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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27화 (27/250)

< [제9장] 내공수 2 >

“박 채주. 어떻게 되었소? 놈의 흔적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백자안 그놈이 겁을 먹고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굳이 밤을 새워 놈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놈이 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뇌옥에 있는 놈들을 저잣거리로 끌고 가 처형할 겁니까?”

“그건 아직 결정하지 않았소. 사천사자들께 자문해볼 생각이오. 완벽한 올가미를 설치해놨는데 굳이 힘들여 놈을 제거할 필요가 있겠소? 개인적으로 하루 이틀 정도 더 기다려볼 용의도 있소.”

“그전에 화약이 폭발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문제없소. 내가 간단히 기관을 작동시켜 폭발 시간을 늦출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백자안 그놈이오. 악양을 수복하겠다는 그놈들은 천 명이 아니라 만 명이라도 걱정이 아니오. 이전 같으면 모르지만, 무공이 열 배 이상으로 강해진 우리에게는 오합지졸일 뿐이니까. 성 밖에 있는 토벌군 역시 마찬가지요. 다들 명심하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청에 있던 장강수로채 주요 고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새벽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 소식도 없었다.

보통 침입할 때 깊은 밤을 노리는 것을 감안하면 외부 적이 잠입할 가능성은 적다고 다들 생각했다.

뇌옥을 살피고 온 박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산적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그는 사십 대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박무가 아니었다.

실제는 백자안이었다.

계획대로 박무를 따라간 백자안이 그를 죽인 후 역용한 것이었다.

‘무명부록에 있던 것들이 하나같이 대단하구나. 이전에 한번 연습해본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거의 완벽하게 박무 그놈으로 변했다.’

박무, 즉 백자안이 자신의 얼굴을 조금 쓰다듬었다.

촉감까지 똑같았다.

‘더 놀라운 점은 섭혼술(攝魂術)로 놈의 기억을 일부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한번 펼쳐봤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군.’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섭혼술은 상대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고도의 비술로, 그 종류 역시 많았다.

무명부록에 있는 섭혼술에는 기억까지 읽을 방법이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조금 서툴렀지만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의 기억은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파악한 박무의 과거는 매우 추악했다.

어려서부터 수적이 되어 그동안 해친 양민의 수만 수백 명이 넘었다.

용왕채란 수채를 스스로 만든 것처럼 야심도 컸다.

그는 줄곧 힘을 길러 향후 장강수로채의 총채주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참고로 용왕채 수적들의 수는 오백여 명으로 적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자안에게 정작 필요한 내공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단지 그 역시 매일 아침 내공수를 한 방울 정도 먹어 내공 증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장강수왕이 생각난 듯 말했다.

“성 밖의 토벌군 동태는 어떠한가?”

동정수로채주 원보가 대답했다.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두를 필요 없다. 원래 계획대로 놈들을 한곳에 모아 한 번에 쓸어버린다. 각 성을 개별 공략하는 것은 성벽 때문에 힘들 수 있으니 최대한 힘을 빼놔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군량미 보급을 받는 것까지 두고 볼 수는 없지. 토벌군에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대륙표국 놈들은 어떻게 되었나? 왜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이냐?”

“염왕채 무사들이 갔으니 조금 있으면 돌아올 겁니다.”

원보가 말을 했을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대청 바깥이 시끄러워지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십여 명의 수적들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그들이 잡아온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소녀였고, 한 명은 오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한데 백의를 입은 소녀의 미모가 그야말로 눈부셨다.

“엄청난 미인이군.”

“보통 미인이 아니다.”

지휘부 수적들이 웅성거렸다.

반면 남자는 부상이 심한 듯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이놈들! 우리 아가씨를 건드리면 네놈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년인이 소리쳤다.

그는 삼사십 대 못지않은 건장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포로 신세였다.

두 사람을 끌고 온 염왕채주 장강염라(長江閻羅)가 말했다.

“총채주께 보고 드립니다. 대륙표국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군량미는 불태웠습니다. 이 계집은 대륙표국주의 여식인 백리설아(百里雪娥)입니다. 무림삼미로 유명하지요.”

“하하하! 장강염라 그대가 월척을 낚았군. 무림삼미는 사내라면 누구나 품고 싶어 하는 계집이 아니오? 정보에 의하면 토벌군에 화산옥녀가 있다고 하던데, 이렇게 그녀와 쌍벽을 이루는 미인을 데려오다니! 기쁘기 그지없군. 저 계집을 내게 바치러 데려온 것이오?”

“죄송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잡은 계집이니 제 것이지요. 여기 데려온 것은 총채주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각 채주들과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이 계집을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장강수왕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강염라의 무공은 매우 높았다.

염왕채 역시 십팔채 중 한 곳으로 그 세력이 강했다.

사실 장강염라는 자신과 끝까지 총채주 자리를 다투던 자였다.

특히 장강염라를 지지하는 수채가 아직 상당수 있어 자칫 잘못하면 내분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하하하! 좋소. 총채주로서 어찌 그대가 잡은 계집을 빼앗겠소? 하지만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힘으로 저 계집을 빼앗을 수 있지 않겠소? 그것이 바로 우리 장강수로채의 전통이니까.”

장강수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계집의 미모가 환장할 정도로 뛰어나 분명 탐심을 드러낼 자가 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장강염라 저놈의 힘을 조금 빼놔야 하겠군. 건방진 놈. 네놈은 나중에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하하하! 좋습니다. 도전할 분이 있으면 지금 나서시오.”

장강염라가 껄껄 웃었다.

장강수왕을 제외하고 자신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그였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장강수왕도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일어났다.

“본인이 도전하겠소.”

사람들이 일제히 보니 바로 박무가 아닌가.

아니 박무로 역용한 백자안이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굳어져 있었다.

백리설아의 미모를 보고 놀란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매우 분노한 것도 같았다.

사실 그는 매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백리설아의 미모도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리설아와 함께 잡혀 온 중년인이었다.

‘숙부님!’

백자안이 중년인, 즉 백풍(白風)을 보고 속으로 애타게 불렀다.

열두 살 때 낙양으로 올라가 신세를 졌던 작은 아버지였다.

처음 얼마간은 대륙표국 내 백풍의 방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영웅무관에 정식 입관하면서 기숙사로 들어갔지만, 그때의 추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이후에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풍을 찾아 도움을 받았다.

무저곡에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백풍은 늦은 나이가 될 때까지도 혼인하지 않아 아직 미혼이었다.

어린 나이에 대륙표국에 들어온 그는 쟁자수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남다른 무재를 인정받아 무공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표사가 될 수 있었다.

대륙표국 표사 백풍.

그는 백자안을 비롯한 가족들의 자랑거리였다.

한데 그가 이렇게 중상을 입고 개처럼 끌려와 있는 것이었다.

백자안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애써 자제했다.

그 덕분에 백풍과 함께 끌려온 백리설아에 대해서도 구출 계획을 궁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륙표국주의 여식이란 말에 그 역시 매우 놀랐다.

백풍 때문에 그녀에게 신경을 덜 쓰긴 했지만, 얼굴을 보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였던 어린 소녀.

당시 열두 살이었던 백자안이 석 달간 대륙표국 내에서 지내던 때였다.

하루는 표국 안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 백리설아가 그를 발견하고 길을 가르쳐 주었다.

백자안은 고맙다고 하며 이름을 물어봤다. 나중에 그 이름이 대륙표국주 여식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딱 한 번의 만남.

어릴 때라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혔지만, 간혹 환상처럼 아득하게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처음 느껴본 이성의 감정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는 백리설아가 그만큼 예뻤고 귀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쳐다볼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마음을 접은 상태였다.

물론 그 뒤로 대륙표국에 갈 때마다 그녀에 대해 조금씩 물어보았으나 만날 방법은 없었다.

그녀는 백풍과 함께 반드시 구해야 할 사람이었다.

“오! 박 채주 자네가?”

장강수왕이 반색했다.

그가 아는 박무는 자신을 따르는 채주 중 한 명이었다.

비록 장강염라의 적수는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나섰다고 판단한 것이다.

“흥! 박 채주 그대가 감히 내게 도전하겠다는 것이오?”

장강염라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하는 법이 아니겠소? 나는 저 계집이 마음에 드오. 꼭 내 계집으로 만들어야겠소. 총채주께서는 공정한 승부를 보장해주시겠습니까?”

“하하하! 물론이오. 본 수채의 전통이니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오. 장강염라 그대도 그렇게 알고 도전을 받아주시오.”

“알겠습니다.”

장강염라가 마지못해 승낙했다.

장강수왕이 물었다.

“한데 저자는 왜 데려왔소?”

그가 지목한 사람은 바로 백풍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의문이었다.

“이자는 대륙표국 표사인데, 정보를 얻기 위해 데려왔습니다. 계집이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아서······.”

장강염라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원래 전투를 벌인 후 포로 한두 명을 잡아 와 정보를 캐고 죽이는 것은 수적들의 관례였다.

아니 꼭 수적이 아니라도 적의 동태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은 모든 무력집단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별 물어보실 게 없으면 그냥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딱 봐도 고집이 엄청나게 센 놈 같구려. 나이도 많아 보이고.”

장강수왕이 승낙을 했다.

안 그래도 거치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던 장강염라가 수하에게 눈짓했다.

“끌고 나가 참수해라.”

“잠깐!”

저지를 한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무슨 일이오? 박 채주.”

“저자는 제가 데려가서 고문을 가해 정보를 캐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저자 입에서 고급 정보가 흘러나올지······.”

“하하하. 그렇게 하시오. 별 중요한 놈은 아니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그보다 어서 대결을 벌이는 게 어떻겠소? 두 사람의 무공 실력을 오랜만에 보고 싶구려. 과연 내공수가 어느 정도 변화를 줬는지 무척 궁금하오.”

“알겠습니다.”

백자안이 고개를 숙인 후 대청 중앙으로 나왔다.

장강염라 역시 걸어 나와 그와 대치했다.

그때였다.

백리설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치욕스럽구나. 어서 날 죽여라.”

< [제9장] 내공수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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