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장] 흑천방 2 >
우문호와의 대화는 한 시진째 계속되고 있었다.
백자안은 천년색마와 흑천사걸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을 자세히 설명했다.
우문호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왕해가 백자안을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응을 보였다.
“자네를 죽이려 하는군.”
백자안과 설중화, 백소영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요? 이를 어째. 오라버니. 내가 잘못했어. 그곳에 가지 마.”
백소영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중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놈들이 공개적으로 백 무인을 죽여서 얻는 게 있을까요? 흑천방주가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울러 왕해에게 지시를 내려 백 무인을 잘 대접하라고 한 것까지 사실이라면서요? 한데 왜?”
“흑천방주는 만만한 자가 아니네. 무공도 매우 높지. 흑천사걸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체면을 위해서지. 물론 백 무인을 죽인 후 어떤 식으로든 위장을 해 발뺌할 것이네. 예를 들어 천년색문 잔당의 짓이라고 둘러대는 것이지. 놈들의 소굴에서 벌어진 일이라 조작이 쉬울 것이네. 그 때문에 초대를 한 것이고.”
“왕해 그자가 지부장님도 초대했습니다. 설마 지부장님도 해하려는 걸까요?”
“내가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그냥 해본 소리라고 보네. 그래서 가볼 생각이네. 내가 가면 백 무인도 안전할 것일세. 놈들로서는 헛물을 켜는 셈이지.”
우문호가 껄껄 웃었다.
백자안이 물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확답을 준 것이 아니니 꼭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네. 가야 하네. 만약 놈들이 나까지 제거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네.”
우문호가 눈을 빛냈다.
설중화가 굳은 안색으로 물었다.
“총단에서 흑천방을 제거하려는 겁니까?”
“맞네. 이미 맹주님의 재가가 떨어졌네. 흑천방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네. 양민들의 원성도 극에 달해 있지. 그래서 한 달 전 총단에서 지휘부 비밀회의가 열렸네. 그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토벌이 결정되었지. 이후 놈들을 공격할 구실만 찾고 있었지. 내가 가보려는 것은 놈들의 의도를 좀 더 파악해보기 위해서라 할 수 있네. 과연 우리 계획을 알고 있는지 파악해볼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설 대원과 백 소저도 함께 가도록 하지. 놈들이 아직 나를 해칠 배짱은 없을 테니까 안전할 걸세.”
“제 동생은 무공을 모르니 여기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나는 검을 차고 있어 무공을 익힌 줄 알았네. 내가 백 소저를 데려가려 했던 것은 혹여 놈들이 의심할 것을 우려해서였네. 하지만 만약의 경우란 게 있으니 백 소저는 이곳에 남도록 하시오.”
“아니에요. 저도 가겠어요. 지부장님이 계시는데 놈들이 어쩌겠어요? 오라버니. 날 생각해주는 것은 좋지만 이번만큼은 데려가줘. 날 안 데려가려는 것은 설마 지부장님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거야?”
“그건 아니다. 좋다. 네가 가서 도움이 될 수 있다니 함께 가자. 다만 조용히 있어야 한다.”
“알겠어. 고마워.”
백소영이 생긋 웃었다.
우문호 역시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그럼 우리 네 명만 가도록 하지.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게나. 나는 미리 흑천방 지부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겠네.”
“알겠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인근에 지부 무사들을 매복시켜두는 것은 어떨까요?”
백자안이 의견을 냈다.
우문호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백 무인. 자네가 천년색마를 제거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네. 내상을 입어 회복이 어렵다고 알려졌지만 이후 흑천사걸을 제거함으로써 어느 정도 건재를 과시했지. 하지만 아직 내상 회복이 덜 되었고 무엇보다 자네는 경험이 부족해. 내가 무사들을 매복시키려 하게 되면 놈들에게 들킬 우려가 크네. 그럼 본맹의 공격 계획까지 탄로 날 수 있는 것이지. 무엇보다 내 무공은 왕해 그자보다 열 배는 높네. 흑천방 장사지부에 있는 무사의 수는 대략 삼백 정도. 흑천방의 고수는 대부분 낙양에 있으니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네. 내 말뜻을 알겠나?”
“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하하. 무슨 소리. 나는 자네가 앞으로 맹에서 크게 출세할 것이라 믿네. 총군사께서 자네를 아껴주고 있으니 텃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그때가 되면 나도 다시 총단으로 불러주게나. 사실 나 역시 태상장로 자리에 욕심을 내다가 이곳 장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지.”
우문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라 이렇다 할 배경이 없었다.
사문도 일인전승이라 사부가 죽고 난 후 혼자였다.
하지만 무공이 매우 강했다.
호남성 일대에서 천년색마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우문호가 유일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실제 그는 천년색마의 흔적이 발견되면 직접 제거할 계획이 있었다.
한데 느닷없이 백자안이 그 공을 먼저 차지한 것이었다.
백자안은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문호의 지나친 자신감이었다.
한 달 전 흑천방에 대한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면 지금쯤 그 사실이 새어나갔을 가능성도 대비해야 했다.
‘총단에서 너무 길게 끌고 있구나. 공격 명분이 따로 꼭 필요할 게 무엇인가. 그동안 양민들이 고통 받은 사실이 무수히 많은데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백자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럼 한 시진 후 출발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자안이 우문호에게 고개를 숙인 후 백소영, 설중화와 함께 귀빈각으로 갔다.
가는 도중 백자안이 말했다.
“아, 설 대원. 총군사께 제 이야기를 좋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저를 좋게 보시겠습니까?”
“호호호. 별것 아니에요. 그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적었을 뿐이에요. 한데 정말 괜찮을까요? 제 생각에도 병력을 준비해두는 게 안전할 것 같은데. 별일은 없겠지만 지부장님께서 너무 자신 있어 하시는 것 같네요.”
“지부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제 동생입니다.”
백자안이 앞서서 걸어가는 백소영을 봤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 같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백자안이 백소영을 불렀다.
“소영아.”
“왜 그래?”
“네게 줄 선물이 하나 있다.”
“그게 뭔데?”
“잠시 기다려라.”
백자안이 한쪽 구석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가죽옷을 벗어 가져왔다.
“헉! 설마 그 괴상한 옷을 나보고 입으라는 거야?”
“도검불침인데?”
“아! 맞다. 혹시 그것 덕분에 비수를 막아낸 것이었어?”
“그렇다. 싫으면 관두고. 나도 큰마음 먹고 주는 건데······.”
백자안이 다시 입으려 하자, 백소영이 얼른 다가와 가죽옷을 받았다.
“도검불침이라면 입어야지. 고마워. 오라버니.”
백소영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 역시 흑천방 지부에 가는 게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했었다.
설중화가 다가와 가죽옷을 한번 만져봤다.
“보통 가죽이 아니군요. 저 또한 그때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철포삼만으로 비수를 막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지요. 제 생각에 아마 이 정도 재질이면 매우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절대 팔아선 안 되겠지만 말이에요.”
“언니. 혹시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을까요? 은자 백 냥까지 가능할까요?”
“은자 백 냥이 아니라 만 냥이라도 살 사람이 있을 거야. 황족에게 팔면 그보다 더 받을 수도 있지.”
“그래요?”
백소영이 매우 기뻐했다.
마치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백자안이 말했다.
“팔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만약 팔려 하면 바로 회수할 테니까.”
“알았어. 고마워. 평생 입을게. 생각보다 얇아서 내의로 입으면 될 것 같아.”
백소영이 서둘러 보따리 안에 가죽옷을 넣었다.
객방에 들어가면 바로 입을 생각이었다.
얼마 후 귀빈각에 도착하자, 백소영과 설중화 두 사람과 백자안은 따로 방을 배정받았다.
비록 한 시진이지만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나중에 봐. 오라버니.”
“그럼 나중에 봬요.”
백소영과 설중화가 옆방에 들어가자, 백자안 역시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그는 바로 가부좌를 틀고 무명심법 운공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백소영에게 준 가죽옷을 떠올렸다.
사실 그의 생명을 살려준 매우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에게 준 것이라 아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사실 호신강기만 만들 수 있으면 가죽옷이 전혀 필요 없지. 오히려 호신강기는 전신을 보호할 수 있어 더욱 안전할 것이다. 내가 무명심법 칠성을 계속 유지했으면 완벽한 호신강기를 형성할 수 있었을 텐데······.’
백자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새롭게 만든 무명진기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칠성에 달했을 때의 그 지고한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지금 호신강기가 가능할지 모른다. 이전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호신강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시진이 다 되어갈 무렵.
백자안의 몸에서 금빛 기운이 엷게 일어나더니 전신을 덮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진 구석이 없었다.
‘성공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매우 기뻐했다.
사실 호신강기는 절정고수급 이상만 가능한 것이었다.
절정고수라도 다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내공이 무척 강해야 했다.
몸을 보호하는 강기가 내공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의 경우는 일반적인 호신강기와는 달랐다.
내공의 양이 아니라 질이 매우 우수했기에 가능한 특별한 호신강기였다.
이제 시작이라 미약했지만 보통 화살 정도는 충분히 퉁겨 낼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다. 소영이에게 가죽옷을 주지 않았다면 호신강기를 만들 생각도 못했을 텐데. 고작 사흘간 만든 진기로 만들다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구나.’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의 몸을 감싸던 금빛 기운이 사라졌다.
호신강기를 계속 만들어두면 내공의 소모가 엄청났다. 그 때문에 비상시에 자동으로 발동되도록 해둔 것이었다.
색깔 역시 표가 나지 않도록 은은한 빛으로 바꿨다.
이처럼 세세한 조정이 가능한 것은 무명심법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무명부록 상의 여러 가지 것들을 연습해봐야겠다. 팔대무공은 아직 무리지만 부록에 있는 것들은 지금 상태에서도 가능할 듯하구나.’
백자안이 시범적으로 역용술을 한번 펼쳐봤다.
순간, 그의 얼굴 근육이 바뀌면서 전혀 다른 얼굴로 변했다.
금세 다시 본얼굴로 돌아온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무명부록 역시 심법 칠성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다만 팔대무공은 당분간은 시도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 한번 무명검법을 연마해보려 했는데, 시작부터 주화입마의 기운이 감돌아 서둘러 중지했던 탓이었다.
‘팔대무공은 여전히 심법이 칠성에 달해야 하는 것 같구나. 다행히 육합 계열 무공과는 궁합이 좋으니 일단 그쪽으로 숙달하는 게 좋겠다. 상대가 절정고수급만 아니라면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 [제5장] 흑천방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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