들을 상대해봤지만 이처럼 소름 돋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옛날 괴담에 나오는 한을 품은 처녀귀신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바람막이를 벗어 던지고 쇄도하는 정옥수.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에 피처럼 붉은 입술,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표독한 눈빛.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원한과 독기가 강한월의 눈에는 칼날처럼 보였다.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째서 나에게 이정도로 심한 원한을…?

의아했지만 궁금증을 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정옥수가 내뿜는 공격의 파괴력은 원한 못지않게 강력했기 때문.

콰아앙!

강한월이 재빨리 피한 자리가 산사태라도 만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전에도 만검산장의 장주를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꺾어버린 실력이니, 성검사 오십 인의 기운을 흡수한 지금은 오죽할까?

좀 전에 강한월이 느꼈던 섬뜩함의 정체는 다만 원한과 독기 때문만은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강…한…월. 너는…오늘…죽…는…다….”

주문인지 자기암시인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정옥수가 맹공을 퍼부었다.

손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만근의 힘이 실렸고,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속도로 움직이니 위력이 배가 되었다.

게다가 사파 무공의 정수가 집약된 초식 또한 기기묘묘했으니… 이제는 제조된 괴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혈승 중에서도 상위의 실력자와 맞먹는 위력.

그러니 정옥수가 단언하듯 강한월이 오늘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강한월은 불과 얼마 전 이런 마구잡이식 힘겨룸을 지겹도록 경험해보았다는 것.

무려 보름 동안이나… 그것도 천마를 대상으로.

정옥수가 아무리 비술에 당해 강하게 개조되었고, 성전 선포와 혈제 영역의 힘까지 흡수하여 거듭 강해졌다고 한들… 마신강림을 완성한 천마만 하겠는가?

휘이익, 콰아앙!

쌔액, 퍼엉!

얼핏 보기에는 정옥수가 주도권을 쥐고 있고 강한월이 수세에 몰린 것 같았지만, 그건 그녀의 공격이 목표를 가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숨 쉴 틈 없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정옥수의 맹공을 요리조리 피하며 강한월이 가볍지만 실제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반격을 가했다.

초월경의 격과 자연체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

그리고 부드럽고 가벼운 공격에 내재된 근원적인 파괴력.

“크으윽.”

만년한철만큼 단단한 육체를 가진 정옥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고통이 누적되자 속도가 느려졌고, 그러자 강한월에게 타격당하는 간격도 짧아졌다.

그럴수록 독기 어린 눈빛은 더 강렬해졌지만, 그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펑, 파악, 퍼어엉.

싸움을 시작할 때는 정옥수가 열 번의 공격을 펼치면 강한월이 두어 번의 반격을 펼칠 뿐이었는데, 지금은 대여섯 번을 가격당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의 반격도 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 상황.

이대로 가다가는 채 반 각도 못 버티고 그녀의 패배가 분명했다.

아니, 강한월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 시간은 훨씬 빨라질 수도….

사고가 제약된 상황이지만, 그녀의 본능이 경고를 발했다.

더 늦기 전에 이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양팔로 요혈을 보호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정옥수가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벼락같은 공격을 펼쳤다.

생명원에서 강한월을 처음 만났을 때 선보였던 바로 그 공격.

하지만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고 날카로워진 가락지 두 개가 강한월을 노리고 쏘아졌다.

피잉! 피잉!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고,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속도를 논하기도 무색했고, 파공성이 들리는 순간은 이미 가락지가 강한월의 몸속을 파고든 후였다.

“크르릉.”

매우 만족스러운 듯, 정옥수의 입에서 고양이가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가락지를 맞고 웅크렸던 강한월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양손에 잡고 있던 가락지 두 개를 주인에게 되쏘았다.

정옥수가 쏘았을 때와는 다르게 파공성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는데, 단단한 두개골이 더 단단한 가락지에 강타당해 터져 나가는 소리였다.

퍼어억.

가락지가 날아와 박힌 앞쪽에는 작은 구멍 두 개가 뚫렸을 뿐이지만, 반대쪽 머리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독기가 가득 차 시뻘겠던 두 눈에서는 진짜 피눈물이 흘렀고, 그것이 정옥수의 마지막 모습.

강한월은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악연도 인연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어쨌든 그녀는 자신과 연이 닿은 사람이었으니까.

“가락지를 선물한다는 약속은 지켰으니… 편히 쉬시오.”

나직이 중얼거리는 강한월의 곁으로 소요자와 장학송 문주가 다가왔다.

그들의 싸움은 진작에 끝났고, 강한월이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몸풀기치고는 좀 과했군.”

사방에 널린 괴인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소요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만들 것이 뻔한 괴인들을 정리했으니 의미 없는 싸움은 아니겠지요.”

이번 같은 잔혹한 장면은 처음 겪어본 장학송 문주가 스스로를 위로하듯 애써 의미를 담았다.

그런 당위성이라도 없으면 심란한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으니까.

“지난 싸움은 잊으시지요. 진짜 싸움이 남았으니까요.”

덜컥 열리는 암자 문을 바라보며 강한월이 말했다.

열린 문으로 양, 뱀, 용, 호랑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매우 느긋하고 자신 있는 표정.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장학송 문주가 투덜댔다.

“사 대 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건가? 허허, 방금 전투를 치렀는데 숫자까지 불리하다니. 도대체 천마는 어디에 있는 거지?”

* * *

‘이제 시작하는군.’

천마와 대치 아닌 대치를 하는 와중에도 자 혈승은 암자 쪽의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떨거지, 장난감… 그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표현도 후한 것이었는데, 그런 괴인들을 앞세워 싸움을 벌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천마를 잡아두고 있는 동안 신속히 싸움을 끝내는 것이 맞았을 텐데… 역시 수하 혈승들은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기분이 그러하니 또다시 비뚤어진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런 모자란 혈승들을 위해 천마를 붙들어 두는 수고를 계속해야 하는가?

어쩌면 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을 텐데…?

자 혈승이 바라는 것은 혼란과 혼돈.

그리고 그 속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후회와 한탄, 서로에 대한 원망과 질책이야말로 자 혈승이 흥미를 느끼는 유일한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자 혈승은 일부러 기척을 흘리며 서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천마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선택을 하라는 강요.

나를 쫓아올 것인가, 아니면 암자로 돌아갈 것인가?

* * *

바위 위에 걸터앉은 천마는 그 신호를 정확히 받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일부러 기척을 흘리며 멀어지는 자 혈승.

농락당하는 듯하여 기분이 나빴지만, 어쨌든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 혈승이 무슨 속셈인지 알아채기 힘들었겠지만, 천마는 이 상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자 혈승보다 못할지는 몰라도, 심성이 비뚤어진 것으로는 천마도 보통 인물이 아니기 때문.

‘다수를 지킬지, 소수를 도울지 결정하라는 것이군.’

지금 자리를 뜬 자 혈승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점창파가 몰살당한 것 이상의 거대한 살상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고, 마신강림 완성 후 천마의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자 혈승, 당신도 꽤나 미쳤구려.’

자신이 자 혈승을 쫓아간다면 강한월이 위기에 처할 것이고, 반대로 암자로 간다면 자 혈승의 수하들인 혈승들이 위기에 처할 텐데….

수하들의 목숨을 걸고 유흥을 즐기겠다는 것인가?

마신의 감정이 솟구치며 천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그려졌다.

대량 살상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암자로 돌아가서 강한월을 도울 것인가?

천마에겐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 * *

“사사건건 우리 일을 방해한 놈이 바로 너였구나?”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먼저 소리친 것은 뱀이었다.

쏟아지는 눈빛이 하도 독하여 살갗이 저릿할 정도였지만, 강한월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방해가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

“흥, 역시 간이 부은 놈이었군. 명년 오늘이 지 제삿날인 줄도 모르고 큰소리를 치다니. 설마 내 딸아이를 죽인 네놈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번에는 용이 나서서 호통을 쳤다.

정옥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었지만, 실은 얼굴 표정에서 비통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귀자 아비에 비술 괴인 딸이라… 제법 어울리는 부녀지간이긴 했습니다.”

“무엇이라? 저… 저놈이!”

강한월이 이런 식의 대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요자나 장학송이 혈승들의 거친 입을 상대하기를 기대할 순 없으니 자신이라도 나설 수밖에.

그리고 이런 대화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올지 안 올지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천마를 기다려야 했다.

천마가 없는 상황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야말로 난감.

승리할 확률은 채 일 할도 안 되어 보였다.

“뱀, 용… 더 이상 말싸움을 할 필요 없네. 검과 주먹으로 대화하면 될 것을.”

강한월에게는 안타깝게도 호랑이가 초를 치고 나섰다.

눈빛이 이글이글 끓고 있는 것이, 지난날 팔을 베인 수치를 빨리 갚아주고 싶은 게 분명했다.

“남궁 태상가주, 아니 호랑이는 전보다 많이 용감해졌습니다. 동료들이 옆에 있으니 용기가 솟구치나 보지요?”

“닥쳐라! 강한월 너는 나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와 일대일로 먼저 겨루지요. 묵은 원한을 갚기 위한 것이니 다른 분들은 끼어들기 없기입니다.”

강한월이 검을 뽑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시간을 끌려면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만약 사 대 삼으로 싸움이 벌어지면 결과가 뻔하니까.

“잠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호랑이가 뛰쳐나가려는 것을 양이 말렸다.

“왜? 설마 내 복수를 방해하려는 건가?”

“아니, 복수는 해야지.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 녀석의 잔꾀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는 말일세.”

“무엇이라? 그렇군… 강한월 저놈이 시간을 끌려는 것이었군.”

호랑이는 물론 뱀과 용도 양의 지적을 즉각 알아차렸다.

적들이 시간을 끈다고 겁날 것은 없지만, 뻔한 수작에 놀아나 줄 수도 없는 일.

동시에 몰아붙여 끝장을 볼 생각으로 혈승들이 일제히 힘을 끌어올렸다.

이러니 다급해진 것은 강한월 쪽.

【 장 문주, 강 단장. 각자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시게. 나를 도울 생각은 말고 】

소요자의 음성이 장학송 문주와 강한월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는 서글픈 것이었다.

소요자 본인이 최약체임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자신 때문에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할 것을 막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니까.

【 소요자 선배님. 조금만 버티시면 될 겁니다. 저들이 아무리 강해도 무당의 수비를 쉽게 뚫지는 못할 테고요 】

장학송 문주가 소요자를 격려하는 사이 강한월은 머릿속으로 대결의 양상을 그려봤다.

소요자가 버티는 사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혈승의 수를 줄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 중 가장 강한 장학송 문주가 혈승 중 가장 약한 자를 빨리 이겨야 하고, 그 말인즉슨… 자신이 혈승 둘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뜻.

자신이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강한월의 머릿속에 방법이 떠올랐다.

“용 혈승! 딸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소? 그럼 어디 해보시오!”

큰소리로 외친 강한월이 용을 향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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