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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상소
“상소가 받아들여졌어요.”
단목수련의 말에 백자안과 영호광의 희비가 엇갈렸다.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 않았던가?”
영호광의 물음에 단목수련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었지요. 일심 재판장인 집법장로께서 거부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지요. 아시다시피 집법장로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상소 제기자가 한 명인 경우 자동으로 각하가 되도록 되어 있죠. 그래서 제가 제기한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했어요.”
“그 말은 상소를 제기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단 말이냐?”
“네. 화산파 출신 풍 장로께서 마침 오셔서 공동 제기를 해주셨어요. 그 덕분에 내일 2심 재판이 열리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백자안이 한숨을 돌렸다.
영호광의 음모를 알게 되었지만, 그가 계속 잡아뗀다면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방법을 강구해야겠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악 소저가 풍 장로께 부탁드렸다고 하니 나중에 고맙다고 하세요. 역시 정혼녀가 좋군요. 어려울 때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하더니.”
“알겠습니다. 일단 저 대신 고맙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예요. 사형을 면할 가능성은 커졌지만 지금 이대로 가면 무공 폐쇄를 면하기 어려워요. 물론 무기징역도 함께 받게 되겠지요.”
단목수련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2심 재판장이 총군사인 것을 고려할 때 상당히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렇게 전망이 좋지 못합니까?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악양 전투 때 뇌옥에 갇힌 천오백여 분들을 구출해드린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까?”
“물론이에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백 무인께서 천년색마를 비롯한 천년색문 놈들을 소탕한 일과 장강수왕을 죽인 일 또한 명백한 공이에요. 이미 제가 증거를 모두 수집해 놓았기 때문에 모두 인정될 거예요. 하지만······.”
“다른 변수라도 있는 겁니까?”
“네. 2심부터는 배심원들이 참석할 수 있어요. 장로 아홉 분이 참석하게 되는데 양형은 그분들이 결정하게 되어 있어요. 다만 사형 판결은 2심 재판장인 총군사께서만 결정할 수 있으시지요.”
“배심 재판이 결정된 겁니까?”
“네. 상소가 받아들여지자 집법장로가 배심단을 구성해 신청했어요. 원래는 배심재판이 필수는 아니지만, 신청한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상소 제기자는 배심원이 될 수 없어 풍 장로께서는 제외되셨어요. 배심원 면면을 보면 모두 구파일방 출신이라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을 거예요.”
“원래 배심제도는 유무죄만 결정하고 양형은 그저 재판장이 참고만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렇지요. 하지만 규율은 정하기 마련이지요. 무림맹 재판의 규율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 지금은 제도의 불합리를 따질 때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온 거예요. 명백한 증거나 증인이 있다면 재판장이 배심원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으니까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정말 백 무인이 무단이탈을 했냐는 거예요. 동료 순찰당 무사들의 증언으로는 자신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뿐이에요.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렇게 무단이탈할 사유라도 있었나요?”
“으음,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백자안이 사실대로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영호광이 급히 말했다.
“사매. 사실 사매가 오기 전에 백자안 이 친구가 거래를 제안했어.”
“거래요?”
“그래. 글쎄 나 보고 거짓 증언을 해달라고 하더군. 내가 순찰당 총책임자이니까 내 허락을 받고 휴가를 갔다고 말해달라더군. 그렇게만 해주면 자신이 얻은 절세비급을 내게 주겠다고. 그래서 내가 조금 망설이고 있었어. 사매가 백자안 이 친구를 염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뭐 도움이 될 게 없을까 해서 왔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위증을 해주기만 하면 쉽게 풀릴 문제더라고. 내가 계속 망설이자 이 친구가 그럴싸한 이야기까지 만들어주더군. 글쎄 자신이 마을이 마적 떼 공격을 받는 예지몽을 꾼 후 내게 부탁한 것으로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납득할 것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처음에는 가만있다가 갑자기 내가 그런 증언을 한다면 사람들이 믿겠어? 사매도 잘 알지만 나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지. 아, 물론 비급을 준다는 제안은 내가 바로 거절했어. 위증한다면 순수한 호의에 의해 해야겠지. 사매 생각은 어때?”
영호광이 선제적으로 꾸며댄 말이었다.
단목수련은 말없이 백자안을 쳐다봤다.
그의 해명을 직접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백자안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대사형 말씀이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사실은 이 모두가 영호광 저자가 저를 모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백자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신이 기억을 찾은 사실. 그리고 영호광이 먼저 비급을 주면 증언을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무엇보다 휴가 전 영호광과 자신이 나눴던 대화를 모두 말했다.
단목수련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대사형! 백 무인 말이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정말 실망이에요.”
단목수련이 나무라듯 말했다.
아까 백자안에게 물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영호광이 펄쩍 뛰었다.
“사매. 이 미친놈의 말을 정말 믿는 거야? 그런 주장을 하려면 재판정에서 해야지. 갑자기 감옥에 돌아온 이후 기억났다는 걸 누가 믿겠어? 그것도 그때 하루 일만 기억을 못 하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났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야. 백자안 이놈! 내 너를 불쌍하게 여겨 위증까지 해주려 했는데, 이렇게 나를 무고하다니. 네놈이 비급 운운하며 나를 매수하려 한 사실을 내일 재판정에서 낱낱이 밝히겠다. 상관무고죄 역시 최고형이 사형임을 명심해라.”
영호광이 강력히 부인하자, 단목수련 역시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백 무인은 제게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할 분이 아니에요.”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란 말이냐?”
“대사형도 믿을 만한 분이지요. 제 말은 아직 어느 분의 말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매. 실망했어. 나를 이놈과 같이 취급하다니. 하지만 내일 모든 것이 드러날 거야. 이만 돌아가지.”
“네.”
단목수련이 영호광과 함께 돌아갔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기도 했지만, 그녀로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홀로 남게 된 백자안은 운공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일단 단목수련에게 모든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하지만 영호광의 반론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특히 자신이 갑자기 일부분만 기억을 되찾았다는 부분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단목 소저는 누구 말이 맞는지 고민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게 매우 불리할 것은 명백하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 * *
탕탕탕.
재판봉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백자안에 대한 제2심이자 최종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을 개정합니다.”
담담한 목소리.
청수한 용모의 백의중년인의 말에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기립했다.
백의중년인은 바로 총군사 만박서생으로 재판장이었다.
백자안은 피고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침착한 표정이었다.
증인석에는 영호광이 앉아 있었다.
그 외 관람석에는 백소영, 백풍, 백리설아, 단목수련, 악미미 등 백여 명이 앉아 있었다.
1심과는 달리 재판정이 일부 개방된 덕분이었다.
하지만 장소 문제도 있고 너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원은 백 명 정도로 제한했다.
그 외 특이한 것은 배심원석이었다.
장로 아홉 명으로 구성된 배심단이 이번 재판에 만들어 진 것이었다.
사실 이번 사건은 하루 이틀 사이에 소문이 확 퍼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참고로 재판이 열리는 곳은 군사부 대청이었다. 집법당에서 이곳으로 재판정이 옮겨진 셈이었다.
그 때문인지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강압적인 느낌이 많이 사라지고 절제된 느낌이 컸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먼저 새로운 주장들이 접수되었기에 그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한 새로운 주장이란 어제 감방에서 논쟁이 되었던 백자안과 영호광의 말들이었다.
단목수련이 백자안의 주장 그대로를 정리해 만박서생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영호광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백자안이 자신을 무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상관무고죄 여부가 추가된 것이다.
만박서생은 묵묵히 주장들을 접수했다.
무림맹 재판의 특성상 오늘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야 했다.
만박서생이 설명을 마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백자안의 예상대로라면 자신의 주장이 일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관람석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영호광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백 대협께서 무단이탈할 분이 아니지.”
“영호광 저자가 그렇게 비열했다니.”
“백 대협의 명성이 높아지자 자신의 위치가 흔들린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런데도 백 대협께서 비급을 미끼로 자신을 매수하려고 했다고 모함하다니. 정말 나쁜 놈이로군.”
“어서 백 대협을 석방하라.”
“모두 조용히 하시오!”
관람석에 앉아 있던 집법장로 황보생이 소리쳤다.
그는 일심 재판장으로서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 나는지 보려고 온 것이었다.
게다가 사형을 선고한 장본인으로서 2심에서 백자안을 탄핵할 준비도 하고 왔다.
만박서생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집법장로는 이 두 사람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백자안 저자의 주장은 모두 엉터리입니다. 어떻게든 사형을 모면하고자 총순찰을 모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단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단이탈한 날의 기억을 잃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기억이 다시 났다고 한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무단이탈은 동료 순찰당 무사들이 모두 증언한 사실입니다. 재판장님과 배심원분들께서는 그 점을 유념하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상관무고죄가 추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죄만으로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으니, 총군사께서는 백자안 저자에게 일심 판결대로 사형을 선고함이 마땅하리라 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총순찰 역시 한 말씀 해주시오.”
“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 영호광은 황당할 따름입니다. 어제 백자안 저자에게 면회를 하러 갔던 것은 제가 직속 상관 중 총 책임자이기도 해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매가 저자를 염려해 도와주려는 마음도 있었지요. 하지만 저자는 조금 전 총군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비급을 미끼로 저를 매수하려 했습니다. 위증을 교사한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합니다. 조금 전에도 봤듯이 놈은 양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인 줄 알면서 무작정 그의 말을 믿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마교도의 신앙과도 비슷한 것으로 총군사님의 명철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이상입니다.”
“알겠소. 단목 소저도 한 말씀 하시오.”
“네. 저는 일단 그 문제에 앞서 백 무인의 공적에 대해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총군사께서는 그 부분을 검토하셨습니까?”
“물론이오. 모든 증거와 증언을 살펴본 결과 백자안의 공을 모두 인정하는 바이오. 세부적으로 천년색마를 비롯한 천년색문 일당을 모두 소탕한 일. 그리고 악양 전투에서 수적들의 수괴인 장강수왕을 처단하고 천오백여 명의 무사와 양민들을 폭발 직전에 구출한 점을 모두 인정하오. 그리고 사사천교와의 공모 소문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오. 그 점은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으니 지금은 그 외 부분에 대한 판단을 한 후 종합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소. 배심단도 그 점을 유념해주시오.”
< [제14장] 상소 1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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