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청성 혈전 (5)
* * *
순간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장학송 문주와 소요자는 강한월이 처한 상황을 보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고, 혈승들은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진 양을 보고 얼어붙었다.
“이… 이것들이 감히… 우리 동료를…!”
다시 만난 후 편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같은 무공 계열이라 마음이 쓰인 것인지 호랑이가 분노를 토했다.
그에 따라 호랑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강한월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렸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하지만….”
재빨리 달려가 양의 상처를 지혈한 뱀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뒷말을 잇지 못했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양은 더 이상 무공을 펼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이놈들! 더 이상 자비는 없다. 강한월 이 쥐새끼의 목을 댕강 부러뜨린 후, 소요자 늙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학송 촌뜨기를 하나하나 짓밟아주겠다!”
호랑이의 포효에는 진심이 절절히 묻어났으니, 결코 뻔한 공갈협박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한월의 목을 움켜쥐고도 당장 손을 쓰지는 못했는데, 장학송의 무위가 은근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용과 자신은 한데 모여 있지만, 반대로 뱀은 장학송과 소요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만약 자신이 강한월을 죽인다면, 그 즉시 장학송과 소요자는 뱀을 공격할 것만 같았다.
강한월에 대한 복수를 늦춰야 할 만큼 뱀에게 특별한 동료애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뱀의 위기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자 혈승을 만나게 될 텐데, 한 명의 동료라도 더 있어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뱀은 황궁의 힘을 쥐고 있으니 더더욱 중요했다.
호랑이의 이런 생각을 눈치챘는지, 용이 슬금슬금 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이 뱀과 연수할 수만 있다면 장학송의 공격이 아무리 거세도 한동안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 틈에 호랑이가 강한월을 죽이고 합류한다면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될 테니까.
【 장 문주. 조심하시오. 용이 움직이고 있소 】
소요자의 다급한 음성이 장학송 문주의 뇌리에 울렸다.
장학송 문주도 잔뜩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꼭 필요한 조언은 아니었다.
문제는 해결책을 못 찾겠다는 것.
자신이 먼저 뱀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 가는 즉시 강한월의 목이 부러질 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용은 한걸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장 문주.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하오. 안타깝지만… 강 단장도 살리고 이번 작전도 성공할 방법은 없는 것 같소 】
【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
강한월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도 정이 들었고 슬퍼하는 진가린을 마주할 자신도 없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월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예감.
천마가 마신강림을 이룬 후 범상치 않은 감각에 눈떴듯, 장학송 본인도 비슷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속이 타 들어갔다.
이럴 때 천마가 있었다면. 도대체 이 양반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순간, 천마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장학송 문주가 양을 벨 즈음 돌아온 그는, 바위 뒤 짙은 그늘 속에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 역시 나름의 갈등을 하고 있기 때문.
천마가 고민하는 것은 장학송이나 소요자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마신강림에 기반한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발휘하면 호랑이의 손에 잡힌 강한월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마참월의 날카로운 기운은 공간을 건너뛰어 호랑이의 바로 앞에 나타날 것이고, 호랑이가 손아귀에 힘을 주려는 순간 이미 그의 팔은 잘려 나간 후일 테니까.
시도해볼 가치가 있는 또 다른 방법도 있었는데, 검은 마기를 풀풀 날리며 등장해 강한월을 풀어주라 명령하면 말이 먹힐 가능성이 높았다.
호랑이 등은 천마가 곧 자 혈승이라고 믿고 있으니 한번은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천마가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은 앞서 두 가지 방법이 아닌 세 번째 방법 때문.
그 세 번째 방법이 실행되는 것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 장 문주. 무엇을 망설이는가? 어서 뱀을 공격하지 않고? 】
천마의 음침한 목소리가 뇌리에 꽂히자 장학송은 놀람, 분노,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 천마, 이곳에 있었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좋아요, 내가 뱀을 공격할 테니 그 순간 당신은 강한월을 구하십시오 】
【 아니, 난 그를 구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를 구할 수 없어 】
【 이보시오, 천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장학송 문주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
천마의 말이 옳았다.
슬금슬금 이동 중인 용이 뱀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뱀을 잡을 기회마저 놓칠 상황.
【 강한월을 부탁하오! 】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장학송 문주가 뱀을 향해 백학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한 동작이 모든 것의 신호탄이 되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용은 지체없이 뱀을 돕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쳐 놓은 기벽에 걸린 것.
급박한 상황 전개에 호랑이는 분개했다.
천천히 고통을 주다가 죽일 작정이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얼른 강한월을 죽이고 뱀과 용을 도와야 했다.
“흥, 네 동료들은 너를 구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천천히 가지고 놀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이만 죽음을… 헉.”
강한월의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가하던 호랑이가 눈을 부릅떴다.
가슴이 뜨끔한 느낌.
순간 정신이 멍했지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내 손에 잡히는 순간 혈도를 봉했는데…?
생명이 끊어지기 전 까지의 그 짧은 순간, 호랑이는 강한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심검? 일부러… 내 손에 잡힌 것이구나?”
“그렇소. 내 심검은 미완성이라 당신이 피할 기회를 주면 전처럼 실패할 테니까. 어쨌든 운이 좋았소. 심검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용이 당신 곁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테니.”
“내가 자만했구나. 하지만 네놈도… 너희 모두 결국 자 혈승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호랑이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풀썩 쓰러졌고, 혈도를 봉쇄당했던 강한월도 호랑이와 함께 넘어졌다.
“크아악.”
그 순간, 뾰족한 비명이 울렸다.
가뜩이나 열세였던 뱀이 호랑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탓에 장학송 문주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쿠웅.
데구르르.
썩은 통나무처럼 뱀은 뒤로 넘어갔고, 바닥에 닿는 순간 목이 분리되어 데굴데굴 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천마가 싸움에 뛰어들지 않았음에도 혈승 둘의 목숨이 날아갔다.
아직도 기벽에 막혀 있던 용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이지만 아직 마지막 기회는 있었다.
저승길로 떠난 호랑이와 뱀의 혈령.
강력한 힘을 가진 혈령 두개가 분명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에게 흡수될 테고, 그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용은 놀라고 두려운 척 행동하며 혈령이 흡수되기를 기다렸다.
과연 불과 수 초가 지나지 않아 호랑이와 뱀의 혈령이 차례로 천령개로 스며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됐다!
용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랑이와 뱀의 혈령을 완전히 연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렇게 흡수한 것만으로도 이곳을 탈출할 만큼의 힘은 얻을 수 있었다.
“흥, 너희가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라. 오늘의 이 원한은 내가 반드시 갚아줄 테니!”
자신감을 회복한 용이 분노를 담아 외친 후 즉각 몸을 돌려 달렸다.
두 강자의 혈령을 흡수한 자신의 경공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용이 한가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던 기벽.
그 기벽을 친 제삼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허억.”
쏜살처럼 몸을 날린 용은 불과 서너 걸음을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닥에서 엄청난 흡인력이 일더니 용의 발바닥을 아교풀처럼 붙잡은 것.
마신강림의 위력을 통해 극성으로 발휘된 천마군림보 흡자결이 펼쳐진 것이었다.
용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순간, 뒤에서 나타난 크고 두툼한 손이 그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천마.
만 장 깊이의 지하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고 음울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용은 이것이 천마 즉 자 혈승의 목소리라 확신했다.
“자 혈승님! 저희를 구하러 오셨군요. 호랑이와 뱀이 죽었습니다. 어서 저 악적들에게 복수를….”
만약 용이 천마를 자 혈승이라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방금 흡수된 호랑이와 용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저항했더라면….
그렇더라도 결과가 바뀌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약간의 시간은 버틸 수 있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용은 착각했고, 방심했으며, 저항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크아아악.”
듣는 사람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용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먼저 쓰러진 양보다도, 호랑이나 뱀보다도 더 처절한 비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회혈을 통해 침투한 마신의 힘이 상단전에 자리를 잡으려 똬리를 틀던 호랑이와 뱀의 혈령을 불태우더니, 곧이어 용의 혈령마저 지옥의 겁화로 사르고 있었으니까.
“크… 으윽….”
용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혈령을 모두 태운 마화의 불꽃이 상단전과 뇌를 재로 만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투웅.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속은 가루가 된 용의 시체가 거칠게 바닥에 던져졌다.
“천마,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신 겁니까?”
감사와 원망이 동시에 담긴 목소리로 장학송 문주가 물었다.
하지만 천마는 답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아직 혈도가 막혀 쓰러져 있는 강한월도 돌보지 않고 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오. 굳이 부상자를 죽일 이유는….”
연민이 발동한 소요자가 말리려 했지만, 천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양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천마! 멈추시오! 아무리 적이라도….”
방금 용에게 했던 것처럼 양의 머리를 불태우려 한다는 것은 소요자의 착각이었다.
천마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마신의 힘이 양의 상단전을 파고들었다.
양은 본능적으로 마력의 침투를 막으려 몸부림쳤지만… 상대는 마신강림을 이룬 천마.
소영영이 펼치는 섭혼술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양의 방어 금제를 하나하나 파헤쳤다.
붉은 장막이 찢겼고, 피의 강물 속으로 잠겨 드는 기억의 파편들이 천마의 손에 붙들려 끌어올려졌다.
“크르르륵….”
양의 입에서는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신음이 울렸고, 눈과 코에서 가는 핏물이 주르르 흘렀다.
한참을 그렇게 양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던 천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역시… 그랬던 거구나.”
“그랬던 거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인 게요?”
추궁과혈로 강한월의 혈도를 풀어주고 있던 장학송 문주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궁금한 것은 소요자도 마찬가지였는데, 강한월만은 천마의 말뜻을 짐작했는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모두 빨리 복귀해야 할 것이야. 재앙이 벌어졌을 수도 있으니.”
“재앙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요?”
이번에도 천마는 답을 하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척혈단의 본부가 있는 아미산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