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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05화 (182/210)

205화. 귀향 (3)

* * *

‘정을 떼려는 것이구나.’

강한월은 어렵지 않게 사부의 의도를 짐작했다.

일부러 가슴을 후벼 파는 모진 말을 하고 불필요한 혈교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화를 돋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이유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살기 어린 무공을 쓰게 하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사제지간의 정을 끊으려는 것일 터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강한월은 목놓아 외쳐 물었다.

자신에겐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 죽을병을 치료해 새 생명을 준 사람,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은인.

그런 사람이 정을 떼고 남남이 되자고 모질게 압박하고 있으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으라 하셨다면 주저없이 드렸을 것입니다!”

가슴 속 깊은 곳이 찢어질 듯 아파 오며 격한 감정이 솟구쳤다.

눈은 붉게 충혈되고, 꼭 쥔 주먹에서는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혈승들을 상대할 때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강한월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살기를 품길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듯, 온몸으로 감정을 표출하며 강한월이 쇄도했다.

퍼엉!

독기가 철철 흐르는 주먹으로 신주의협의 얼굴을 강타했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겠지만 사부는 고스란히 주먹을 받았다.

“이런… 확실히 아프구나. 그래,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신주의협이 말했다.

매운 주먹 한 대 맞은 것으로 제자와의 인연이 모두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더 이상 수준을 맞춰 놀아주지는 않겠다는 듯, 돌변한 기세로 강한월을 공격했다.

사제지간이라는 인식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반대로 원초적인 본능이 솟구쳤다.

천마의 마기보다 짙은 무언가가 안개처럼 주변을 자욱이 적시며 무공도 그 무엇도 아닌 근원적인 폭력의 힘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감정이 격해진 강한월은 두려워 않고 마주 주먹을 날렸으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열댓 걸음이나 주욱 밀려난 강한월이 격하게 피를 토한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을 힘의 차이가 이제서야 드러난 것.

아니, 어쩌면 이것 또한 신주의협이 봐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많이… 아프군요.”

강한월이 허리를 펴며 힘겹게 말했다.

얻어맞은 곳이 아프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싸움을 포기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두 주먹을 움켜쥔 강한월이 정면으로 쇄도했다.

휘이익, 퍼엉.

샤아악, 타악.

주먹을 휘두르는 소리는 강한월에게서 난 것이나, 두들겨 맞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신주의협은 더 이상 제자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악에 받친 강한월이 고통을 참으며 미친 듯이 공격을 가했지만, 사부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손에서 강기를 뿜어내며 금검문의 검식도 써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마불진경의 무공들도 마구 쏟아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무복은 걸레처럼 찢어져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경기를 못 이기고 머리카락도 태반이 잘려 나갔다.

차라리 초월경에 자연체를 이룬 것이 아니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일찌감치 쓰러져 더 이상의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감정이 극도로 고조된 강한월은 고통을 이용해 정신을 유지했고, 대해처럼 흐르는 역근경의 내력은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몸뚱이를 계속 지탱해줬다.

“으아아아악!”

온몸이 피로 물든 혈인의 모습을 한 채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강한월은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싸움은 별 의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신주의협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에 쥔 꼬챙이에 힘을 더했다.

타악.

꼬챙이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강한월의 오른팔에 이어서 왼팔이 차례차례 마비되었다.

그럼에도 멈출 생각이 없던 강한월은 평소 쓰지 않던 각법과 퇴법까지 써가며 신주의협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팔이 마비되었는데 다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꼬챙이는 다시 흐느적거렸고, 이어서 양다리마저 마비된 강한월이 바닥을 굴렀다.

“이… 이익….”

강한월은 이를 악물고 몸을 꿈틀거렸다.

마치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조금씩 신주의협을 향해 기었는데,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처절한 광경.

신주의협은 그 모습을 찬찬히 바라봤다.

강한월이 흘리는 신음과 거친 숨소리를 귀담아들었고, 돌에 긁혀서 흘리는 피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꿈틀거리는 강한월과 지켜보는 신주의협.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신주의협의 손에서 꼬챙이가 스르르 사라졌다.

“휴우. 이 방법은 그다지 효과가 없구나. 이제 그만 일어나라.”

나직이 한숨을 내쉰 신주의협이 터벅터벅 걸어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언제 손을 쓴 것인지, 그 순간 강한월의 마비도 풀려 있었다.

천천히 일어선 강한월이 다가오려 하자 신주의협이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잠깐. 아까 보니 술병이 두 개이더군. 나도 한 병 마실 수 있을까?”

가만히 서서 사부를 노려보던 강한월이 이내 갈대 사이에 던져두었던 술병을 들고 왔다.

“어차피 드리려고 산 것이니… 드십시오.”

“우량액이구나. 좋은 술이지.”

술병을 받아 든 신주의협은 언제 치고받고 싸웠냐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강한월은 그런 사부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웬일인지 가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따라 이상하십니다. 확실히… 제가 알던 사부님이 아니신 것 같군요.”

강한월은 사부의 옆에 걸터앉으며 소홍주의 마개를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네 사부가 맞다. 네가 내 제자 강한월이 맞는 것처럼.”

사부와 제자는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강한월에게 술을 가르친 것이 신주의협이었고 둘 다 술을 좋아했기에 함께 술을 마신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어색하고 적막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신주의협이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너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겠지. 어떤 것은 이해가 될 테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할 거야. 게다가 네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들도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맞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제대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사부님뿐이지요.”

사부와 제자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같은 곳, 밤하늘에 뜬 달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것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매우 불편한,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대화라는 것을.

“그래, 나는 설명할 수 있다. 납득시킬 자신은 없지만 최소한 사실이 무엇인지는 알려줄 수 있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너 한월이에게 만큼은.”

강한월은 묵묵히 사부의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지 아니면 설명할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인지, 신주의협은 천천히 몇 모금 술을 더 마신 후에야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 너를 강하게 몰아붙인 것은 네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래서였다.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끔. 알아야 할 것만 알고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르는 상태로 나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해 살기가 일어나도록.”

“그런 의도이셨다면 성공하신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네가 흥분한 상태에서 일으킨 기운은 살기가 아니었다. 그건 뭐랄까… 배신감, 분노, 그리고 깊은 슬픔이었지.”

사부가 자신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는 걸까?

강한월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지금껏 달만 바라보고 있던 신주의협이 처음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터, 모든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전에,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듣고 싶구나.”

“제가 생각하는 것은 실은 간단합니다. 사부님은… 미래에서 회귀한 혈승들의 우두머리, 자 혈승이라는 것이죠.”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고 죽어도 입 밖으로 꺼내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언제부터 그런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거냐?”

“실은 회귀자에 대해 알게 된 첫 순간부터였습니다. 혈승들은 이 시대의 강자들을 목표로 회귀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자인 사부님을 노리지 않았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갈등이 심했겠군.”

“그렇습니다. 의심은 되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회귀자의 영에 뒤집어 쓰였다고 해도 지난 이십 년간 저를 키워주시고 병을 치료해주신 분은 지금 제 눈앞에 계신 사부님이니까요.”

신주의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을 뿐.

“그런 의심이 들었기에 저는 더 열심히 혈승들을 잡는 임무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천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내면 사부님의 잘못이 덮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랬군.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그때는 괜찮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부님은 천하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으셨으니까요. 혹시라도 사부님이 회귀자라 할지라도, 비밀을 유지한 채 조용히 지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혈승이기를 포기하고 회심한 유선의 경우처럼?”

“그보다는 하오문주의 경우가 더 적당한 예이겠죠. 딸 민정화 소저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본인이 혈승이라는 것은 잊고 살았으니까요. 저는 사부님도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살아주시기를 바랐던 겁니다. 제가… 어리석었죠.”

“소 혈승, 하오문주의 자식 사랑은 인정할 만하지. 그래서 그자의 배신을 징치하지 않은 것이고.”

신주의협은 술 한 모금을 넘긴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강한월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징치하지 않으셨다고요? 민정화 소저를 죽이셨지 않습니까!”

“그건… 다른 문제다. 하오문주에 대한 벌이 아니야.”

“어쨌든 그녀를 죽이시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요!”

“왜? 그녀와 미래를 약속하기라도 한 것이냐?”

신주의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강한월을 응시했다.

남녀 간의 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 예상했었지만, 지금 강한월의 반응은 그보다 더 격했으니까.

“그녀의 사례는… 제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말입니다.”

강한월의 사부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천마가 양 혈승의 머릿속을 읽은 후였다.

그 속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아무 말도 안 해주는 천마를 보며 그는 직감했다.

사부가 정말로 자 혈승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강한월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민정화와 하오문주의 사례가 있으니까 말이다.

하오문주는 회귀하는 순간 민정화의 생부의 영을 쫓아내고 몸을 차지했지만, 그 후 진심으로 딸을 사랑하고 키워서 결국 민정화의 인정을 받았다.

자신과 사부의 관계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어쨌건 사부는 그 시점까지는 강호에 해악을 끼친 바가 없었으니 단지 회귀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적이 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 당신이 척혈단을 찾아와 살인을 저지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당신의 손에 민정화 소저의 목이 잘리고 심장이 부서진 그 순간… 제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강한월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회귀자라는 사실은 덮어두고 사부와 함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유선과 하오면 주의 사례를 보며 조금씩 키워왔던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순간, 강한월은 비통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과 나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강한월은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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