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장] 사사천교 3 >
장강수왕의 죽음, 그리고 뇌옥의 폐쇄.
백자안은 급작스러운 사태에 숨을 골랐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바로 섭혼술이었다.
뇌옥의 문을 강제로 부수려 하면 화약이 폭발한다고 했던 장강수왕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고는 뇌옥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의 차이뿐이었다.
섭혼술을 펼치려는 이유는 바로 화약의 제거에 있었다.
출입문을 연 열쇠는 확보했지만 어떻게 기관을 조종해 폭발을 영구히 막을 수 있는지는 몰랐다.
참고로 섭혼술은 상대가 죽고 나서도 일각까지는 시전이 가능했다.
백자안이 우수를 뻗어 죽은 장강수왕의 정수리에 댔다.
백회혈을 통해 기억을 확보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 용왕채주 박무에게 시전했을 때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지금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설마 내가 죽이기 전부터 사람의 기운이 없었단 말인가.’
여기서 사람의 기운이란 바로 혼을 말했다.
그 혼을 빼앗아 상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게 섭혼술이었다. 한데 정작 그 혼이 없는 것이다.
‘이상하군. 이미 죽어서 그런 것인가.’
백자안이 당황했으나 그렇다고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설마 내 짐작대로 생강시가 되는 과정이었단 말인가.’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강시에게는 섭혼술이 통하지 않는다.
비록 겉보기에는 살아있는 것같이 보여도 내면적으로는 이미 혼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섭혼술이 통하는 것은 오히려 그 강시를 조종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장강수왕이 죽은 후 섭혼술을 펼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강수왕의 무공이 너무 강해서 섭혼술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이 흐르고 결국 일각이 모두 지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섭혼술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백자안은 장강수왕이 가지고 있던 열쇠를 들고 그가 기관을 조작했던 벽면을 살폈다.
볼록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조작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화약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감방에서는 갇힌 사람들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아직 하루의 여유가 있다. 숙부님과 설아, 그리고 악 소저 역시 하루 정도는 무사할 것이다. 장강수왕의 지시 없이 감히 내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 일단 뇌옥에 갇혀 있는 분들부터 보살피자. 혹시 다른 곳에 출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수색도 해봐야겠군.’
백자안이 품속에서 관아 지도를 꺼내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비밀통로와 연결되는 부위가 지하뇌옥 끝부분과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자안이 무너진 계단 아래로 경공을 펼쳐 내려갔다.
무너진 계단은 십장 정도의 높이였다. 백자안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뇌옥에 갇힌 일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일단 물이 있는지 봐야겠군.’
백자안이 지하 감방이 있는 통로 맨 앞에 있는 간수실로 들어갔다.
감방들과 간수실의 거리는 백장 정도나 떨어져 있었다.
물론 감방에서 간수실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조였다.
간수실을 살펴본 결과 다행히도 물이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한 것이었다. 감방문이 모두 닫혀 있어 다른 곳으로 옮겨놓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자안이 물통들을 감방에 전달하기에 앞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무림맹 무사 백자안입니다. 여러분을 구출하러 왔으니, 모두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이 질서를 지켜주셔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뇌옥 전체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어 함부로 탈출하려다가는 모두 죽게 됩니다. 저의 지시 없이 뇌옥 출입문을 건드려선 안 될 것입니다.”
감방 전체가 떠들썩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열 배는 더 커졌다.
기력을 아끼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 것이다.
백자안은 그들이 모두 혈도를 제압당해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해 백여 개가 넘는 감방문을 하나하나 파괴한 후 물을 나눠주었다.
“아! 백자안 대협이라면 천년색마를 제거한 신진 영웅이 아니십니까?”
“감사합니다.”
물을 마셔 기운이 난 사람들이 매우 기뻐했다.
그들 중 천 명은 악양성의 정파 무사들이었고, 나머지 오백 명은 양민들이었다.
백자안은 그들 중 대표라 할 수 있는 한 노인의 혈도부터 풀어줬다.
그는 악양의 대표적 문파 중 한 곳인 충의보(忠義堡)의 보주 충의노인(忠義老人)이었다.
“백 대협께서 이렇게 우리를 구해주러 오셨으니 감개무량입니다. 바깥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화약이 매설되었다는 말씀은?”
“토벌군이 성 밖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장강수왕은 제가 죽였습니다.”
백자안이 장강수왕의 시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잠시 자신의 본 얼굴을 보여주어 안심을 시킨 후 다시 박무의 얼굴로 돌아갔다.
충의노인이 매우 기뻐했다.
백자안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을 일으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화약 문제는 두 번 세 번 신신당부했다.
충의노인이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혈도를 모두 풀어드리지요.”
백자안이 지풍을 날려 나머지 사람들의 혈도를 풀어줬다.
제법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야 탈출이 가능했다.
충의노인은 모든 사람을 한 군데 모이게 했다.
다행히 간수실 앞에 큰 광장이 있었다.
사실 뇌옥 역시 이 광장에 지어진 것이기에 일부 공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백자안은 풀려난 사람 중 중태에 빠진 사람들을 치료해주어 급한 불부터 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나절 정도 지났을 무렵.
백자안이 본격적으로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모두 여기 계십시오. 제가 다른 출구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간수실에는 식수 말고도 벽곡단이 쌓여 있었다.
간수들의 비상식량이었다. 며칠째 굶어 허기가 심한 사람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백자안은 지도에 적힌 대로 통로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감방은 가장 안쪽에 있을수록 중죄인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래서 탈출이 힘든 곳이었다.
반면 간수실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져 감시가 소홀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백자안은 지도상에 적힌 비밀통로와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추측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의외로 가장 마지막에 있는 감방 안이었다.
‘이곳이다. 이 벽 뒤인 것 같은데 무조건 부수다가는 기관이 작동될 위험이 높다.’
백자안은 신중했다.
이곳 지하 공간은 일반 관아의 뇌옥으로 쓰기에는 기관이 매우 정교했다.
실제로 오래전 황족의 대피공간으로 설계된 곳이었으나, 그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백자안이 일단 손으로 벽을 만져봤다.
살짝 두드려봤다.
쿵쿵.
다른 벽면을 두들겨 보자, 그 미세한 차이가 느껴졌다.
일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높은 내공으로 기감이 발달한 백자안은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처음 지목한 벽 뒤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기관 발동이다. 설계자가 이 벽을 파괴하면 자동으로 기관이 발동하도록 해두었다면 화약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할 것이다. 그사이 모두 빠져나가야 한다. 비밀통로는 성 밖과 연결되어 있으니, 재빠르게 움직이면 모두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결심을 굳히고 충의노인을 비롯한 천오백여 사람들을 불렀다.
그들 중 천 명은 무공을 아는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혈도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무공을 펼칠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뇌옥을 빠르게 탈출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이곳이 또 다른 출구입니까?”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기관이 발동될 가능성이 크니 통로가 발견되면 곧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십시오. 성 외곽에 토벌군 진영이 있을 것이니 그곳까지 가면 안전할 겁니다. 무공을 아시는 분들은 일반인 분들을 부축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대협께선 같이 안 나가십니까?”
“저는 기관 발동을 최대한 늦춰보겠습니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무명부록 상에는 기를 퍼뜨려 기관 발동을 방해하는 비술이 있었다.
비록 화약 폭발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으나 반시진 정도는 중지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모두 비켜나십시오.”
백자안이 벽면을 향해 육합장을 날렸다.
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예상대로 새로운 통로가 하나 보였다.
“지금입니다. 모두 나가십시오.”
“모두 따르시오.”
충의노인의 지휘에 따라 천오백여 사람들이 일제히 뇌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우려한 대로 뇌옥 전체가 흔들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상 출입구가 바로 뇌옥 전체를 무너뜨리는 기관 장치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백자안이 기관제어비술(機關制御秘術)을 펼쳐 붕괴를 막았다.
“어서!”
백자안이 소리쳤다.
그의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기관제어비술은 생각보다 많은 내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화약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약자들이 문제였다.
혼란의 와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탈출하는 데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람들이 무사히 비밀통로를 통해 성 밖으로 나갔을 무렵.
마침내 화약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콰쾅.
비밀통로와 연결되는 부분부터 무너졌다. 백자안이 서둘러 원래 출입문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나는 가운데 백자안은 호신강기를 최대한 높였다.
그 호신강기는 다행히 파편들을 훌륭하게 막아주었다.
그렇게 원래 출입문을 통해 관아로 다시 돌아가기 전 백자안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다른 얼굴로 역용했다.
수적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순간적으로 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뀐 그의 얼굴은 어느새 장강수왕의 것으로 변해있었다.
뇌옥에서 그가 빠져나온 그 순간.
뇌옥 전체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콰콰콰쾅.
“총채주님!”
“총채주님!”
폭발 소리에 달려온 수적들이 일제히 백자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낮부터 장강수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아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자안이 주위를 둘러보니 해는 이미 져서 깊은 밤이었다.
장강수로십팔채 중 나름 실세라 할 수 있는 수룡채(水龍寨) 채주 수룡객(水龍客)이 물었다.
“총채주님. 어떻게 된 겁니까? 박 채주와 함께 뇌옥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뇌옥에 묻어둔 화약이 폭발한 겁니까?”
“그렇소. 박 채주와 내가 뇌옥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백자안 그놈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공격했소. 우리는 합공을 가했고, 박 채주가 백자안 그놈과 동귀어진을 했소. 하지만 그 싸움의 여파로 화약이 터져버린 것이오.”
“그럼 안에 있던 놈들은?”
“당연히 폭사했을 것이오. 그놈들 죽는 것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겠소? 중요한 것은 우리 측 절대고수였던 박 채주의 죽음이오. 일단 그의 지휘막사로 가서 백리 계집과 화산옥녀를 만나 이 사실을 전달해야겠소. 이곳은 수룡객 그대가 지휘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 [제11장] 사사천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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