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귀향 (1)
* * *
“허허, 천마가 그렇게 가버렸다고? 이거 한발 늦었구나. 내가 먼저 가려고 했는데.”
천마가 떠났다는 말을 들은 장학송 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농담으로 받았다.
어쩌면 너무나 큰 일이었기에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강한월은 장학송 문주의 이런 덤덤함이 고마웠다.
만약 그가 화를 내거나 격한 감정을 표출했더라면, 강한월도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자 혈승을 이길 방법은 심검뿐이라고 천마가 말했다고?”
“자세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그저 심검이 유일한 방법이고, 제가 그것을 해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렇군. 뭐 나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 천마가 이길 수 없는 적이라면 방법은 심검밖에 없겠지.”
“도대체 심검이 무엇이길래….”
강한월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몇 차례 심검 비슷한 것을 펼친 적이 있고 그것으로 초고수인 호랑이를 베기도 했지만, 천마와 장학송 문주가 왜 이렇게 심검 심검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물어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리고 천마나 내가 설명할 수 없기에 심검에 기대를 거는 것이야.”
“죄송합니다만, 너무 무책임한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뭐,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 어쨌든 사실이 그런 것일세. 천마쯤 되면 모든 힘의 작동 원리를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다네. 근육의 움직임에 의한 물리적인 힘은 물론,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에 의한 힘과 상단전의 작용에 의한 초상능력까지. 게다가 마신강림의 경지에 오른 후에는 다른 차원과 소통해서 얻는 힘까지 깨닫게 되었지. 마치 내가 대자연의 힘을 이해하는 것처럼.”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으니 천마나 장 문주님이 모든 종류의 무공을 이해하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래. 하지만 심검만은 도무지 어디서 기인하는 힘인지 모르겠다는 말이지.”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귀를 기울이던 강한월은 내심 실망스러웠다.
자기도 알고 있는 걸 장학송 문주가 모른다고?
“심검의 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천마께서도 그리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어째서 문주님은 모른다고 하시는지…?”
“마음의 힘이기에 모른다는 것일세. 자네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는데.
“신의 통찰력이 깃든 천마나 대자연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나도 사람 속은 모른다네. 득도한 고승이신 소림의 송목대사께 여쭤봐도 마찬가지일 거야.”
강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그렇기에 불교나 도교와 같은 깊이 있는 종교와 학문에서도 그저 칠정육욕을 버리라거나 자아를 잊으라는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멀리했지, 극복하거나 통제할 방법을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심검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심검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흠… 심검을 설명하기 어렵듯 그 또한 설명하기 어렵군. 간단히 말하자면 ‘감’인 건데….”
“그저… 감이라고요?”
황당해하는 강한월의 표정을 보니 장학송 문주는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것을.
“자네에게 심검을 권유한 최초의 사람이 아마도 소림의 송목대사이셨지? 성불을 목전에 둔 고승이시니 특별한 감이 있으셨을 거야. 이후 나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네. 마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천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장학송 문주는 그저 ‘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입신의 경지에 든 초인들에게 부여된 초상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심안(心眼), 영안(靈眼), 삼지안(三只眼), 마안(魔眼), 천안통(天眼通)이라 불리기도 하고, 흔히들 육감이라고 부르는.
일반인의 육감이야 믿을 것이 못 되지만… 득도한 소림의 고승, 우화등선을 거부하고 있는 동방선도의 계승자, 마신의 강림을 받은 교주의 육감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셋이 같은 예감을 얻었다면?
“어째서 저에게서 그런 감을 얻으셨는지, 혹시 짚이시는 점은 없으신지요?”
조금이라도 더 단서를 얻기 위해 강한월은 묻고 또 물었다.
천마가 떠났으니 남은 장학송 문주를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섣부른 예측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네. 특히나 지금처럼 엄중한 상황에서는.”
“엄중한 상황이니만큼 꼭 들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니 더더군다나 그렇고요.”
강한월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결심은 단호했다.
모든 것을 말하진 못하더라도, 일부는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겠다고 장학송 문주가 생각이 들 만큼.
“흠, 이야기를 해줄 테니 인상 좀 풀어라.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니 너무 진지하게 듣지도 말고. 사실 별것도 아닌 생각인데… 천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가 받은 느낌으로는 강한월 너와 자 혈승은 단단한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것이었어. 비단 세상 만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과한 인연의 매듭은 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
“자 혈승과의… 연을 끊어야 한다고요?”
“그래. 하지만 연이라는 것이 매우 질긴 것이라 좀처럼 끊기지가 않거든. 유일한 방법은 정(情)을 끊는 것인데… 정이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의 마음이지.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무공의 고수이고 수백 가지 무술을 익히고 있다고 한들 마음을 끊을 수 있을까?”
장학송 문주는 에둘러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강한월의 귀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들렸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니까.
다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을 뿐.
“그래서… 심검인 것이군요.”
“맞아. 그렇기에 결국 심검인 거지. 질긴 인연을 끊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벨 수 있는 무공. 마음의 힘에 기인한 심검 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제가… 제대로 된 심검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글쎄다. 그 물음을 던질 대상이 잘못된 것 같구나. 내가 아니라 네 마음에 물어야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강한월은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물러났다.
감사와 당부를 담은 그 인사가 너무도 정중해서, 이것이 마지막 작별 인사라는 것을 장학송 문주는 알 수 있었다.
* * *
대원들이 모였다.
민정화는 죽고 유선은 천마를 따라 떠난 후라, 남은 것은 문무대의 원래 대원들뿐이었다.
강한월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천마나 장학송 문주처럼 초상능력이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함께하며 쌓인 유대감은 그 나름의 육감을 발휘하게 해주니까.
“우두머리 혈승들이 죽었으니 전쟁은 끝난 거야. 그래서 천마께서도 십만대산으로 돌아가신 거고. 뱀이 삼황자에게 걸었던 비술도 풀렸을 거야. 황태자와 장준검 천호가 나서면 황실은 걱정할 필요 없을 테지. 그리고 호랑이를 따르던 무림맹 문파들은 소요자 어르신과 소림에서 애써주면 수습할 수 있을 거고. 문제는 흑사련인데….”
갑자기 전쟁의 수습 방안을 설명하는 강한월이 조금 뜬금없었지만, 제갈윤은 하고 싶은 말은 꾹 참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흑사련은 걱정 마세요. 워낙에 의리 없고 이기적인 자들이잖아요. 흑사련주인 용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벌써부터 삼삼오오 모여서 은근슬쩍 꽁무니를 빼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그럼 당분간은 걱정할 일이 없겠네. 원로들의 도움을 받아서 빨리 무림이 안정을 찾도록 각자 노력을….”
“하지만 자 혈승이 남았잖아?”
광군영이 대놓고 물었고, 주변의 싸늘한 눈총을 받아야 했다.
다들 그 이름은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강한월 앞에서는.
“그는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느낌으로는 자 혈승은 한동안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어차피 우리가 걱정한다고 어쩔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 아예 생각도 하지 말고 우리 할 일을 하는 게 좋아.”
강한월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러니까 더 걱정이 되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뻔하니까.
“단장… 아니 이제 그냥 대장이라고 부를게요.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자 혈승… 대장이 혼자 상대하려는 거죠? 그런 거죠?”
매우 화난 듯한 표정, 그리고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진가린이 물었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실은 강한월이 아니라고 말해도 어차피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원들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고, 그동안 직접 겪어서 아는 것도 많았다.
강한월이 천마와 장학송 문주를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대원들도 모여서 자 혈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주의협에 대한 것이었다.
민정화가 죽고 무당의 고수들이 괴멸되는 참사가 났는데, 신주의협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분명 신주의협이 자 혈승의 뒤를 쫓고 있다고 했는데, 왜 자 혈승만 나타나고 신주의협은 보이지 않은 걸까?
다들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실은 뻔한 이야기였다.
답은 둘 중 하나이니까.
신주의협이 자 혈승과 싸우다 죽었거나, 아니면 애당초 신주의협이 곧 자 혈승 본인이거나.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이던, 강한월에게는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왜 말이 없으세요? 설마 가린이 말이 맞는 거예요? 대장, 우리 문무대는 아직 건재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우리 임무는 회귀한 혈승들을 모두 체포하는 거라고요. 마음을 돌린 유선이나 하오문주님, 말 혈승은 예외로 하더라도 자 혈승을 잡는 임무에서 우리를 빼면 안 돼요!”
“맞아요, 대장. 우릴 무시하지 마세요. 저만 해도 아직 최상급 부적이 여러 장 남았고….”
소영영과 위청보까지 가세하여 강한월을 몰아붙였다.
다들 어금니를 꽉 물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데, 좀처럼 보기 힘든 간절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간절함이…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강한월이 모를 리 없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라. 난 그저… 잠시 쉬다가 오려는 거야.”
휴우, 기껏 한다는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말이었기에 강한월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딱히 다르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도 대원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과 동행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니까.
“돌아… 오실 거죠?”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받아들인 것인지, 진가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가기는 어디를 가겠니?”
강한월은 억지로 웃는 표정까지 지으며 대답했지만, 진가린을 안심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강한월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펑펑 울었다.
“정말이죠? 정말 돌아올 거죠? 다치지 말고… 아니 다치더라도 꼭 돌아와야 해요! 대장이 없으면… 안 된다고요.”
흐느끼는 그녀를 묵묵히 토닥였다.
아까는 말없이 그냥 떠날까도 고민했었지만,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가슴은 찢어지게 아팠지만, 또 그만큼 마음이 따뜻해졌으니까.
이 온기를 계속 느낄 수만 있다면….
심하게 마음이 흔들렸기에, 강한월은 억지로 진가린을 떼어내야 했다.
“돌아온다. 난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한월은 길을 떠났다.
조금 전 느꼈던 온기가 너무나 소중해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속으로 계속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