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귀향 (2)
* * *
속도를 높였으면 한 달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강한월은 서두르지 않았다.
좋은 풍경이 있으면 한참을 서서 감상했고, 버겁게 일하는 사람이 보이면 손을 거들기도 했다.
맛있는 음식도 찾아 먹고 달빛이 좋은 밤에는 홀로 술잔을 들면서, 그렇게 길을 갔다.
어쩌면 무감각하게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인지도 몰랐다.
어려서는 병을 앓느라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후에는 무공 수련에 몰두해야 했으며, 최근 몇 년은 천하를 종횡무진했지만 임무에 집착하느라 세상을 볼 여유는 없었으니까.
유람하듯 천천히 움직였지만 그래도 방향을 벗어나지 않고 갈 길을 갔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그가 자라난 곳.
금검문(金劍門)이었다.
인근 마을에 들른 강한월은 술을 샀다.
사마염 사백이 좋아했던 양하주(洋河酒), 자신이 즐겨 마시는 소흥주(紹興酒),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우량예(五粮液)까지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금검문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올랐다.
양지바른 곳에 문파 선조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자리를 잠시 살핀 그는 좋아 보이는 곳을 골라 땅을 파고 사마염의 유골 가루가 든 단지를 묻었다.
양하주는 이때를 위해 준비한 것.
사백의 묘에 정성스레 술을 따르고, 마지막 몇 모금은 자신이 마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참 좋네요.”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세상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황혼. 짙은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 가장 아름다운 잠깐의 순간.
자연스레 죽음과 그 이후의 안식을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었다.
강한월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아직 한창나이지만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도 고생스레 살았다는 자각.
사마염이 편히 쉬고 있을 묘지 옆에는 아직 넉넉한 빈 땅이 있었다.
강한월은 멍하니 묘지 터를 바라봤다.
낮에는 따뜻한 햇볕이 비출 것이고, 이후엔 아름다운 석양을 그리고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땅.
이런 곳에 몸을 누이고 편하게 쉴 수 있다면….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한목소리로 그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
왜인지는 모르겠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월 스스로도 그것은 자신의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사백님, 편히 쉬세요.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사마염의 묘를 향해 절을 올린 강한월은 터벅터벅 산을 내려왔다.
* * *
“아이고, 공자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금검문에 도착한 강한월을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장원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복이었다.
이어서 장원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어린 강한월을 업어 키워준 사람들,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때 같이 아파해준 사람들이었다.
왜 이리 연락이 없었냐는 타박을 들어야 했지만, 가족 같은 정이 느껴져 강한월은 잠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공자님. 문주님께 인사 먼저 올리셔야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강한월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난 금검문의 집사가 말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도 반가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를 것이었다.
방금 그 말에 강한월의 따뜻했던 마음이 서늘하게 식었다는 것을.
“그래야죠. 아, 안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집사마저 뒤로 물리고 강한월은 홀로 내원으로 향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원에 도착해 저만치에 사부가 있는 전각이 보이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힘이 났다.
“사부님. 제가 왔습니다.”
“한월이구나. 어서 들어오거라.”
사부 신주의협의 모습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엄격함과 인자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눈빛.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
사부가 감정을 숨기고 연기를 하는 것 같아 강한월은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이내 기분 상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사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일 테니까.
“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보니 기쁘구나.”
“사부님께서도 무탈하신 것 같아 저 역시 기쁩니다.”
진심과 가식이 절반씩 뒤섞인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사부와 제자는 대화를 시작했다.
강한월이 어떤 어려움을 헤치고 왔는지, 그사이 사부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서로 묻지 않았다.
혈승들과의 전쟁, 척혈단, 심지어 사마염의 죽음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신주의협은 무슨 의도가 있어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피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강한월이 말을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러한 이야기 중 단 한 가지라도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과 사부의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동안 많이 발전했구나. 몸가짐이 자연스러워졌고 사고의 폭도 넓어졌어.”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민감한 주제를 피하다 보니 할 말은 역시 무공밖에 없었다.
역시나 신주의협은 강한월의 상태를 대번에 파악했다.
몸가짐이나 사고의 폭을 논하는 것은 자연체와 초월경의 경지가 향상되었음을 달리 표현한 것.
강한월이 아직 부족하다 말한 것은 심검을 완성하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고.
“어떠냐, 오랜만에 비무나 한번 해볼까? 내 너를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지 한참 되었구나.”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부가 앞장서고 제자가 뒤를 따랐다.
금검문의 연무장은 이들의 비무를 감당하기엔 부족했기에, 인근 강가의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으로 향했다.
소슬한 바람이 갈대 사이로 불고 차가운 달빛이 쏟아지니, 사제 간의 비무보다는 철천지원수와의 생사결에 더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한월이 네 실력을 한번 보자꾸나. 그래, 무엇으로 겨뤄볼 테냐?”
“최근엔 적수공권을 많이 썼습니다.”
“적수공권?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우리 금검문의 검법이고, 또한 너의 건강을 위해 마공과 금강부동신공을 가르쳤건만… 너는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내게 돌아왔구나.”
“면목 없습니다. 제가 원하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군요.”
“허허허, 내가 널 부담스럽게 했구나. 개의치 말거라. 빈손으로 왔다는 말은 핀잔이 아니니까. 제법 근사한 비무가 될 것 같아 기뻐서 한 말이다. 자, 오거라!”
신주의협이 신호를 보냈음에도 강한월은 잠시 망설였다.
이것이 지도 대련이 될지, 아니면 죽고 죽이는 싸움이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고민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어떤 대결이 될지 결정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은 사부에게 있으니까.
강한월 본인은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할 뿐.
쌔애액.
주변의 갈대들이 순간 확 꺾이며 파공성이 일었다.
강한월은 한줄기 빛살로 변해 쇄도했다.
사부에게 다가간 순간 그의 양손과 두 다리에서 매서운 공격이 펼쳐졌다.
실력을 평가받는 비무였지만 공격은 허튼 것이 아니었고, 스치기만 해도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거대한 힘을 담고 있었다.
강한월이 처음부터 이렇게 주저 없이 거친 공격을 펼치는 이유는, 이런 것이 소용없을 것을 알기 때문.
역시나 신주의협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다.
주먹은 주먹으로, 장은 장으로…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같은 수법으로 대응했다.
“실력은 늘었지만 마음은 그대로구나. 살기를 담아도 모자랄 것을.”
신주의협이 매섭게 질책했다.
맞는 말이었다.
애당초 실력 차가 커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도 모자란 판에, 강한월이 비무도 아니고 뭣도 아닌 애매한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으니….
하지만… 살기를 담아 공격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강한월은 눈부시게 빠르고 강력한 공격을 연속으로 퍼부었고, 다른 무림 고수가 봤다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수법이었다.
그렇지만 신주의협은 일반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역시나 이 사부가 모범을 보여줘야 하겠구나.”
느긋하게 강한월의 공격을 받아넘기던 신주의협이 공세로 전환했다.
제자에게 새로운 경지를 눈뜨게 해주려는 듯,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법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이런 무공이 있었던가?
강한월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무공들.
신주의협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법칙에 통달한 건지, 매 한 수 한 수가 새로운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중력을 어지럽혀 강한월의 몸을 둥실 띄우더니 반대로 가중된 중력으로 땅바닥으로 내리꽂는가 하면, 갈대밭에 퍼진 수기(水氣)를 불러와 뾰족한 암기처럼 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월은 여전히 두 주먹이 다였다.
단정히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장포는 여기저기 찢겨서 걸레쪽같이 변했지만 그래도 주먹을 굳건히 쥐고 경천동지할 공격들을 하나하나 막았다.
부지런히 주먹을 놀려 자신의 신묘막측한 비술들을 하나하나 무(無)로 돌리는 제자를 보며 신주의협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인정하지.
의지와 뚝심은 역시 내 유일한 제자라 할 만하구나.
하지만 살기를 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마!
독심을 품은 신주의협의 기세가 돌변했다.
지금껏 묘기를 펼쳤던 법칙의 영역들이 스르르 사라지고, 대신에 허무와 독악함의 이중성을 지닌 거대한 공력이 신주의협의 몸 안에서 요동쳤다.
“흥,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냐? 한 줌 재로 변한 사마염이나 목이 잘린 민정화가 원통하지도 않은 거냐?”
강한월을 자극할 말을 내뱉는 신주의협의 눈에서 냉혹한 기운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느새 신주의협의 손에는 시뻘건 꼬챙이 하나가 들려졌다.
원래부터 손에 쥐어져 있었다는 듯 나타난 꼬챙이는 본신 내공이 강기화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실제화한 기물.
이제부터는 힘을 숨기지 않고 상대하겠다는 듯 신주의협의 몸이 그림자도 남기지 않은 채 주욱 앞으로 뻗어왔다.
쾌속을 뛰어넘는 초속의 움직임.
초월경을 이룬 강한월의 눈으로도 그 속도를 쫓을 수 없었고, 신주의협의 쇠꼬챙이는 환상처럼 갑자기 나타나 강한월의 머리를 찔러왔다.
머리가 뚫리는 찰나의 순간, 역시나 환상처럼 강한월의 모습이 푹 꺼지듯 사라지고 한 장 떨어진 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인 것을 보니, 강한월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회피 동작을 할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것 같았다.
“역시 너는 가르치는 재미가 있구나. 이렇게 몰아붙여야만 숨어있는 실력이 튀어나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아랫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차린 강한월이 이번에는 신주의협보다 먼저 움직였다.
파팟. 눈앞에서 사라진 그의 신영이 사부의 등 뒤에서 나타나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속도로는 신주의협을 잡을 수 없을 듯했다.
이미 쾌속을 넘는 움직임을 보이며 강한월의 옆으로 돌아선 신주의협이 꼬챙이로 주먹을 쳐냄과 동시에 암울한 붉은빛으로 물든 왼손을 뻗어왔다.
“역시… 사부께서는 혈교의 장법을 익히고 계셨군요?”
짐작하고 있던 일이지만, 실제 눈으로 보니 가슴이 쓰라리었다.
강한월은 왼손에 장학송 문주의 선기와 같은 별빛을 두르고 그대로 신주의협의 장력을 마주쳐갔다.
챠악.
천하제일 고수와 장력을 교환했음에도 무시무시한 폭음은 터지지 않았다.
아마도 신주의협이 힘을 맞춰준 듯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가 들린 게 다였고, 서로 한 발씩 물러서더니 곧이어 신주의협의 다음 공격이 휘몰아쳤다.
혈교 무사들이 펼치던 밀종대혈수인부터 천축유가술의 절초들… 가지각색의 혈교 무공들이 신주의협의 손과 발에서 뿜어져 나왔다.
강한월로서는 익숙한 무공이고 파훼법까지 알고 있었지만, 같은 무공이라도 펼치는 사람에 따라 위력은 천양지차.
조금의 실수라도 있을 경우 곧바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할 만큼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공세였다.
그리고 공격의 파괴력보다 더 강한월을 괴롭히는 것은… 신주의협이 갑자기 이 무공들을 꺼내든 이유.
신주의협은 지금 강한월에게 강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 사부가 적이자 원수임을 인정하라고.
그를 통해 최대한의 살기를 마음에 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