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201화 (178/210)

201화. 절망 (2)

* * *

사마염이 특별히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위무진 맹주가 먼저 나섰으니 다음은 당연히 원로원주인 자신의 차례라 생각했을 뿐.

살 만큼 살았고 명성도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 정도면 이번 생에 후회나 미련 따위는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사제 신주의협 그리고 사질 강한월과 함께 술 한잔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것을.

상상만 해도 흐뭇한 기분이 들어 사마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 표정 그대로 사마염은 검을 들었다.

백응신장과 위무진도 쓰러진 마당에 언감생심 싸워서 이길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평생 검을 수련한 무인.

위무진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한 수는 정말 원 없이 멋지게 펼치고 싶었다.

위이이잉~

중단세의 자세로 검을 치켜들자, 사마염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의 형상이 떠올랐다.

검이 뿌리는 금빛은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만큼 사마염이 처한 처지와 대비되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허허허, 금검이 이처럼 거대하게 떠오른 것을 보니 내가 죽을 때가 되긴 되었나 보구려. 전에는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더니만. 물론 이 정도야 내 사제 신주의협은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이룬 경지이지만. 허허허.”

찬란한 금빛 검을 자 혈승 쪽으로 겨누며 사마염이 호탕하게 웃었다.

노검객의 초연한 모습이 감동이라도 준 것일까?

자 혈승은 그에게 작은 선물을 해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도도한 기세로 몰려오는 금빛 검을 향해 자 혈승이 팔을 들었고, 손에서 검의 형상을 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채애애앵~

사마염의 금검과 자 혈승의 기검이 부딪히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금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눈부심을 참을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마염이 이 정도로 고수였던가?

자 혈승의 선물.

하지만 사실은 선물이 아니라 노검객의 마지막 순간에 저주를 내린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사마염은 알았던 것이다.

폭발적으로 발산되는 이 금빛은 자신의 금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 혈승의 기검에서 뿜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 금빛은 금검문만의 독창적인 수법이고, 세상에서 이것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에는 신주의협과 강한월밖에는 없는데…?

설마…? 말도 안 돼!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려던 사마염의 계획은 틀어졌다.

마지막 순간 의문과 불신, 경악과 공포가 동시에 밀려왔고, 이것이 육신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금빛 사이에 스며 있던 파괴력에 의해 뼈와 살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와중, 사마염의 입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한월… 이… 불쌍한 놈….”

눈을 못 뜰 정도로 찬란했던 금빛이 사라진 자리.

사마염의 사체일 것으로 예상되는 잿빛 가루만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비록 착각이었지만, 사마염이 놀라운 신위를 선보였음에도 자 혈승을 어쩌지 못하자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한편, 이 순간만큼은 자 혈승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랜 기간 사형으로 모셨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것이 후회되었던 걸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마염을 죽이면 마음속에 찜찜하게 남아있는 강한월에 대한 감정이 정리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불필요한 감정들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한숨을 한 번 내뱉어 상념을 떨쳐버린 후, 자 혈승이 주변을 돌아봤다.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자 혈승이 공언한 네 명의 죽음.

아직 한 명이 남아있는 것이다.

명성이나 무공으로 보자면, 마지막 제물로는 아미파의 원로 수월사태가 적당했다.

지금 청성의 봉우리에서 희생되고 있을 뱀이 여인의 몸을 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죽일 넷 중 하나는 여인인 것이 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 혈승은 수월사태를 그냥 지나쳤다.

마지막 제물로 누가 좋을지는 진작에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

휘익.

공포에 잠식당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자 혈승의 몸이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본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전각.

마지막 제물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굳이 여인의 처소에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어서 나오거라.”

자 혈승이 점잖게 명령하자 전각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두려운, 당황한, 화난 모습으로 걸어 나오는 사람들.

제갈윤, 위청보 등 문무대의 대원들, 민정화, 그리고 민정화를 호위하듯 바짝 붙어 선 유선이었다.

자 혈승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을 주시했다.

좀 전에 상대한 원로들에 비하면 명성이랄 것도 없는 젊은이들이지만,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수하들을 궁지에 몰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강한월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

“셋을 죽였으니 이제 단 한 명만 더 죽이면 되네요. 누구를 죽일지 결정은 하셨나요?”

유선이 독기를 잔뜩 품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톱에 눌려 피가 배어날 만큼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억지로 공포를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글쎄다. 누가 좋을 것 같으냐?”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지만… 소개하자면 저는 천마의 제자인 유선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당신을 따라 이 땅에 회귀한 개였죠.”

놀란 민정화가 급히 말리려 했지만 유선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유선은 일부러 자 혈승을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 제물로 선택되도록.

친구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생각도 일부 있었지만, 그보다는 이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자 혈승이 두려워 뒤로 숨는다면 평생 이 공포를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유선은 그게 싫었다.

“십이혈승의 배신자가 바로 접니다. 멍청한 원숭이를 속여서 천마가 곧 당신이라 믿게 만든 것도 저고요. 게다가 당신과 전쟁을 벌일 천마의 제자이기도 하니… 오늘 마지막으로 손쓸 상대로 매우 적합한 것 아닌가요?”

유선은 자 혈승을 자극하며 마공을 끌어올렸다.

백만 분의 일의 가능성도 없겠지만, 아무 저항 없이 그의 손에 맞아 죽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천마신공으로 멋지게 공격을 펼치는 것, 그것이 그녀의 각오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자 혈승은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실은 그는 매우 흡족한 눈으로 유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며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길을 찾고 있는 모습이 자신이 추구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다른 아이들도 저 아이와 같았다면, 어쩌면 삶이 조금 더 재미있었을지도….

“그래. 네가 나를 배신하고 천마에게 배운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꾸나.”

자 혈승의 말이 끝나는 순간, 유선이 폭발적으로 마기를 뿌리며 쇄도했다.

하지만 자 혈승의 몸으로 날아드는 공격은 하나가 아니었다.

유선 혼자 죽게 놔둘 수 없었던 동료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미쳤어? 모두 뒤로 빠져!”

놀란 유선이 외쳤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무영보를 극성으로 시전한 진가린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검을 뻗었고, 그 위로는 소영영의 귀면비가 날았다.

위청보가 소환한 이매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틈에는 무공에는 소질이 없는 제갈윤마저 검을 들고 함께 달렸다.

“이것들이 정말!”

자 혈승에게 갈길 장력을 준비하던 유선은 생각을 바꿔 진각을 밟았고, 그 순간 지면에서 천마군림보의 흡입력이 솟아나 동료들의 발을 묶었다.

기지를 발휘해 어렵게 마련한 단 한 번의 기회.

유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장력을 날렸다.

콰콰콰콰콰앙!

앞서간 장력을 두 번째 장력이 덮었고, 연달아 세 번째 네 번째 장력이 밀려오는 중첩장.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최고 최강의 공격, 천마멸겁장(天魔滅劫掌)이었다.

“나쁘지 않군.”

짧은 감상평을 던진 자 혈승이 겹겹이 날아드는 장력을 하나하나 해소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단숨에 공격을 소멸시킬 수 있었지만, 운명에 저항하는 유선이 기특해서인지 직접 손을 쓴 것이다.

“살아남아라. 언젠가는 네가 편히 살 날이 올지도 모르니.”

자 혈승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유선과 동료들의 몸이 일제히 뒤로 튕기며 바닥을 굴렀다.

꿈틀대지도 못하는 것이 즉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자 혈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역시 저였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목소리.

모두가 쓰러진 와중에도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유일한 사람… 민정화였다.

“어째서 내가 너를 골랐을 거라 생각한 것이지?”

“글쎄요…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유선을 살려 두신 걸 보니 제가 소의 딸이라고 벌주시려는 건 아닐 테고…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아마도 제가 중요한 사람이어서 그렇겠죠.”

“네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맞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뱀, 용 등을 치는 오늘의 작전은 성공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황실이 이 전쟁에서 빠질 것이고 전력이 급격히 약해질 터… 척혈단 연맹의 힘도 마찬가지로 약화시킬 필요가 있으시겠죠? 저를 고르셨다면 잘하신 거예요. 제가 척혈단의 두뇌이자 자금줄이니까요.”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는 듯이 민정화는 당당하게 말했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은 민망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초고수 여럿을 죽이는 것보다 그녀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척혈단에게는 더 큰 타격이 될 테니까.

하지만… 자 혈승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강한월에게 중요한 사람이냐고.

“네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이냐?”

“그렇게 물으시니 조금 서운하군요. 모든 정보를 관리하고 작전을 수립하는 데다가 돈줄까지 쥐고 있는데 그걸로 부족하다는 말씀이신 가요?”

자 혈승은 어서 더 말해보라는 듯이 민정화를 조용히 응시했다.

“물론 제 역할은 더 있어요. 강한월 단장의 상담사 역할은 물론 우울할 땐 술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자 혈승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마치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러니 어서 저를 죽이고 이곳을 떠나세요! 애먼 사람들 겁주지 말고 어서!”

이제는 말 섞기도 귀찮다는 듯이 민정화가 소리쳤다.

당연히 살고 싶었지만, 과하게 똑똑한 그녀는 오늘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니 모든 일의 흉수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하오문주의 얼굴과 강한월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습기가 차 뿌옇게 된 시선으로 자 혈승이 뻗은 손이 보였다.

그것이 그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쿠웅.

심장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고 목이 싹둑 베인 민정화가 바닥에 쓰러졌다.

앞선 세 죽음과는 다르게, 자 혈승은 일부러 잔혹한 모습의 시체를 남겼다.

강한월이 직접 보기를, 그래서 심하게 격동되기를 기대하면서.

할 일을 마친 자 혈승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때마침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마염의 죽음으로 증폭되었던 공포가 이제서야 가라앉아, 비로소 민정화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어디로 갈까?

자 혈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혈승 연합은 붕괴되었지만 이대로 전쟁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혼란이 지속되길 바랐다.

그러려면 힘의 균형이 중요했다.

민정화의 말대로 황실은 전쟁에서 빠질 것이고 상대에겐 천마신교가 있으니… 척혈단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그래, 소요자 그 노인이 무당파 출신이었지?’

목적지를 정한 자 혈승이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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