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장] 상소 3 >
단목군의 등장은 의외였다.
“맹주님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만박서생의 물음에 단목군이 껄껄 웃었다.
“수련이가 저 친구 변호를 맡았다기에 한번 와 봤소. 백자안이라고 했나?”
“네. 맹주님.”
백자안이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역시 기도가 범상치 않군. 내공은 나보다 더 강한 것도 같고 말이야. 총군사. 사실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소. 이제 결론이 났소?”
“아, 모두 들으셨다니 말씀드리지만 매우 어려운 결정이 될 것 같습니다.”
“공을 모두 인정했으니 사형 판결은 면하겠군.”
“네. 그렇습니다.”
“그럼 양형은 내가 해도 되겠소?”
단목군이 품속에서 맹주패를 꺼냈다.
맹주패는 어떤 무림맹의 일에도 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맹주가 직접 양형 판결을 내리게 되면 배심단은 무용지물이 된다. 백자안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좀 더 신문해야 할 것 같은데······.”
“더 이상의 공방은 내부 단합을 해칠 뿐이오. 어느 쪽이 완승을 한다면 완패를 당한 쪽은 상처가 크지 않겠소? 사사천교가 다시 발호한 지금 우리 내부에 분열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오. 사실 이렇게 재판까지 올 일은 전혀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일단 사형 여부에 대한 판결부터 내려주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만박서생이 대답 후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맹주의 권한 중에는 특별사면권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단목군의 의중이 가장 중요했다.
다만 그 역시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일방적인 판단은 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만박서생이 말했다.
“백자안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 아까 밝혔듯이 백자안의 공은 매우 크며 모두 인정된다. 그 공들로 인해 최소한 사형은 면함을 결정하는 바이다.”
탕탕탕.
백자안을 비롯해 백소영, 백리설아, 단목수련, 백풍, 악미미 등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문제는 양형이었다.
양형이라고는 했지만 무림맹 재판의 특성상 무죄 결정도 내릴 수 있었다.
단목군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전에 단목군은 영호광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광아. 왜 그랬느냐?」
「사부님.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날 백자안 저자와 만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놈! 나에게도 거짓말을 하다니. 내가 저놈들에게 자백신공(自白神功)을 펼쳐야 바른대로 말할 것이냐?」
영호광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자백신공은 말 그대로 상대의 자백을 끌어내는 비술로, 단목군의 독문무공 중 하나였다.
물론 이 역시 섭혼술처럼 피시전자보다 열 배 이상 무공이 강해야 하는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지목을 당한 총순찰 처소 경계 무사들의 공력은 단목군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얼마든지 자백신공이 가능한 것이다.
영호광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용서하십시오. 사부님. 이 모두가 사부님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끝까지 부인한 것 역시 혹여 사부님께서 이번 일에 말려들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습니다.」
「나 때문이었다고?」
「네. 백자안 저자의 명성이 너무 높아져 사부님의 자리를 위협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싹을 제거하기 위해 제가 꾸민 일입니다.」
「못난 놈. 그러니까 백자안의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지?」
「네.」
「이제라도 사실을 밝혔으니 이번 한 번 만은 용서를 하겠다. 모두가 내가 제자를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니, 어찌 너에게만 죄를 물을 수 있겠느냐? 다만 수련이와의 약혼은 불가할 것이다. 그렇게 알도록 해라.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위해 벌인 일이 아니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번 일이 끝까지 파헤쳐지면 너는 그날로 끝장날 것이다.」
단목군이 영호광에게 전음을 보낸 후 이제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다.
“본 맹주가 최종 결정을 내리겠소. 이 결정은 단합을 위한 것이니 모두 따라주기 바라오.”
“네.”
“말씀하십시오.”
황보생은 물론이고 배심단 장로들 역시 결정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재판장 석에 앉은 단목군이 백자안에게 먼저 전음을 날렸다.
「단목군이네. 백자안 자네의 무고함을 알고 있네. 조금 전 영호광 저놈의 자백을 받아냈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고수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네. 일방적으로 자네를 무죄 방면하면 분명 반발이 클 것이네. 어쩌면 원로원도 움직일 수 있겠지. 원로원이 움직이면 나 역시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네. 그래서 자네를 내 사위로 삼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영호광 저 녀석과의 약혼은 없던 것으로 될 것이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만약 자네가 내 사위가 되면 지금 공석인 부맹주 자리에 자네를 임명하겠네. 그러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도 다른 말을 못 할 것이네. 어떤가?」
「죄송합니다. 단목 소저와의 혼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제게는 정혼녀까지 있는지라.」
「으음, 하기야 급작스러운 제안이니 바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사실 아직 수련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방법 외에 자네를 무죄 방면하기는 어렵네. 맹에서는 자네가 맹에 있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이들이 너무 많거든. 솔직히 나는 자네를 내 후계자로 생각하지만, 구파일방에서는 자신들 문파에서 차기 맹주를 뽑으려 한다는 말이지.」
「그럼 일단 제가 맹에서 나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 하지만 사사천교의 준동으로 자네 힘이 절실하네.」
「맹주님이 명을 내리시면 맹 밖에 있어도 언제든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제가 계속 맹에 있으면 이번 일 같은 경우가 끊이지 않을 겁니다.」
「좋네. 하지만 상황이 되면 언제든 다시 자네를 맹으로 들이겠네. 나중에 수련이와 약혼을 하게 되면 그때 부맹주로 복귀하는 게 좋겠군. 그러니까 수련이와 한번 잘 사귀어 보게. 너무 재촉하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내 말뜻을 알겠나?」
「네.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어나가겠습니다.」
「좋네. 아, 그리고 이번 일로 영호광 저놈에게 복수는 하지 말 것을 부탁하네. 아까 말했지만 이미 벌을 내려 수련이와 예정된 약혼을 취소했네. 그러니까 이번 한 번 만 부탁하네. 그래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고맙네. 이 모두가 제자를 잘 가르치지 못한 내 부덕의 소치네.」
단목군이 백자안에게 전음을 보낸 후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했다.
“맹주의 권한으로 본 재판의 양형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백자안에게 제기된 무단이탈죄와 상관무고죄 의혹은 증거가 불충분해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명백히 모든 사람의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유무죄와 관계없이 기억 혼란 등으로 인해 분란을 일으킨 점을 고려해 자숙의 의미로 백자안을 맹에서 추방할 것을 명한다. 다만 그 능력이 뛰어나니 앞으로 다시 무림을 위해 큰 공을 세우면 본인의 신청과 본 맹주의 결정에 따라 재 입맹이 가능함을 밝히는 바이다. 참고로 백자안이 세운 공은 모두 인정되었기 때문에 상금 역시 규정대로 지급한다. 무림공적 천년색마를 제거한 공을 인정하여 은자 천 냥을 지급한다. 또한 악양 전투에서 뇌옥에 갇힌 천오백여 무사와 양민들을 구한 공을 인정해 맹주 권한으로 장원 한 채를 하사하는 바이다.”
탕탕탕.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물론 완전 무죄가 아니라 추방형을 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일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을 생각할 때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추방령 또한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임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었다.
황보생 역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일단 받아들기로 했다.
‘무죄 방면이 되면 원로원 전체 회의를 소집해 맹주님 결정을 뒤엎으려 했는데, 일단 추방이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후후후! 향후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백자안 네놈은 이제 영원히 맹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복귀 조건으로 원로원 전체회의에서의 허락을 추가하게 될 테니까.’
* * *
풀려난 백자안이 간 곳은 바로 대륙표국 총단이었다.
백리설아의 배려로 백자안과 백소영은 객방을 하나씩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백자안의 방에 백자안과 백소영과 백풍, 백리설아 네 사람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화제는 단연 오늘 있었던 재판의 결과였다.
“잘 되었어. 그까짓 맹에 있어 봐야 뭐 하겠어. 푹 쉬다가 다음에 필요하면 다시 들어가면 되지 뭐. 물론 새로 공을 세워야 하겠지만 오라버니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백소영의 말이었다.
백리설아가 말했다.
“그래도 아쉬워요. 저는 맹주님께서 완전 무죄 결정을 내려주실 줄 알았거든요. 누가 봐도 영호광이 오라버니를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자안이를 무죄로 하게 되면 영호광을 처벌해야 하니 맹주님도 고심이 깊으셨겠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호광은 어릴 때부터 맹주님이 가르친 제자이니 배려를 해주셨겠지.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맹에서 추방된 것은 사실이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글쎄요. 생각 중입니다. 일단은 무공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연마해야 할 무공이 아직 많아서요.”
“그래? 하지만 계속 무공만 연마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내가 보기에 맹에 복귀하려면 최소 일 년은 걸리겠던데······.”
“숙부님 뜻은?”
“나는 네가 우리 표국에 들어왔으면 한다. 아가씨도 괜찮으시지요?”
“호호. 저야 대환영이지요. 아버님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백자안이 여지를 두고 대답했다.
백소영이 말했다.
“상금하고 장원은 언제 주는 거지? 호호. 상금 은자 천 냥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맹주님께서 통 크게 장원 한 채를 하사하실 줄은 몰랐어. 부모님을 모실 수 있게 된 거잖아. 얼마 정도 하는 장원일까? 백리 소저는 혹시 아시나요?”
“낙양성 내에 무림맹 소유 장원들이 여러 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규모가 작은 장원은 거의 없으니 최소한 시가로 은자 삼만 냥은 나갈 거예요. 내일 상금하고 장원 열쇠를 이곳으로 보내준다고 들었으니, 내일 직접 가보면 알게 되겠지요.”
“아이 좋아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대박이 났네.”
백소영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백자안 역시 집이 생긴 것에 대해 무척 기뻤다.
백풍이 말했다.
“내일 당장 내가 형님께 서신을 보내겠다. 아가씨 덕분에 서기 자리도 하나 마련해둔 데다가 공짜 장원도 생겼으니 어서 올라오시라고 말이야.”
“네. 숙부님.”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별로 아쉬운 점은 없었다.
안 그래도 최소 일 년은 팔대무공을 연마하는데 집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맹주님께서 장원을 하사한 것은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표국 보다는 차라리 무관에서 관원들을 지도하는 일을 맡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무관을 하나 차리는 것이 장기적인 내 목표이니 경험도 쌓을 겸 사범 자리를 하나 알아봐야겠군. 아무래도 사범 일이 팔대무공 연마와 병행하기에 좋을 것이다.’
< [제14장] 상소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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