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신주의협의 이야기 (2)
* * *
마침 천마가 폐관수련 중인 것이 신주의협에겐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마는 분명 대결을 청했을 것이고 일부러 져주지 않는 이상 신주의협이 이겼을 테니까.
마의 종주의 자존심이 구겨진 이상 진지한 대화나 도움 요청 등은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천마는 폐관 중이었고, 신주의협과 강한월을 안으로 들여 차를 권하는 신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녀와의 만남은 신주의협을 기대에 부풀게 만들었다.
그녀의 마공에 대한 지식은 놀라웠고, 또한 각종 신비한 비술에 대한 이해도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 강한월을 가엽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도우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치료 방법을 연구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신주의협은 기대가 컸던 만큼 거대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방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영적인 능력까지 동원하여 강한월을 살핀 신녀는, 대승불교의 정종 심법과 그에 반하는 마공을 동시에 익히면 자석의 양극처럼 밀고 당기는 힘이 작동하면서 피가 생명력을 영글 수 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설명을 하는 동안 신녀의 표정은 슬퍼 보였고, 신주의협의 관자놀이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둘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승 계열의 내공이야 소림을 닦달하여 얻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강한월의 몸 상태로는 절대로 마공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으로는 역혈과 기의 역순환을 기본으로 하는 마공을 견뎌낼 리 만무했다.
휴우, 만약 혈천교의 대범천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어진 신녀의 한탄은 다시 한번 신주의협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바라문의 고대 비술, 그중에서도 특히 피의 비술에 능한 대범천이라면 강한월의 혈액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았을 거라는 말인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넋두리였다.
혈천교의 대범천은 이미 죽었으니까.
다름 아닌 바로 신주의협 본인의 손에.
좌절한 신주의협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고강한 그의 공력을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마음의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몸이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식음을 전폐한 신주의협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 때문이다.
나 때문에 강한월이 죽는다.
무림맹주 따위 하지 말고 빨리 천마신교를 찾아왔었더라면….
중원침공을 하든 말든, 혈천교의 대범천을 살려 뒀더라면….
지독한 고열과 탈진 상태로 쓰러졌던 신주의협은 며칠 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었다.
천축 어딘가에 혈천교의 잔당들이 남아있을 테니 그들을 찾아 바라문의 고대 비술을 얻어내야 했다.
신녀는 만류했지만, 신주의협은 강한월을 둘러업고 즉시 천마신교를 떠났다.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 계속 서남쪽으로 향했다.
제대로 먹지도 않으면서 쉬지 않고 달린 탓에 몸은 바짝 말라 뼈만 남았지만, 그래도 강한월에게 공력 불어넣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천축에 도착했다.
하지만 천축은 중원만큼 넓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통역을 구해 천축 땅을 헤매기를 반년.
이제 겨우 혈천교 잔당들의 꼬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던 그때.
“혈천교 잔당으로 의심되는 사교 무리의 소문을 들었지. 그리 멀지 않은 곳. 빠른 걸음으로 달리면 사나흘이면 닿을 곳이었어. 하지만 나는 달려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월이 네가 죽었으니까.”
그때… 내가 죽었다고?
이야기가 듣는 동안 이미 짐작은 했지만, 사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충격이 컸다.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던 강한월은 술 한 모금을 넘긴 후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사부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이제야 뒤죽박죽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려갔다.
자신이 살아온 이 세상은 원래의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회귀자에 의해 변질되고 뒤바뀐 세상.
그것을 지키려고 자신은 그토록 아등바등 싸워왔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다. 그 뒤로 몇 년은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심하게 낙심했고, 제대로 미쳤었거든. 내 마음은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였지.”
천축의 관례에 맞춰 강한월을 화장하고 그 재는 현지인들이 갠지스라 부르는 황하에 뿌렸다.
신주의협은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강 주변을 떠돌며 몇 년을 살았다.
간혹 중원에서 온 상인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완전 거지 차림에 미쳐 있는 그가 천하제일의 고수이자 대협인 신주의협일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자연스레 천축의 말을 익히게 되었고, 또 갠지스를 찾는 고대 종교의 술법사들이 설파하는 내용도 자주 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기라고는 전혀 없던 신주의협의 눈에 묘한 열망이 어렸다.
바라문교의 한 성직자가 베다를 강론할 때였는데, 신주의협의 귓속을 파고들어 온몸을 전율로 들끓게 한 단어가 있었다.
부활.
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강렬한 울림으로 뇌리에 남았다.
신주의협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갠지스강으로 뛰어들어 몸을 씻었다.
그리고는 예전에 알아 두었던 혈천교 잔당들의 소굴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혈천교의 잔당들은 지난 십수 년간 비밀리에 힘을 키우고 있었다.
신주의협의 손에 죽은 대범천을 대신해 교주에 오른 자는 매우 조심성이 많은 자여서, 과거 혈천교보다 더 강한 힘을 축적하기 전에는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경을 곤두세워 주시하고 있던 것은 신주의협에 관한 정보였다. 그가 중원을 지키고 있다면 감히 다시 그곳을 넘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와 같이 조심성 많던 교주는 최근에 들어서야 다시 천하를 정복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축적한 힘은 이미 충분했고, 신주의협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랬었는데…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어느 달 밝은 밤, 난데없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새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경비망이 갖춰진 혈천교의 비밀 교단으로 웬 거지꼴의 괴인이 제집 드나들 듯 거침없이 난입했다.
수백 명의 경비무사들이 앞을 막았지만 무슨 요술이라도 쓴 건지 순식간에 모두 바닥을 뒹굴었고, 이어서 출동한 정예 호교 승려들도 마찬가지 꼴을 당했다.
결국 교주의 침소 앞에서 대치하게 된 혈천교 최고수들과 괴인.
교주를 호위하고 선 십이사신들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괴인을 바라봤다.
과거 천축과 서장을 일통했던 구 십이사신보다 자신들이 더 강하다고 믿었으니, 눈앞의 거지 같은 괴인쯤이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모두가 어디 한군데씩 부러져 바닥에 널브러지는 데는 채 반 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혈천교에 부활의 비술이 있는가?』
오체투지의 자세로 엎드린 교주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린 신주의협은 그렇게 물었다.
교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런 비술은 없다고 대답하면 그대로 머리가 밟혀 죽을 것만 같았다.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비술이 있다면, 저희가 반드시 찾아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교주는 적당한 답을 찾아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날로 혈천교 전원은 광인으로 변한 신주의협의 수하가 되었다.
“저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마도 그런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당시의 나는 반쯤 미쳐 있었고 너에게 가혹한 운명을 가한 하늘을 원망했었다.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순리에 반할 수 있는 비술이라면, 그것이 부활의 비술이던 뭐 던 내 손에 넣고 싶었지.”
“회귀의 비술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당시에는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중에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된 것이지.”
그랬다. 당시의 신주의협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금지된 천축의 고대 비술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어쨌든 그때부터 신주의협의 고대비술 연구가 시작되었다.
혈천교는 바라문의 비술을 소유하고 있었고, 과거 서장을 침공했을 시 빼앗아온 밀교의 비전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자라다 느꼈는지, 혈천교의 정예들을 저 멀리 파사국과 남월까지 파견해 닥치는 대로 비술을 수집했다.
만약 신주의협이 비술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심적 충격에 의한 광증은 얼마 못 가 저절로 치료되었을 터였다.
그의 금검문 내공은 강하고 순수했고 심신을 보하는 기능이 탁월했으니, 중단전과 상단전에 쌓인 탁기쯤이야 얼마든지 정화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주의협은 무서운 속도로 고대 비술을 연마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혼탁한 기운을 생성해 심령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나는 광인에서 괴물로 변해갔다. 신주의협이란 허명을 만들어줬던 협의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요망하고 음습한 비술의 힘만 추구하게 되었지. 천축에서 생활한 지 백 년쯤 되었을 때는 완전한 악신이 되어 있었다. 천축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나를 숭배하는 신전까지 여럿 만들었는데, 몰래 가서 보니 내 신상은 완전한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더군.”
고대의 비술이란 것이 대부분 그랬다.
추구하는 힘은 정도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수련하는 방법은 잔인했다.
그러한 사악한 힘의 노예가 된 신주의협은 비술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혈천교가 수집한 비술 중에서는 자기 수행을 통해 신격을 향해 나아가는 정명한 것들도 있었지만, 신주의협은 그런 정통한 것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강한월의 죽음과 그에 따른 자책감 때문에 하늘의 순리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하고 싶은 본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온 세상의 비술을 뒤졌지만 정작 부활에 관한 답은 얻지 못했다. 먼 훗날 윤회한다던가 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둥 다 부질없는 것들뿐이었지. 그럼에도 난 비술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점점 강해지는 힘. 늙지 않는 육체. 내가 진정 신과 대항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천축의 백성들 사이에서 신으로 살아가던 신주의협이 다시금 강한월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였다.
우연히 들어간 부남 지역의 고대유적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신비한 돌과 그 돌의 효용에 대해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시간의 돌을 발견하신 거군요.”
“맞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던 너를 다시 살리겠다는 꿈. 그 꿈을 이루어 줄 보물. 바로 시간의 돌이었지.”
너무 긴 세월을 살아 모든 것에 무감각해져 있던 신주의협이 실로 오랜만에 열정을 토했다.
혈천교의 모든 인원이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던 시간의 돌을 찾는데 동원되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황금과 바꿨고,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던 세력은 전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십 년의 시간을 투자해 시간의 돌 여덟 개를 모았다.
남은 네 개가 어디에 있는지도 이미 밝혀냈다.
다만 그 위치가 중원이라 맨 나중으로 미루고 있던 것.
왜냐하면 중원의 것은 신주의협 본인이 직접 찾으러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천축 전역을 놀라게 한 소문이 돌았다.
이백 년 가까이 천축을 공포에 떨게 했던 혈천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몇 달의 시간이 흐르니 그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혹자는 부처님의 노여움을 산 혈천교가 사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고 했고, 또 다른 자들은 마침내 혈천교의 대범천이 교도들을 이끌고 승천했다고 했다.
하지만 진실은 소문보다 단순했으니, 혈천교는 말 그대로 해산했을 뿐이었다.
신주의협이 홀로 중원으로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