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장] 지존장보도 2 >
다음 날 아침.
화산 매화곡(梅花谷)에 모인 군웅들의 수는 삼 만에 달했다.
전날 화산파 대연무장에 모였던 인원이 그대로 옮겨온 셈이었다.
이는 바로 계곡의 절벽 면에서 발견한 한 동굴 때문이었다.
어제 해 질 무렵 발견된 동굴은 빠르게 소문이 퍼져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총군사 만박서생의 지시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전에 동굴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만박서생이 보고를 받고 즉시 무사들을 보내 통제를 가했지만, 그전에 들어간 사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계곡에서는 동굴로 들어가려는 삼만여 군웅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있었다.
“왜 우리를 막는 겁니까?”
“이곳이 혈교의 거점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무리 무림맹이라지만 지존검을 독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공평하게 모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웅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며 항의했다.
동굴의 입구는 매우 넓어 한 번에 백여 명씩도 거뜬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동굴의 깊이가 깊다면 정말 삼만 군웅들이 모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정탐무사들이 들어갔으니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 모두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만박서생이 군웅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도착 즉시 백 명의 무사를 들여보내 정밀 수색을 지시했다.
이제 곧 그들이 수색을 마치고 나올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 그의 부탁이었다.
“한데 어떻게 이곳이 발견된 것이지?”
늦게 온 사람들의 물음에 한 사내가 말했다.
“수색 중 절벽 윗부분이 무너지면서 동굴이 발견되었다고 하오. 처음 발견한 사람이 무림맹 무사였던 터라, 즉시 상부 보고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통제가 가능해진 것이오. 물론 백여 명 정도 이미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소.”
“아, 그렇다면 먼저 들어간 사람들만 좋은 것이 아니오? 그들이 지존검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뭐가 되는 것이오?”
“아직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소. 화산에 미확인 동굴만 수천 개가 넘는데, 어떻게 이 안에 지존검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오히려 총군사님과 매화검선의 의견대로 혈교의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오.”
일부이긴 하지만 군웅들의 의견이 조금씩 갈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백자안과 김지혜도 있었다.
두 사람 또한 여기서 밤을 새웠다.
출입이 금해졌기 때문에 그들 또한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화산파로 돌아갈 수도 없어 군웅들과 함께 밤을 새운 것이었다.
“무정 사범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안에 정말 지존검이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저 역시 혈교의 음모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 지존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그 역시 아직 판단을 유보한 것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사를 위해 무림맹 무사들이 들어갔으니 조금 있으면 발표가 있겠지요.”
김지혜가 말한 바로 그때였다.
동굴 속에서 피투성이 무사 한 명이 나왔다.
바로 조사를 위해 들어간 백 명의 정탐무사 중 한 명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모······ 모두 죽었습니다. 기관 매복에 걸려······ 으윽!”
정탐무사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른 무사들이 급히 부축했으나 이미 숨진 후였다.
매화검선이 말했다.
“동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먼저 들어간 사람도, 나중에 들어간 정탐무사들도 모두 죽은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하. 어찌 이런 일이······ 고수들이 아니면 수색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박서생이 안색을 굳혔다.
그 역시 동굴을 처음 봤을 때 기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한데 조사를 위해 들여보냈던 백 명의 무사들이 몰살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군웅들의 반응은 달랐다.
기관의 무서움이 오히려 동굴 안에 지존검이 있다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들은 동굴 안에 들어간 무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어서 우리를 들여보내 주십시오. 죽든 말든 각자의 선택에 맡기는 것이 무림 관례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존검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어서 들여보내주십시오. 안 그러면 우리 역시 그냥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군웅들의 항의가 더욱 거세졌다.
만박서생으로서는 결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형산파 장문인 장대선생이 말했다.
“혈교 놈들에 대한 말은 없었으니 동굴 입구를 개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리 기관이 무서워도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모두 들어가 힘을 합쳐 기관을 파괴한다면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짝짝짝.
동의를 의미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만박서생으로서는 이들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자칫 대량 살상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그였다.
“보셨다시피 동굴 안에는 무서운 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혈교 놈들의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군웅들이 모인 것도 놈들의 음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러한 때에 절벽이 무너지면서 이렇게 큰 동굴이 모습을 보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아직 지존장보도의 실체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놈들의 함정 앞에 있는 셈입니다. 지존검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놈들의 계략입니다. 차라리 고수들을 선별해 한 번 더 수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 작전회의에 참석했던 삼백여 고수들은 여러분의 수장들이니, 큰 불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지 않고 삼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면 어떤 불상사가 초래될지 모릅니다.”
“총군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자칫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삼만 명 모두 몰살될 겁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매화검선의 말이었다.
장대선생 역시 동의를 표시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삼백 고수라면 기관의 공격 역시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군웅 중 태반은 별 소속이 없는 무림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은 대부분 약한 편이었다.
각파 수장들이 대표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으나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자, 어제 작전회의에 참가한 삼백 고수분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공평을 기하기 위해 한 번에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나머지는 우리를 기다려주십시오. 무림맹 무사들이 계속 통제를 가할 것이니 절대 허락 없이 함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만박서생의 말에 군웅들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긍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제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지나도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모두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약속해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사문이 따로 없는 고수들도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만박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군웅들이 힘으로 밀어붙여 들어갈 것을 걱정하던 그였다.
그가 지금처럼 직접 막고 있으면 안심할 수 있지만, 지휘부 고수들이 없으면 일반 무림맹 무사들만으로 군웅들을 막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조사를 위해서는 하루면 충분할 것이다.’
만박서생이 눈을 빛냈다.
군웅들 역시 하루의 시간제한 약속을 듣고 진정하는 모습이었다.
삼백 고수들이 기관을 파괴해 놓은 후 나중에 들어가도 자신들에게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장대선생이 물었다.
“총군사님. 모두 보는 자리에서 한 가지 확인을 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만약 동굴 안에 지존검이 있다면 먼저 발견한 사람이 그 소유자가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무림 관례에 따라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존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저는 지존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라 이런 약속을 원했습니다. 어서 들어가지요.”
“좋습니다. 삼백 고수분들은 모두 진입하십시오. 저 역시 들어갑니다.”
와아아.
짝짝짝.
군웅들이 함성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삼백여 지휘부 고수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백자안과 김지혜 역시 상의 결과 들어가기로 했다.
“조심해야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으니까.”
* * *
동굴 속은 미로와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통로가 두 배 이상 넓어져 마치 대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동굴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굴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백자안과 김지혜를 비롯한 삼백여 고수들이 반시진 정도 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거대한 지하 광장 하나가 보였다.
한데 그곳에 시신들이 무더기로 있는 게 아닌가.
모두 이백여 구의 시신들.
무림맹 정탐무사와 앞서 들어간 무림인들이었다.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온갖 병장기의 공격을 다 받은 듯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동굴에서 빠져나왔다가 죽은 정탐무사의 말 그대로 몰살당한 것이다.
“모두 멈추시오!”
선두에 있던 매화검선이 소리쳤다.
삼백여 고수들이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했다.
동굴의 통로는 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하광장에서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공격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만박서생이 일단 원형진을 펼치게 했다.
어디서 공격이 가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방어진을 펼친 것이었다.
광장은 매우 넓어 동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삼만여 군웅들 모두를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총군사님. 어떻게 된 걸까요? 기관이 작동되어 이들이 몰살된 것 같은데······.”
매화검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지하광장은 그들이 지나왔던 통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막혀있었다.
곳곳에 야명석이 박혀 있어 시야는 충분히 확보되었다.
그때였다.
끼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광장을 둘러싼 벽에서 수많은 구멍이 생겨났다.
“모두 조심하시오!”
만박서생이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암기들이 발사된 후였다.
휙휙휙.
화살, 표창 등 수십 가지가 넘는 암기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암기술의 최고봉이라는 만천화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푹푹푹!
“크윽!”
“으윽!”
원형진 바깥에 있던 수십 명이 암기를 맞고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수만 개가 넘은 암기들이라 그들의 몸 곳곳이 찢겨나갔다.
고수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암기들을 쳐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암기들이 너무 많았고 또한 빨랐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백여 명이 쓰러졌다.
삼백여 명 중 삼분지 일이 어이없게 당한 것이었다.
매화검선과 만박서생, 장대선생 등이 장력을 날려 기관 장치를 파괴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암기를 발사하는 구멍들이 파괴되었으나 워낙 많았다.
게다가 한번 파괴된 자리도 새로 구멍이 나타났다.
백자안이 육합장으로 기관들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처음엔 그도 당황해 자신과 김지혜를 방어하기에 바빴으나 피해가 커지자 내공 전부를 쏟아 부은 것이었다.
콰콰쾅.
막강한 회전 장풍에 광장 벽이 그대로 허물어지며 기관 역시 파괴되었다.
아예 벽 자체가 상당한 두께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기관이 재생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암기 공격이 완전히 멈췄다.
다들 백자안의 무공에 놀라면서 부상자들을 살피기에 바빴다.
확인 결과 사망자만 삼십여 명이었다.
암기를 맞아 중경상을 입은 자도 칠십여 명이나 되었다.
하기야 수십만 개가 넘는 암기 공격이었다.
백자안이 아니었다면 전체가 몰살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찌 이런······.”
만박서생이 뜻하지 않은 큰 피해에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백여 명의 고수들은 아직 건재했다.
“무정 사범이라고 하셨소? 정말 대단한 장력이었소. 우리 모두를 살렸소.”
“과찬이십니다. 아직 공격이 끝난 것 같지 않으니 더욱더 조심해야 할 겁니다.”
백자안이 말을 한 바로 그때였다.
그그긍, 소리와 함께 파괴된 벽 사이에서 거대한 지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른 허벅지 두께만 한 크기로 얼핏 봐도 수천 마리가 넘었다.
“독지네다!”
“모두 조심하시오!”
다급한 소리와 함께 독지네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지하광장에 있던 지휘부 고수들을 그대로 덮쳤다.
< [제18장] 지존장보도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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