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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추적-208화 (185/210)

208화. 신주의협의 이야기 (3)

* * *

“이후의 이야기는 너도 잘 알겠지? 척혈단 단주 장무영의 기억이 너에게 공유되었으니.”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주의협에게도 힘든 일인 것 같았다.

몸이 힘들 리는 없지만, 무려 이백 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인간의 경주를 벗어난 초인에게도 만만치 않은 심력 소모인 모양.

하지만 강한월은 좀 더 들어야 했다.

척혈단 장무영의 기억이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사부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시간의 돌을 가져오는 것은 혼자서도 충분하셨을 텐데, 어째서 혈승들을 제자로 맞으셨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들을 데리고 회귀하셨는지….”

“그래, 그런 것이 궁금할 수도 있겠구나.”

신주의협은 이제 거의 비어가는 술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다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주의협은 천축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홀로 중원으로 돌아왔다.

산천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가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원래 계획은 재빨리 시간의 돌을 확보하여 과거로 회귀를 하는 것이었지만, 익숙한 땅에 잠시 머물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우선 든 생각은 강한월과의 추억이 떠오른 탓에 제자들을 몇 키워볼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 시간의 돌은 열두 명까지 동시에 회귀시킬 수 있으니, 과거로 데리고 가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니 또 다른 계획이 떠올랐는데, 새로운 제자들을 활용해 정파 무림에 따끔한 가르침을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혈천교의 대범천을 죽이도록 해 강한월을 살릴 기회를 없앤 것이 바로 무림맹이니까.

일단 계획이 서니 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늙지 않는 육체를 가진 데다 회귀의 비술마저 알게 되었으니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

신주의협은 느긋한 마음으로 중원 곳곳을 돌며 제자 후보를 물색했다.

나름 각 분야에서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자들을 모았지만 강한월의 빈자리를 메워주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능력을 발휘해 단기간에 그들을 고수로 만들었고, 십이간지의 한 자리씩을 내어주며 ‘혈승’이라 이름 붙였다.

이제는 천하를 혼내 줄 차례.

혈천교를 흉내 내 ‘혈교’를 만들고, 혈승들을 앞세워 세를 확장하게 했다.

굳이 무림을 향해 칼을 들이밀 필요도 없었다.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면 정파 무림이 먼저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혈승 그 아이들은 역할을 잘 수행했다. 혈교와 척혈단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졌고, 중원은 곳곳이 피로 물들었지.”

신주의협은 그렇게 판을 벌여 놓고 홀로 느긋하게 시간의 돌 수집에 나섰다.

제갈세가의 것을 가져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장백산 청송문의 것은 애를 좀 먹었다.

동방선도의 당대 계승자의 실력이 꽤나 놀랄 수준이었던 것.

하지만 그냥 그랬다는 것이지 그의 행보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고, 마침내 열두 개의 시간의 돌을 모두 모은 신주의협은 기련산맥으로 향했다.

제자 혈승들과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예상했던 그대로, 얼마 후 혈교는 척혈단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혈승들은 기련산맥으로 도망쳐왔다.

그것으로 모든 준비는 갖춰졌다.

이제 과거로 회귀해 강한월을 살리는 일만 남았을 뿐.

“어느 혈승이 누구의 몸으로 회귀할지는 사부님이 정해주신 겁니까?”

“맞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것이라 믿었지만 실은 내가 조정한 것이었지.”

그랬구나. 그래서 천마신교와 같이 중요한 곳에 심성이 악하지 않은 유선을 보낸 것이었구나.

아마도 신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겠지.

“저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사부님 혼자 회귀하시는 것으로 충분했지 않습니까? 굳이 혈승들을 몰고 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이유는….”

“다 너를 위해서였다.”

“저를 위해서라고요?”

“그래. 하늘이 정해준 가혹한 운명 때문에 꽃피우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던 너. 그런 불쌍한 너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었다. 정파 사파 마교는 물론 황실까지도 완벽하게 통합한 세상의 주인으로 말이다.”

그런 신주의협의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미래 척혈단의 장무영이 신주의협의 몸으로 회귀를 시도하지만 않았다면, 세상 사람들은 회귀자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신주의협이 세운 계획 아래 복종하게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완벽해 보였던 계획에도 하나의 허점이 있었으니, 회귀 후 남겨질 시간의 돌을 처리할 방안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게 저 때문이었던 겁니까? 제가 정말 그런 것을 바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강한월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지금껏 세상을 구하기 위해 활약했다고 자부했었는데, 알고 봤더니 모든 불행의 근원이 강한월 자신이라고?

그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실은 자신 때문이었다니….

“네가 바라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너는 이 모든 사실을 몰랐을 테니까. 회귀자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고, 문무대와 척혈단을 맡아 고생할 필요도 없었겠지. 일이 이렇게 된 건 미래 무림맹이 장무영을 이곳으로 보내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야.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어.”

이걸 말이라고?

엄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사부의 모습에 강한월은 정말로 화가 났다.

그렇기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모진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사부… 당신은 정말로… 미쳤군요.”

“내가… 미쳤다고?”

기분 탓이었을까?

순간 신주의협의 모습이 수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회색빛 눈동자에 이백 년 훨씬 넘는 삶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절대로 행복하지 않았을 삶.

시대와 시대를 건너뛰며 계속된 이 불행의 역사 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것은 누구일까?

강한월은 험한 말을 뱉은 것이 후회되었다.

갑자기 사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늙어 죽지 않는 육체에 갇혀 영원히 고통받을 그가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넌 다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냐? 천하를 안겨주겠다는데 싫다고? 내가… 내가 지난 이백 년간 준비한 것이… 미친 짓이었다고?”

신주의협은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눈빛이 수시로 바뀌었는데, 충격을 받은 듯 멍했다가 분노가 극에 달한 듯 표독스러웠다가 다시 힘들고 지친 듯했다가를 반복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한 강한월을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은 것을 참는 것 같았다.

차라리 저 매서운 손이 자신의 숨통을 끊어줬으면.

강한월은 그러기를 바랐지만, 신주의협이 자신을 죽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부님. 정녕 방법이 없는 겁니까? 사부님의 능력은 광대하지 않습니까? 분명 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어떤 방법이….”

“그런 방법은 없다. 너와 내가 정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 아무런 방법이 없어.”

신주의협은 고개를 흔들었다.

스스로도 강한월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그 긴 세월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미칠 듯한 외로움과 싸워가며 차근차근 추진해온 모든 일들이 다 부질없는 것임이 밝혀졌으니까.

제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자신의 잘못.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방법은 없는 것을.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놔둘 수는 없어요.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사부님을 위해서라고요! 이미 충분히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서…?”

신주의협의 눈빛이 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단순한 충격이나 내적인 갈등 그 이상으로 보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신주의협의 입에서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한월아… 아까 내가 한 말 속에… 답이 있다.”

“사부님?”

분명 같은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왠지 좀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정신의 저 깊은 심연에 감금되어 있던 회귀 전의 신주의협의 영혼이었으니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잘 들어라. 네가 심검을 익히도록 부추긴 것도, 아까 비무를 하며 잔인하게 너를 몰아붙인 것도 모두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내 비록 이 몸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몇 가지 행동을 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

“사부님.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신주의협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요동쳤다.

아마도 내부에서 신, 구 두 영혼이 격하게 대치하고 있는 듯했다.

“그 답은 내가 한 말 속에 있다. 정을 끊어라. 그것만이 나를 위해 네가 해줄 수 있는 일….”

그것을 마지막으로 신주의협은 입을 닫았다.

표정이 급변하는 걸 보니 과거의 영혼은 다시 수면 밑으로 봉인된 것 같았다.

강한월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머리를 굴렸다.

정을 끊으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리고 정을 끊는 것과 심검은 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내 영혼의 부속물이 한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신색을 회복한 신주의협이 차갑게 말했다.

잠시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것이 몹시 기분이 상해 보였는데, 더 속을 상하게 한 것은 그럼에도 봉인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

비록 시대가 다를지언정 원래 하나의 영혼이기에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소멸시킬 방법은 없었다.

“사부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데 쓸모없을 리 있겠습니까?”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강한월은 지금까지 와는 다른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쓸모가 있다고? 방금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는 말이냐?”

“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강한월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을 너무도 아껴준 고마우신 분.

하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 괴물이 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부님.

강한월 자신이 자결을 한다고 해도 이 비극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괴물이 된 사부는 다시금 회귀를 해서라도 자신을 살려낼 테니까.

그랬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부와 자신과의 정을 끊어야 한다.

그리고… 이 깊고 끈질긴 정을 끊어낼 방법도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자신의 손으로 사부를 죽여야 한다.

“후후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사부의 목소리는 표독했고, 가소롭다는 듯이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어렵겠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그 방법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방법? 무슨 방법? 설마 심검을 뜻하는 것이냐? 자조차도 연마하지 못한 심검을 네가 펼치겠다고? 겨우 호랑이의 팔이나 베었던 그 어설픈 미완성의 심검으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말을 하면서도 열받는지 신주의협이 벌떡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의 분노에 호응했는지 갑자기 주변에 날카로운 바람이 불며 서리가 내릴 듯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한월도 계속 앉아있을 수는 없었기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 이곳저곳이 비명을 질렀지만 상관없었다.

앞으로 하려는 일에 뼈와 근육은 필요치 않으니까.

“예전에는 계속 실패했었습니다. 심검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거든요. 실은 심검의 용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무슨 뜻이지? 설마 네가 심검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인가?”

“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살심에 물든 사람이 아닌 이상, 제 마음은 사람을 죽이는 심검을 발동하지 못합니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신주의협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덕분에 살을 에는 칼바람도 잠시 가시었고.

“하하하, 무슨 헛소리를.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검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대신 다른 것을 할 수 있지요.”

“정을 끊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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