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200화 (177/210)

200화. 절망 (1)

* * *

아미산 척혈단 본부로 돌아오는 길.

앞서간 천마야 그렇다 쳐도, 함께 움직이고 있는 소요자, 장학송 문주, 그리고 양을 둘러업은 강한월까지 모두 말이 없었다.

누구 하나 부상을 입지도 않고 적군의 수장들을 모두 처치했으니 이처럼 완벽한 승리도 없었건만, 가슴에 바윗덩이 하나가 올려진 듯이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재앙.

아마도 첫 시작은 천마가 툭 던진 그 말 한마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파심이 지나쳤다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천마라는 이름의 무게가 무거웠다.

게다가 장학송 문주는 물론 소요자와 강한월도 경지에 오른 인물들.

그 경지에 오른 후 남다른 감각이 발달했고, 그 감각이 격하게 비상종을 울리고 있었던 것.

척혈단 본부가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북적여야 할 본부에선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생기, 열정 등 평소 본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기운들이 사라진 후였다.

“사부님, 단장, 소요자 어르신… 오셨어요?”

본부에 도착하니 진가린이 나와 맞이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강아지나 노루 새끼처럼 껑충 뛰어 사부를 끌어안았을 텐데… 반가운 건지 슬픈 건지 무엇인지 모를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가셨던 일은… 잘 보신 거고요?”

“다행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질문을 던지면서도 장학송 문주는 어떤 답이 나올지 두려웠다.

답을 하기 전 눈물부터 흘리는 제자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걱정이 밀려왔다.

“백응신장 선배님이… 위무진 맹주님이… 그리고… 흑흑.”

그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사부의 품에 쓰러졌다.

* * *

지금으로부터 한나절 전.

청성산 봉우리에서 천마와 대치하던 자 혈승.

자신을 따라올 건지 아니면 동료들을 도울 건지 천마에게 선택의 기회를 줬던 그는, 천마가 후자를 선택하자 곧바로 척혈단 본부로 향했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

천마의 결정에 부합하는 결과를 만드는 일은 자 혈승 본인의 역할인 것이다.

본부로 들어서는 자 혈승의 외모가 스르륵 변했다.

키와 근골이 훤칠하게 커졌고, 눈두덩이와 광대가 튀어나오며 인상은 험악해졌다.

자 혈승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평판이나 인간관계는 모두 초월했다고 생각했건만, 모든 일의 끝을 목전에 둔 지금도 주위의 눈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하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었다.

강한월에게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기회를 줘야 하니까.

“멈추시오!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그런 생각을 하며 건물로 들어서자 경비 무사들이 달려와 앞을 가로막았다.

경비 무사 따위를 신경 쓸 자 혈승이 아닌지라 무시하고 걸었고, 당황한 무사들이 무기를 뽑으려는 순간 모두 제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의식을 잃은 것.

그들에겐 무척 다행히도 자 혈승은 이곳에서 대량 살상을 저지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나타난 사람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었다.

“어? 귀하는 누구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천산 백응신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장학송 문주 등이 자리를 비운 지금 척혈단 본부에 남은 최고수는 그였기에, 경계의 책임을 지고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백응신장이라… 나쁘지 않군.

자 혈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를 떠나 먼 천산에 은거했지만, 그 후 두 차례나 만난 적이 있으니 인연이 깊다면 깊다고 할 수 있는 자.

게다가 한 번은 자 혈승으로, 또 한 번은 신주의협의 몸으로 만났던 것도 의미가 있고….

자 혈승은 첫 번째 제물로 백응신장을 낙점했다.

펼친 한 수는 수년 전 백응신장을 향해 펼쳤던 그 수법. 하지만 오늘은 그 강도가 달랐다.

“크어억.”

상대가 손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도 갑자기 전신이 오므라들며 고통이 밀려들자 백응신장은 비명을 질렀다.

어찌 모르겠는가?

이것은 신주의협에게 치료를 받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바로 증세.

의혹이 밀려와 무언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근육이 굳고 신경이 마른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불과 수 초도 지나지 않아 백응신장은 마른 목내이(木乃伊)의 모습으로 죽었다.

이로써 하나.

자 혈승은 이곳에서 네 명을 죽일 작정이었다.

지금 청성의 봉우리에서 죽어가고 있을 혈승이 넷이니까 균형을 맞추려는 것.

그러니 그 대상을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아무리 깊은 애정 따위야 없다지만, 어쨌든 혈승들은 자신에게는 제자와 같은 존재.

급을 맞추려면 사실은 방금 죽인 백응신장도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벌떼처럼 달려오고 있는 일반 무사들이 눈에 찰 리 없었다.

경비 무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급이 떨어진다 평가받은 무사들에겐 목숨을 건지는 행운이 있었고.

그렇게 앞을 막는 자들을 기절시키며 천천히 본부 깊숙이 들어오던 자 혈승이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관심을 끄는 움직임이 발견된 것이다.

자신의 등을 노리고 날아드는 맹렬한 장력.

제법 묵직한 힘이 담겨있는 것이 상대는 절대경에 이른 고수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장력에 끈끈하게 붙어 있는 시커먼 마기.

콰아앙!

파리라도 쫓듯 가벼운 손짓으로 광군영의 육합흑철마장을 흩어버린 자 혈승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멈추시오.”

광군영의 목소리는 평소 성격과 다르게 파르르 떨렸다.

감히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것.

천마 외에는 이런 위압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실은 눈앞의 노인이 풍기는 기도는 천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한편 천마도 광군영을 조용히 응시했다.

실력에 대한 평가는 진작에 끝났고, 지금은 그 가치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

“아쉽게도 너는 자격이 부족하구나.”

말과 동시에 자 혈승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정신을 집중해 대비하고 있던 광군영은 죽을힘을 다해 장력을 내질러 앞을 방어했다.

막았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고, 장력을 뚫고 들어온 지풍에 걸린 광군영은 그대로 쓰러졌다.

자 혈승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여기저기서 호각이 울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오히려 잘되었다 생각한 자 혈승은 제자리에 멈춰서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달려오는 자들의 얼굴과 기도를 하나하나 눈에 담으면서.

어느새 백 명 이상 모여든 사람들을 제치고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자신이 직접 무림맹주 자리를 물려준 자이니, 자 혈승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오신 뉘시기에 이처럼 소란을 피우는 거요?”

“설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내가 뭐 세상 모든 사람을 아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당신은 누구인지 알 것도 같구려. 무모하게 단신으로 이곳에 침입한 것을 보니, 당신이 바로 그… 자 혈승이겠군.”

의미 없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 혈승은 위무진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전직 무림맹주이니, 현 무림맹주 호랑이의 죽음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상대는 없었다.

두 번째 제물로 더할 나위 없군.

결심을 한 자 혈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그게 위협이 되었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챙챙챙챙….

“모두 경거망동 말고 뒤로 물러서시오!”

위무진 맹주가 내공까지 담아서 다급히 외쳤다.

숫자로 밀어붙인다고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은 너무도 명확했으니까.

“나와의 대결을 원하는 것이오? 좋소. 얼마든지 상대해 드릴 테니, 나와 겨룬 후 이곳을 떠나겠다고 약속하시오.”

위무진은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생각했다.

본인 목숨 하나로 이 재앙을 떠나보낼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

그 순간 힘을 모아 함께 싸우자는 전음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지만, 위무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넷.”

“넷이라니? 무슨 뜻이오?”

“오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자의 숫자다. 그보다 적지도 또한 많지도 않을 것이다.”

이건 또 뭐 하는 장난인가?

위무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단 네 명이라면 최악의 상황은 면하는 것도 같았다.

백응신장이 먼저 갔고 이제 자신의 차례이니 남은 인원은 단 두 명.

누가 죽는 것이 가장 피해가 덜할까 생각하던 위무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뭐라고 죽을 사람을 고른다는 말인가?

골라진다고 자 혈승이 그대로 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맹주. 정말로 홀로 싸울 생각이요? 그러지 말고 다 함께….”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서는 위무진을 향해 수월사태가 말했다.

고맙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짜증도 났다.

아니 저 선배는 보는 눈도 없나? 여럿이 덤벼도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뻔히 알면서….

어서 도망칠 궁리나 하지 않고… 에잇.

차마 말로는 못 하겠기에 눈빛으로 부르짖은 위무진은 자 혈승을 향해 쇄도했다.

무림맹주에서 쫓겨날 때 이미 호랑이에게 죽을 뻔했던 목숨, 크게 미련은 없었다.

앞으로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할 남은 사람들이 걱정일 뿐.

“타하압!”

품격에 어울리지 않게 우렁찬 기합까지 쏟아내며 위무진이 화산의 절기를 펼쳤다.

죽기를 각오했을 뿐 진짜로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 이번에 휘두른 검은 그의 평생의 깨달음과 고된 수련이 모두 녹아 있는 절초 중의 절초.

백이십팔 개의 검영이 휘몰아친 후 단 한 송이의 매화가 피어났다.

“오오오!”

숨죽이고 지켜보던 척혈단 원로들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비록 단 한 송이의 매화였지만 그 안에는 거대하고 고고한 화산의 기상이 오롯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위무진이 선보인 뜻밖이고 엄청난 검법에 다들 기대가 부풀어 올랐지만, 막상 공격을 당한 자 혈승은 별다른 감흥을 못 얻은 것 같았다.

산 하나의 기세와 중력을 담고 날아오는 매화를 향해 손을 든 그는, 매화가 닿는 순간 가볍게 반대 방향으로 밀쳐냈다.

“크으윽.”

위무진이 가슴을 움켜쥐었고, 입가엔 가늘게 핏물이 흘렀다.

자신의 모든 힘이 연결된 매화가 튕겨 나오는 순간 그 역시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발출되었던 곳으로 역으로 날아가는 매화는 마치 계절이 몇 번 바뀐 듯 선명함을 잃고 흐려져 갔고, 위무진의 몸에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쿠웅.

그와 동시에 위무진도 모든 기력이 소진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위무진. 기백과 재기가 넘치는 자였구나. 그에게 추가로 백 년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어쩌면 기회가 있었을지도….”

자 혈승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지만, 그 어떤 감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위무진 맹주가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을 펼쳤음에도 단 한 수를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자, 지켜보던 모두는 참을 수 없는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싸우러 덤비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 자 혈승은 보다 여유롭게 다음 제물을 물색할 수 있었다.

아직 두 명의 피가 더 필요했으니까.

누가 좋을까?

자 혈승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척혈단의 위세를 꺾기 위해 고수를 죽일까?

아니면 모두를 슬프게 할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때마침 자원자가 스스로 나섰으니까.

“네 개의 목숨만 취하겠다고 하셨소? 다음 상대로 나는 어떻소? 이래 봬도 명색이 무림맹의 원로원주이자, 언젠가 당신의 목을 베어 줄 신주의협의 사형이니 꽤 적당하지 않소?”

사마염.

자 혈승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신주의협의 행세를 한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사형으로 모신 사마염.

잘난 사제에게 질투가 날 법도 한데, 언제나 넉넉한 인품으로 곁을 지켜준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강한월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면….

맞다.

다음 제물로 사마염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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