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청성 혈전 (4)
* * *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냐? 네놈의 상대는 나다!”
강한월이 용을 공격한 순간, 호랑이가 분노를 토했다.
팔 하나가 잘린 원한은 무조건 갚아야 하는 것.
그 기회를 용에게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기다리시오. 나도 명색이 정파인인데, 아무렴 무림맹주보다는 흑사련주를 먼저 잡아야 하지 않겠소?”
강한월이 뻔뻔하게 말하며 용에게 검을 날렸다.
용은 강한월의 속셈이 뻔히 보였지만, 공격이 하도 날카로워 호랑이에게 넘기고 발을 빼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호랑이와 함께 강한월을 쳐죽이면 될 일.
용은 매서운 장력을 날려 검을 밀쳐냈고, 그 순간 호랑이가 강한월의 등을 향해 빠른 검을 찔렀다.
동시에 장학송 문주도 싸움을 시작했다.
강한월이 왜 위험을 감수하고 혈승 둘과 드잡이질을 시작했는지, 그러니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한 것이다.
소요자나 강한월이 쓰러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혈승 하나를 제압해야만 하는 것.
부드럽고 선한 성품인데다 매사 느릿느릿 느긋한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양 혈승. 지난번 못다 한 승부를 냅시다.”
장학송 문주의 선택은 양 혈승.
더 빨리 승부를 내려면 뱀을 고르는 것이 나았지만, 그 경우 소요자가 양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걱정되었다.
챠르르릉~.
백학에서 은하수 같은 별빛이 눈부시게 뿌려지자 양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민정화를 두고 다투었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모습.
하지만 자신 또한 그때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으니….
콰아앙!
맞받아치는 양의 장심에서 핏빛 소용돌이가 용솟음쳤다.
그리고 그 순간, 마지막 남은 자들인 소요자와 뱀의 싸움도 시작되려 했다.
“호호호, 내 몫은 소요자 당신인가? 이것 참… 좋아해야 하나, 아쉬워해야 하나?”
뱀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소요자 앞으로 다가왔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소. 최선을 다해 상대해드릴 테니.”
소요자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말했지만 당연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신이 버텨내지 못하면 오늘의 작전을 실패할 것이고, 그냥 실패가 아니라 이곳에 온 모두의 죽음으로 연결될 것이 분명했다.
척혈단의 최고수들인 자신들이 죽는다면, 이번 전쟁의 결과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터.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던 버티며 시간을 끌어야 했다.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점창파의 참사 현장을 조사하고 온 강한월에 따르면, 이 혈승들은 최근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고 그 성취에 취해 있음이 분명하다 했다.
그 자부심과 자만심을 이용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이 검법은 우리 무당파 무공의 정수요. 장삼봉 조사께서 이 무공을 남기신 이후로 아무도 대성하지 못했지만, 운이 좋게도 나는 어느 정도 성취를 얻었는데, 감히 중원 무학의 최고봉이자 최상승의 검법이라 자부하는 바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소요자는 검을 시전했다.
하지만 검법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리고 힘없이 흐느적거렸기 때문이었다.
“오호, 그것이 장삼봉이 우화등선하기 전 최후의 심득을 얻어 창안했다는 만검(晩劍)?”
뱀은 관심을 보였다.
왜 아니겠는가?
무공을 익히는 강호인이라면 무당파의 전설을 상대하고 깨부수고 싶은 승부욕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능유제강(能柔制强),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
“흥, 헛소리.”
코웃음을 친 뱀은 춤을 추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소요자를 향해 일검을 뻗었다.
장삼봉의 전설이 어떤 것인지 시험하기 위해, 간을 보듯 적당히 날린 공격이었다.
검격이 만검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한없이 부드러운 기운이 검을 감쌌고, 기분 좋은 저항 속에서 잠시 표류하던 검은 결국 힘을 잃고 말았다.
“오호라? 정말 영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특이한 손맛을 경험한 뱀은 관심이 더욱 증폭되었다.
과연 저 뜬구름 잡는 개념의 검법이 어디까지의 강함을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소요자가 교묘하게 머리를 쓴 것도 한몫했는데, 조금만 더 강도를 높이면 만검이 깨질 것 같다는 느낌을 일부러 전한 것.
그래야만 뱀이 여러 번 순차적으로 강도를 높여 시험할 것이고, 그것이 시간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으니까.
“자, 그럼 어디 이번 공격도 막아보아라.”
검에 실린 공력을 늘리며 뱀이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소요자는 잡생각을 지워버리고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마음이 흔들려 혹시라도 만검이 깨지면 그 즉시 난타전이 시작되고 자신은 버텨내지 못할 테니까.
한편, 소요자와 뱀이 매우 느린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강한월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속도였는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빠르기였다.
용과 호랑이를 사이에 둔 술래잡기.
제대로 된 공격과 방어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둘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둘 다를 엮는 것에만 집중했다.
“용! 걸리적거리니까 뒤로 빠져라!”
술래잡기에 여의치 않자 호랑이가 용에게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용도 마찬가지.
한 발 뒤로 빠져줄 생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강한월이 귀신처럼 코앞에 나타나니 그럴 수가 없었던 것.
“쥐새끼의 뒤를 쫓을 필요 없어! 난 자리를 지킬 테니 호랑이 네가 이쪽으로 놈을 몰아!”
용이 나름 머리를 썼지만 호랑이가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 혼자 강한월과 대결을 펼쳐 복수를 하는 것.
이렇게 손발이 맞지 않으니 여전히 강한월의 작전대로 상황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용과 호랑이, 초월경 중에서도 상급이라 할 수 있는 초고수 사이를 오가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
강한월이 가진 역근경의 내공이 탄탄하고, 자연체의 몸놀림으로 공력 소모를 최소화하고 있다지만, 이 속도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심검을 시도해볼까?
차라리 속도를 늦추고 격투로 전환하면 어떨까?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강한월의 고민은 깊어졌다.
하지만 당장은 속도를 유지하며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학송 문주가 양을 꺾거나, 아니면 천마가 돌아와 주기를 바라면서.
온 천하의 안위를 걸고 전쟁을 펼치는 양측의 수장들이 벌이는 싸움치고는 영 어색한 모습.
이것이 목숨을 건 대결인가 싶을 정도로 소요자와 뱀은 느긋하게 움직였고, 이건 술래잡기인가 싶을 정도로 강한월과 용, 호랑이는 정신없이 꼬리잡기만 하고 있을 때.
대결다운 대결을 펼치고 있는 건 장학송 문주와 양뿐이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고수들의 싸움처럼 격한 폭음과 진동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의외로 고요했는데….
양은 몸을 날려 장학송 문주 앞으로 쇄도한 이후에는 특별한 동작을 취하지 않고 고요히 서 있었다. 하지만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았을 뿐 그의 몸 주변으론 칼날 같은 바람이 일어 날카롭게 휘몰아쳤고, 비수같이 뻗어 나온 바람의 파편들이 장학송 문주를 향해 폭사했다.
장학송 문주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지만 머리카락 몇 올이 바람에 베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유가 있었다.
동방선도의 자랑인 자연체의 발걸음으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칼바람 사이를 걸었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각도로 휘몰아쳐 오는 바람은 별빛을 흩뿌리는 백학으로 툭툭 쳐냈다.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도 너무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장학송 문주를 보며 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동방선도의 무학을 대성했구나!
흥, 하지만 자연스러움만 갖고는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양이 뒷짐 지고 있던 두 손을 풀어 가볍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핏빛 안개 같은 것이 생겨나 서로 뭉치더니 역한 냄새와 함께 꿈틀거렸다.
혈경의 무공 중 양이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망혈운(死亡血雲).
구역질 나는 모양새만 빼면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장학송 문주는 보는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저 피구름은 자연의 법칙을 역행시키는 마물. 스치기만 해도 생명력을 갉아먹는 힘이 담겨있음이 분명했다.
‘그래, 이 한 수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히겠군.’
신속히 대결을 마무리할 기회라 여긴 장학송 문주는 백학을 들어 크게 사선으로 베었다.
검 끝에서 수를 셀 수 없는 은하수 같은 영롱한 별빛이 일고, 다음 순간 피구름이 일제히 소멸되었다.
“생명의 이치를 역으로 이용하여 제법 위험한 무공을 만들었구려. 하지만… 내가 수련한 선도 무학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오. 게다가 이곳 대자연의 천지원기가 나를 응원하고 있으니….”
치잇, 장학송 저자의 격이 나보다 위구나.
양은 자신이 한 수 밀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과 장학송 문주의 수준이라면 개별적인 공격과 방어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이것은 격과 격의 싸움.
격에서 밀렸다면 아무리 애써도 결과가 좋지 못할 텐데….
하지만 양은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격이지만 그 외에 부가적인 요소들도 있는 법이고, 딱 봐도 알 수 있는 장학송 문주의 실전경험 부족이 의외의 결과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싸움은 붙어봐야 아는 법.
장학송 문주에게는 아쉽게도 양은 작전을 바꿨다.
더 이상 고차원의 영역이나 격의 대결로 싸움을 풀어가려 하지 않았다.
양의 선택은 막무가내식의 난타전.
콰아앙! 퍼엉! 휘이익!
양이 온몸을 무기 삼아 숨 쉴 틈 없는 공격을 쏟아냈다.
정신없이 날아드는 권강, 장력, 지풍에 전각과 고두술까지… 이런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장학송 문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빨리 끝내야만 하는데.
마음이 급해지니 더더욱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분명 장학송 문주가 양보다 한 수 위이지만, 그렇다고 당황한 상태에서 상대를 압박해 끝을 내기엔 양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각종 공격을 막아내며 장학송 문주가 슬쩍 주변을 살폈다.
소요자는 여전히 부드럽고 우아하게 검을 놀리며 뱀의 공격을 막고 있었지만, 머리는 헝클어지고 입가에는 핏물이 가늘게 흐르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앞으로 한두 번의 공격을 더 받으면 만검의 묘리가 깨질 것이고, 그 이후는 파탄.
한편 강한월은 어느새 술래잡기를 멈추고 두 명의 강대한 적을 상대로 권장을 주고받는 치열한 난타전을 펼치고 있었다.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하여 얼핏 동수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죽음의 문턱에 놓인 동료들을 보며 장학송 문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압!”
동방선도의 계승자와는 어울리지 않게 기합까지 내지르며 휘두른 백학.
몸 곳곳으로 날아드는 양의 공격은 무시하고, 오로지 상대를 잡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크어억.”
양의 공격에 여러 곳을 격타당한 장학송 문주가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비명이 터진 것은 양의 입이었다.
별빛을 뿌리는 백학이 양의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동시에 깨끗이 잘라낸 것이다.
성공했다!
장학송 문주는 피륙의 고통을 참으며 환호했다.
하지만 그 기쁨을 채 표현하기도 전에 또 다른 비명이 들려왔다.
“크으읍.”
“하하하, 드디어 잡았다 이놈.”
강한월의 목이 호랑이의 육중한 손아귀에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난타전을 펼치던 중 용의 장력에 맞아 균형을 잃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호랑이가 손을 뻗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