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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02화 (179/210)

202화. 절망 (3)

* * *

민정화의 시신이 든 관 앞에서 강한월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 웃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얼핏 보기에는 지금도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억지로 참고 있을 뿐, 속마음은 비탄과 분노로 뭉그러지고 있었다.

민 소저가 나에게 이토록 중요한 사람이었나?

예상치 못한 큰 슬픔에 잠식되며, 강한월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의 특별한 재능에 경외심을 품었고, 도움에 감사했으며, 또한 그녀가 대단한 미모를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연모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어쩌면… 그의 감정이 돌처럼 메말라 몰랐을 뿐, 단단하게 벽을 쳐 놓은 마음 한편에서 특별한 감정이 본인도 모르게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땠든 간에, 그녀는 그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흑시의 주인이자 하오문의 후계자로서 남들은 꿈도 못 꿀 부귀영화가 보장되어 있던 그녀.

하오문주가 혈승이라지만, 그녀의 두뇌와 처세술이라면 얼마든지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안위는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없게도 강한월을 만났고,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항상 전면에 나섰다.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강한월은 모르지 않았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게 되면 그때 감추고 있던 그 마음이 드러나리라는 것도.

그러니 강한월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어떤 책임을 져야만 하는지를.

“단장….”

퉁퉁 부은 눈으로 곁을 지키고 섰던 진가린이 조심스레 강한월을 불렀다.

그의 분위기가 하도 심상치 않아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단장.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정화 언니를 지켰어야 하는데….”

“아니다. 너희가 살아남아줘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꼭 살아남아라.”

진가린을 향해 한 말이었지만, 실은 스스로에게 한 다짐과 같았다.

지금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은 민정화이지만 아마도 다음 번엔 진가린의 차례일 것이다.

그렇게 자 혈승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여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막아야만 했다.

그것도 너무 늦지 않게.

강한월과 진가린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관만 바라보고 있을 때, 제갈윤이 조심스럽지만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단장.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급한 보고가 있어서요.”

무엇에 대한 보고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척혈단 본부를 떠난 자 혈승이 다른 곳도 공격할 수 있다고 보고, 각 문파들에 발 빠른 요원들을 보냈었던 것이다.

“어디가 당한 것이지?”

“무당입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혈승들을 치는 작전에 소요자가 참여했기에, 자 혈승은 무당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피해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점창파처럼 전멸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장문인과 장로들, 일대 제자 중 최고수들인 무당칠절, 그리고 검진을 이뤄 저항했던 무당칠십이검 등이 사망했습니다. 심지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뛰어든 어린 제자 몇도 가차 없이 베었다고 해요. 도합 백오십 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하네요.”

천 명 동시에 산화한 점창파에 비하면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만, 유구한 무당의 역사상 처음 있는 참사였고, 곽 공공의 공격을 받고 봉문했던 소림보다도 더 큰 피해.

본산에 남아있던 원로들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 소요자가 건재하니 언젠가는 힘을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최소한 앞으로 삼십 년은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아직 소요자 어르신께는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단장이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 어르신께는 제갈 네가 말씀드려라.”

“제가요? 이런 중요한 내용을 제가 어떻게….”

제갈윤은 펄쩍 뛰었지만, 강한월은 들은 척도 않고 몸을 돌렸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 * *

아미산의 외진 절벽.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상이 달빛을 받아 자애로운 미소를 뿌렸다.

절벽 아래 선 사내는 이미 한 시진째 불상을 감상하고 있었다.

불현듯 나타난 방해꾼이 아니었다면 밤새 이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이곳에 계시다니 의외군요. 마신이 되실 분이 갑자기 불가에 귀의하실 생각이라도 든 겁니까?”

강한월이 천마의 곁에 서서 함께 불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걸 보고 있으니 느껴지는 게 많아서 말이지. 마(魔)나 불(佛)이나 심지어 장학송의 선(仙)도 결국엔 매한가지가 아니냐는 말일세.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해야만 오를 수 있는 경지이니.”

“일부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네 말이 맞다. 마와 불은 엄연히 다르지. 천축에서는 마불(魔佛)이라는 이상한 것을 섬기기도 한다지만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지는 인간임을 포기해야만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장학송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지. 너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물론 강한월도 알았다.

장학송 문주는 영근(靈根)을 품고 태어난 천재인데다 운 좋게도 자신의 자질에 딱 맞는 동방선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신선이 되는 것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미 수십 년 전에 탈각의 기회를 얻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감정과 성품을 버리고 신선이 되는 것 따위, 장학송 본인이 원하지 않았으니까.

“장 문주께서 결심을 하신다면 더 이상 자 혈승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재앙을 마주하게 되겠지. 홍수와 지진을 일으켜 수천수만을 죽이고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 대자연과 같은 존재를.”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천마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마신강림이 완벽히 이루어져 천마가 인성을 모두 상실한다면, 그것 또한 감당하기 힘든 재앙일 테니까.

어쨌거나 당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천마는 인성을 유지하고 있고, 장학송 문주는 신선이 될 생각 따위 전혀 없어 보이니까.

지금 문제는 단 하나.

자 혈승뿐.

“그나저나 천마님. 어째서 자 혈승을 쫓지 않으셨던 겁니까? 저희를 구하러 청성 암자로 돌아오시는 것보다는 자 혈승을 쫓아가서 막으셨어야만….”

“이제 보니 그것을 따지려 나를 찾은 거구나? 민정화가 죽은 것이 그리 원통하더냐?”

천마는 놀리는 투로 천연덕스럽게 물었고, 이것은 억지로 슬픔을 억누르고 있던 강한월을 자극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무당이 멸문당할 뻔했습니다! 천마께서 이리도 경중을 따지지 못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쯧쯧.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냐? 나는 너를 구하러 가야 했고, 그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럴 필요 없었습니다. 저에게도 계획이 있었고 장학송 문주도 건재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랬지. 하지만 네가 죽을 가능성이 백 분의 일이라도 있다면, 나는 너를 구하는 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왜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 목숨이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강한월은 천마를 몰아붙였다.

천하의 천마에게 이리 대들다니,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불같이 화를 내야 마땅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천마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네 목숨이 더 소중하냐고? 그렇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천마님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겁니까?”

“아니. 왜냐하면 내가 자 혈승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천마의 단호한 대답에 강한월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자 혈승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건 전부터 예상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천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마가 자 혈승과 만나본 후 나온 결론이기 때문.

“비록 직접 겨뤄본 것은 아니고 잠시 잠깐 대치했을 뿐이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니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마신에게 완전히 몸을 내어주던가 혹은 장학송이 대자연으로 변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우리 둘 다 그럴 뜻이 없기 때문에 굳이 가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천마의 설명에 의하면 자 혈승은 무적(無敵)이었고, 천마신공은 물론 세상의 그 어떤 무공으로도 부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했다.

“나처럼 인간과 마신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와는 확실히 달랐다. 이상한 것은 그에게는 경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불도를 닦았다면 성불을, 선도의 길을 간다면 탈각을, 마도를 추구한다면 마신화의 경계에서 갈등하기 마련인데?”

“자 혈승은…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군요?”

“맞다. 애당초 그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을 거야. 그저 인간의 길을 걸으며 차근차근 경지를 높여온 것이겠지. 그래서 결국 그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너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짐작이 되느냐?”

강한월은 물론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유지하며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지까지 올라오면서 그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겐 허락된 수명이라는 게 있다. 아무리 정순한 내공을 익혀도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는 없어. 하지만 자 혈승은 그걸 해냈다. 아마도 피의 생명력을 연구한 덕이겠지. 또 하나,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연약하고 육체보다도 더 쉽게 지친다. 자 혈승이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 마음은 얼마나 지치고 상처받고 병들었을까?”

천마의 말에서 동정과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싸워야 할 적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강한월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천마님.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혹시…?”

“그래. 난 이 전쟁에서 빠질 것이다. 다른 혈승들은 모두 물리쳤고 자 혈승은 내가 이길 수 없으니 더 이상은 의미가 없어. 난 십만대산으로 돌아가 나의 길을 궁리할 것이다. 자 혈승과 같은 괴물이 되지 않을 길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애당초 계획이 모두 힘을 합쳐 자 혈승을 상대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 천마께서 빠지시면….”

강한월은 다급했다.

누가 뭐라 해도 천마는 척혈단 연맹의 최강 고수.

그가 빠진다면 자 혈승을 이길 가능성은 점점 더 요원해지는 것이니까.

“소용없다 해도 그러는구나. 그는 다수로 상대한다고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강한월 바로 너야. 그래서 너를 구하기 위해 혈승들의 암자로 돌아갔던 것이고.”

“천마님께도 한참 못 미치는 제가 어찌 자 혈승을 이긴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의 무공으로는 자 혈승을 누를 수 없어. 오직 심검만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이미 인간의 마음을 잠식당하고 있는 나나, 대자연과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음을 지키고 있는 장학송은 심검을 쓸 수 없다. 네가 해야만 한다.”

“결국… 심검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자 혈승의 유일한 약점은 마음이니, 네 마음의 검으로 그의 마음을 베어라.”

천마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아마도 이 길로 곧바로 십만대산으로 돌아가려는 것 같았고, 어쩌면 다시는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강한월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천마님! 가실 땐 가시더라도 한 가지는 알려주고 가십시오. 그때… 양 혈승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셨을 때… 무엇을 보신 겁니까?”

천마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모호한 답을 남기고 떠났다.

“어쩌면 너는 굳이 알 필요 없는… 혹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을 보았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 그곳에서 결말도 지어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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