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추적-209화 (186/210)

209화. 심검

* * *

“정을 끊겠다고?”

신주의협은 황당하다는, 그리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이야기를 모두 듣지 않았느냐? 그 긴 세월을 너 하나를 위해 살아왔는데, 너는 나와 정을 끊겠다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 사부님을 위하는 길임을 방금 깨닫았으니까요.”

“흥, 헛소리! 분명 내가 감금해 놓은 이 시대 신주의협의 영혼이 너를 세뇌시킨 것이렸다? 그자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그것은 회귀의 과정에서 생겨난 복제품일 뿐이니까.”

“만약 현시대의 신주의협이 복제품일 뿐이라면… 저 또한 복제품인 것이죠. 원래의 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아니다! 넌 죽지 않았어. 내가 허락하지 않는데 네가 어찌 죽을 수 있다는 말이냐?”

신주의협의 광기가 다시 폭발했다.

생각하는 방법도, 말하는 것도, 표정도… 모든 것이 미친 사람의 그것이었다.

강한월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사부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정을 끊을 수밖에.

“그래 좋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어떻게 정을 끊겠다는 거냐? 이제부터 나를 미워하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반기를 들겠다는 것이냐?”

“제가 어찌 사부님을 미워하겠습니까? 이처럼 큰 사랑을 저에게 주셨는데요. 그리고 사부님의 일을 막을 힘도 저에게는 없고요.”

“하하하, 그렇지. 넌 나를 미워해서는 안 되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너를 죽이고 다시금 회귀하여 새롭게 너를 키워야 할 테니까.”

신주의협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과장된 표정과 웃음 이면에는 절절한 회한과 피곤함이 느껴졌다.

그것이 자 혈승인 신주의협의 감정인지, 아니면 의식의 수면 속에서 울고 있을 사부의 감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실은 이번 생의 신주의협이나 회귀를 하며 생을 반복한 신주의협이나 원래 하나, 봉인된 상태에서 기를 쓰고 길을 알려주는 모습도 또한 눈앞에 미친 괴물의 모습도 모두 사부님인 것이다.

그러니 강한월은 더더욱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정을 끊음으로써 사부님을 구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강한월의 생각은 이랬다.

제자에 대한 사부의 집착이건, 비술 연마의 부작용이건, 혹은 하늘의 저주이건… 신주의협의 삶은 너무도 고되고 고통스러웠다.

더욱 비참한 것은 비술의 영역이 극에 달한 결과 늙지도 않고, 정신상태가 혼탁해져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런 비극의 수레바퀴에 갇혀 영원을 살아야 할 사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면 곧 죽음을 선물 받는 것.

사부를 위해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강한월 자신밖에 없었다.

심검.

그랬다. 답은 심검이었다.

득도한 고승인 소림의 송목 대사, 천지원기와 소통하는 장학송 문주, 마신의 강림을 받은 천마까지. 남들은 못 보는 걸 보는 초인들은 하나같이 강한월에게서 심검의 운명을 보았다.

왜 그런 것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강한월도 알았다.ㅈ

심검, 그것이 불멸의 절대자 신주의협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줄곧 잡히지 않던 심검이 과연 신주의협을 상대로는 발휘될 수 있을까?

강한월은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검은 마음과 생각의 힘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인데, 전에는 누구를 죽인다는 생각으로 심검을 펼치려 했으니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강한월 본연의 인성이 살심과는 거리가 머니까, 마음속에 살인에 대한 거부감과 주저함이 있었기에 마음의 검이 펼쳐질 리 없었다.

돌이켜보면 심검이 제대로 펼쳐졌던 것은 단 한 번, 바로 진가린을 구하려 할 때였다.

적을 죽이겠다는 마음이 아닌 동료를 구하겠다는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은 가능할 것 같았다.

자 혈승을 죽이겠다는 살심이 아닌, 불쌍한 사부에게 휴식을 선사하려는 마음으로 심검을 펼친다면.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다.

과연 자신이 펼칠 심검이 달마와 장삼봉을 능가하는 전무후무의 절대 강자인 사부를 상대하기에 충분할 것인가?

심검은 마음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것, 과연 자신의 마음의 크기가 무려 삼백 년 가까운 사부의 내공보다 클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사부를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구하고픈 마음이 아무리 절절하대도 삼백 년의 내공과 비술로 강화된 사부를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강한월은 해내야만 했다.

마침 자신에게는 부족한 마음의 크기를 보완해줄 특별한 힘이 있었다.

기억 혹은 꿈의 형태로 변화되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미래 척혈단 단주 장무영의 영혼, 그리고 그 기억 속에 함께하는 수많은 희생자들의 절망과 고통의 마음들.

그 거대한 기억과 간절한 마음을 자신의 것과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것이냐? 아무 고민할 것 없다. 너는 그저 내가 안배한 대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 되는 것이야.”

“사부님을 사랑하지만, 그 말씀엔 따를 수 없습니다.”

“흥,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냐? 설마 내가 민정화 그 아이를 죽였다고 이러는 것이야? 허허허, 너는 아직 이해를 못 하고 있구나. 네가 나를 따르기만 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역시 가능해지는 것을. 마치 내가 너를 살렸듯이.”

사부가 하는 미친 소리는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강한월도 마음이 흔들렸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과연 그래도 될까?

“자, 나와 함께 세상으로 나가자. 무림과 황실과 온 천하를 손에 넣고 저 잔인한 하늘을 향해 소리치자. 우리가 운명을 이겼노라고. 하늘이 내린 가혹한 운명도 우리를 꺾을 수 없다고!”

사부의 말에 살짝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강한월은 즉시 마음을 다잡았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살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처럼 미친 소리를 내뱉는 사부에게 평안과 휴식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

고혼이 된 사람들은 지금쯤 저승에서 고된 삶의 피로를 풀고 있겠지만, 사부는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죄업만 쌓고 있으니까.

“사부님. 어째서 하늘과 싸우려 하십니까? 아무리 잔인하고 가혹해도, 결국 우리는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데요.”

“너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게냐? 내가 힘들게 노력해 회귀한 덕에 네가 살아있지만, 그전에 네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고 얼마나 힘들게 죽어갔는데!”

“네,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통스럽게 죽었을지라도 결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하늘에 감사했을 겁니다. 친자식도 아닌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마신교를 거쳐 천축까지 그 험한 길을 달려 주신 사부님을 주신 것에 감사했겠죠. 지금 이 세상에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은 사부님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그… 그건….”

신주의협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강한월이 죽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정말로 강한월이 감사하며 죽음을 맞았다면, 자신은 제자를 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안한 영면을 방해한 꼴이 되는 것이니….

신주의협은 갈등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것이 후회와 반성으로 연결될 리는 없다는 것을 강한월은 알았다.

고대의 비술, 저주받은 피의 주술들이 올바른 생각을 하도록 놔둘 리 없었다.

그러니 강한월은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

사부에게 영면을 선사해야만 했다.

부자 관계보다 더 가까웠던 정을 끊고, 사부에게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사부님. 지금껏 저에게 내려 주신 은혜…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강한월이 너무도 정중한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자 신주의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감사하니까 이제부터 자신을 따르겠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너무도 뜬금없었기 때문.

하지만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신주의협 혼자일 뿐, 강한월은 이 순간 진심에 진심을 담고 있었다.

“부디…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편안히 쉬세요.”

샤악~.

분명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강한월의 마음속으로 예리하게 베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를 향한 사랑과 감사, 영면의 휴식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미래 척혈단의 모든 기억과 염원들이 하나로 모여 심검이라는 이름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휘청.

갑자기 정신과 마음이 진공상태로 변하여 강한월의 몸이 흔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신주의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네가 감히….”

심검이 실패한 것인가?

비록 표정은 험악하고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었지만, 신주의협은 두 발로 꼿꼿이 서 있었다.

아니, 심검은 성공했다.

조금 전 그 찰나의 순간에 사부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강한월은 알았다.

지금은 그저 고강한 비술의 힘으로 잠시 버티고 있을 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강한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물기 때문에 눈앞이 뿌옇지만 강한월의 사부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독하게 일그러졌던 인상이 점차 부드럽고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음과 정신을 어지럽히던 악한 비술의 힘이 빠져나가면서 신주의협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

“한월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구나.”

“사부님. 저는….”

“비록 네가 원했던 건 아니라도… 너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삶… 부디 즐겁게 살아라. 모든 죄과는… 이 사부가 지고 갈 테니.”

강한월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심검으로 사부의 심장을 부수는 순간, 자신의 것도 함께 아스러진 것 같았다.

“넌 나와 달리 잘 해내리라 믿는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이 괴롭다면… 금검문 내 서재의 목함을 열어 보거라. 너에게… 작은… 선물을 남겼으니….”

강한월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사부를 안았다.

회광반조였을까?

사부의 눈빛이 너무도 맑고 선명했다.

지금 하는 말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너를 제자로 둘 수 있어 행복했다. 비록 긴 시간 고통을 겪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못 할 짓을 저질렀지만… 회귀하여 너를 다시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제자야.”

그 말을 끝으로 신주의협은 눈을 감았다.

모든 공력과 비술의 힘이 흩어지는 순간,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한 육체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강한월은 정성스레 가루를 긁어모았다.

자신의 눈물과 범벅이 된 그 가루를 사마염 사백의 옆자리, 자신이 눕고 싶던 그 자리에 묻었다.

털썩 주저앉은 강한월은 하염없이 사부의 묘만 바라봤다.

어스름이 떠오른 해가 한낮의 뙤약볕을 쏟아내고 다시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사부의 곁은 지킨 그는, 별빛이 내리기 시작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땅속에 누워있어야 할 것은 저인데… 사부님이 대신 누우셨군요. 부디 편안히 쉬시기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한월은 산을 내려와 금검문으로 향했다.

목욕재계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제자에게 남긴 작은 선물.

무엇일까?

서재로 가 목함을 찾았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금검문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비밀 방 안에 있었으니까.

목함을 열기 전, 강한월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두드리는 느낌만으로도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과연.

안에 든 것은 붉은빛을 발하는 열 개의 돌.

그리고 사부가 정성스레 적은 얇은 책자였는데, 회귀의 비술을 행하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시간의 돌.

두 개는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었으니, 이제 열두 개가 모두 모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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