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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06화 (183/210)

206화. 신주의협의 이야기 (1)

* * *

“그것이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구나.”

피눈물을 쏟으며 절규하는 강한월을 향해 신주의협이 나직이 말했다.

악인의 본색을 드러내 마주 화를 내는 것도, 그렇다고 따뜻한 말로 제자를 위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표정하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런 무심한 사부의 대응이 제자를 진정시켰다.

“그럼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거라.”

고검(高劍), 즉 훗날 신주의협이라 불리게 되는 아이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금검문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문파의 제자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고아가 되어 동냥질을 하고 다니는 것이 불쌍해 보여 금검문의 집사가 거둔 것인데, 나중에 잔심부름이나 시킬 요량이었다.

하지만 천고의 기재는 거름 밭을 뒹굴어도 향기가 나는 법, 금세 문주의 눈에 띄었고 금검문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

제대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이후 고검의 성장은 눈부셨다.

오죽했으면 문주가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했을까.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사부의 가르침을 모두 습득했고, 이때부터 문주는 그동안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금검문의 고대 비전을 모두 끄집어내 고검 혼자 수련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열여섯이 되었을 때, 고검은 사형인 사마염과 함께 강호에 나왔다.

알려지지 않은 작은 문파인 금검문 출신이라 처음엔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두 사형제가 두각을 나타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악의 무리를 처단해 서서히 이름을 알리더니, 무림맹 추포대에서도 삼 년을 어쩌지 못한 희대의 음적을 생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검이 후기지수 중 독보적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

무림맹에서 개최한 천하제일 비무대회에 출전하였는데, 후기지수들이 출전하는 신진부가 아닌 일반부에 출전해 파죽의 십 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게다가 결승에서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무림맹 청룡대주를 가볍게 제압하여, 대회에 참관했던 무림 명숙들이 기함을 토하게 했다.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무림맹에 들어가고 되었고, 이후 그가 실전부대에서 활약한 십 년 동안 정파 무림맹은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호시탐탐 중원 진출을 노리던 새외의 세력들이 차례차례 꺾이거나 자진 해산했고, 사파의 거두들도 감히 허튼짓을 하지 못하고 산속으로 숨었다.

고검이 신주의협의 이름을 얻은 것은 서른 살이 되던 해.

당시 천축에서는 바라문교의 이단인 혈천교가 불같이 일어나 천축 무림을 일통하더니 서장으로 진격했다.

서장은 포달랍궁의 지휘하에 일전을 벌였는데, 혈천교의 무서운 기세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혈천교의 무사들이 듣도 보도 못한 불가사의한 무공을 쓰는 데다, 특히나 스스로를 대범천이라 부르는 교주가 단 십여 초 만에 서장 포달랍궁의 대활불을 꺾으며 자신이 천하제일고수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서장을 장악한 혈천교가 중원을 향해 머리를 돌리자, 중원 천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혈천교가 천마신교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러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혈천교는 중원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고향 천축으로 돌아가야 했다.

서장에서 중원으로 넘어오는 청해성 입구를 단 일백 명의 무림맹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일백 명 중 실제로 혈천교와 대결을 펼친 것은 단 한 명. 당시 무림맹 사신단의 단주였던 고검이었다.

단신으로 혈천교의 수뇌부를 찾아간 고검은 혈천교의 십이사신을 격파하고, 이어서 천하제일고수라는 교주 대범천의 목을 벤 것이다.

혈천교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하지만 중원 천하로서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완벽한 대승리.

사람들은 주저 없이 고검을 천하제일고수로 공인했고, 중원 최고의 대협이라는 뜻으로 신주의협이라는 호칭을 선사했다.

그리고 이것이 고검이 무림맹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젊은 그가 맹주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게 되자 시기 어린 시선도 늘어났고, 그런 불편한 자리를 감수할 이유나 욕심도 없었으니까.

조직을 벗어나 홀가분해진 고검은 협객 본연의 자세로 세상을 떠돌며 조용히 의와 협을 행했다.

명성을 탐하지 않고 은밀히 행동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신주의협의 명성은 이제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중원 천지를 울렸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천하를 주유하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어릴 적 그가 금검문 집사의 눈에 든 것처럼, 그 또한 한 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치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당기듯, 운명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고아 소년.

바로 강한월을.

“나는 너를 데리고 금검문으로 돌아갔다. 과거 내 사부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나 또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너를 가르치는 것에 집중했지.”

아주 어릴 적의 이야기지만, 강한월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사부 신주의협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자신을 돌봤는지.

설사 친부모라 하더라도 그 정도로 애정을 쏟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혈승들이 회귀한 연도를 생각하면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텐데… 당시 자신을 돌본 사부는 신주의협 고검 본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자 혈승에게 덮어 씌워진 다음이었을까?

아쉽게도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천하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외면하고 어린아이를 돌보게 되신 것이 답답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악인들을 처단하고 양민들을 돕는 것도 물론 보람찬 일이었지만, 너를 기르고 가르치는 것만큼의 기쁨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런 행복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강한월이 나이를 먹을수록, 타고난 병 즉 피가 생명력을 영글지 못하는 문제가 점점 더 심해진 것이다.

물론 강한월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에게 병이 있음을 신주의협은 눈치챘다.

그럼에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자신의 인체에 대한 지식과 고강한 내력을 활용하면 못 고칠 병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갈수록 강한월은 약해졌다.

신주의협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추궁과혈을 하며 내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온갖 귀한 영약을 구해다 먹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명한 의원들을 청해 함께 연구하며 병의 원인을 해결할 심법을 수십 개나 창안해 시도해 보았지만… 제자는 점점 더 병색이 짙어졌고, 고통이 전염이라도 된 듯 사부도 야위어 갔다.

“무력감을 느꼈지. 사람들은 내가 천하제일이라고 추켜세웠지만 실은 사랑하는 제자의 병 하나 치료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였던 것이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기에 나는 무림맹으로 달려갔다.”

무림맹 정문을 박차고 들어간 신주의협은 맹주를 만났고, 자신에게 맹주 자리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겠지만, 신주의협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데다가 마침 맹주는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영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뜻밖의 행동에 대한 놀람이 가시자, 신주의협을 차기 맹주로 추대하는 절차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자리를 노리고 있던 몇몇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살아있는 전설이 무림의 안위를 책임지겠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신주의협이 맹주가 된 이유는 분명했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안 되니 전 무림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제자를 살리려고 했던 것.

소림, 무당, 화산의 오랜 숙원을 해결해주고 대환단과 태청신단, 자소단을 얻었고, 맹주만 출입이 가능한 무림 비고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무공과 학문을 미친 듯이 연구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설적인 영약의 힘으로 네 수명을 억지로 연장시켰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치 못했고, 그런 상태로 네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비록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사부의 고통과 안타까움이 느껴져 강한월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 이상으로 정신도 혼란스러웠는데, 사부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강한월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과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부가 맹주 자리에 오른 후 소림에서 대환단을 얻어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얻은 것은 대환단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금강부동신공이었고, 이후 사부가 몰래 전해준 마공과 함께 익히며 결국에는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강한월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금강부동신공과 마공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기다리면서.

설마 그 중요한 것을 잊으셨을 리는 없으니까.

“그즈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의 무공과 의술로는 너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영약으로 네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중원 밖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은 북해 빙궁을 찾아갔지. 하지만 그들의 극음의 무공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는 남만의 오독교, 대막의 태양궁, 고려의 선인들까지 만났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이제 남은 곳도 얼마 없었다. 그중 강력하고 깊이 있는 학식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천마신교 뿐.”

하지만 천마신교는 북해 빙궁처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근래 큰 전쟁이나 마찰은 없었지만 누가 뭐래도 중원 무림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그들이니까.

우선은 무림맹 내부의 반대가 심했다.

신주의협의 말이라면 무조건 충성하던 수하들도 천마신교행만큼은 극구 말렸고, 구파일방 출신의 장로들은 맹주의 정신상태를 감정해봐야 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어쩌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신주의협의 마음속에 정파 무림에 대한 반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

“무림맹 내부의 반대만이 문제는 아니었어. 천마신교에서도 정파 무림맹주의 방문을 허용할 리가 없었지. 그렇다고 다짜고짜 쳐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 어쨌든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지. 나는 그 즉시 맹주 직을 사임했다.”

어차피 제자를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맹주 자리에 올랐던 것, 그 자리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강한월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도 달랐으니까.

물론 신주의협이 맹주를 그만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더 훗날의 이야기.

강한월에게 문무대를 만들어준 이후여야만 했다.

“사부님께서… 그때… 맹주 직을 사임하셨다고요?”

“그래. 네가 알고 있는 사실과 조금 다를 테지. 하지만 의문을 품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았으니.”

맹주 자리를 걷어찬 신주의협은 곧바로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속도가 느려질 것을 감수하고 강한월을 데리고 갔는데, 그즈음의 상태가 도저히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

끊임없이 내공을 불어넣어 생명을 연장시키며 달려갔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십만대산.

하지만 광명정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파 제일 고수가 찾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마인들이 쉴 새 없이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도움을 청해야 할 입장이라 이기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뜻밖의 도움을 받았다.

승부욕에 눈이 멀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마인들을 단숨에 물러가게 만들어 준 인물.

천마신교 내에 그 정도 권위를 가진 사람은 단 두 명이었는데, 이번에 나서준 사람은 천마는 아니었다.

신주의협과 강한월을 광명정 안으로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

바로 천마신교 신녀궁의 당대 신녀, 옥수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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