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장] 구출 2 >
운반선 백여 척이 해남도에 도착하자 예정대로 부녀자 삼만 명을 배에 태우기 시작했다.
왜국 본토로 압송되는 것을 알게 된 부녀자들이 다시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자안은 단목수련과 함께 계획을 점검했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다만 본토로 운반선이 돌아갈 때 배웅을 나가겠다고 이야기해 운송대주 스미치카의 허락을 받았을 뿐이었다.
문제는 부녀자들을 운반선에 모두 태운 후 생겼다.
간수장 아키토미의 말대로 부녀자 백 명을 선발해 해남도에 남겨두기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색이 뛰어난 부녀자를 운송대주 스미치카가 타는 지휘선에 삼백 명가량 태운 바 있었다.
백자안과 단목수련 역시 이 지휘선에 올라타 있었다.
다행히 해신사자들이 타고 있던 해신대 지휘선은 포구에 그대로 정박해 있었다.
다시 말해 백자안과 단목수련 두 사람만 배웅하게 되었다. 해남도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작은 목선 하나가 지휘선 안에 준비되어 있었다.
간수장 아키토미가 부녀자 백 명을 선발하기 위해 지휘선 위로 올라오자, 단목수련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무정 사범님. 어떻게든 이를 막아야 해요. 부녀자들을 구출해간 것을 나중에 알게 되면 남은 부녀자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좋은 방법이 없겠소? 나 역시 이분들을 한꺼번에 데려가고 싶지만, 작전에 차질을 빚을까 그게 걱정이오.」
「운송대주를 부추겨 보세요. 부녀자 백 명을 일부러 남기는 것이 대인자문주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고 말하면 그도 생각을 달리할 거예요.」
「알겠소.」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인 후 스미치카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간수장 아키토미는 미색이 뛰어난 부녀자들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백자안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간수장 저자가 너무하구려. 이렇게 대놓고 부녀자들을 다시 골라간다는 것은 대인자문주님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겠소?”
“뭐 이 정도 가지고······ 삼만 명이나 데려가는데 백 명 정도 남겨두는 것은 상관없소이다. 이번에 본토에 데려갈 계집들은 색공 수련에 쓰일 것이라 그다지 미색이 중요하지도 않고 말이오. 오히려 목표를 초과달성해 문주님께서도 만족하실 것이오.”
“그게 아니오. 해신께서 운송대주를 만나주지도 않은 것도 그렇고, 간수장이 저렇게 대놓고 무례를 범하는 것도 그렇고······ 문제가 있다고 보오. 이 사실이 대인자문주님의 귀에 들어가면 운송대주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오. 무엇보다 지금 부녀자 백 명을 다시 데려가는 것은 간수장의 독단이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오.”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려. 해신의 명이 아닌데도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내 말이 그 말이오. 부녀자 백 명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소. 해남도에 수십만 명이 있는데 어찌 어렵겠소? 게다가 미색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는데, 대인자문 총단에 있는 고수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겠소? 분명 색공 연마에 앞서 딴생각이 있을 텐데, 가장 아름다운 부녀자 백 명을 이곳에 남겨둔다? 자칫 잘못하면 문책을 크게 당할 수도 있을 것이오.”
“으음, 해신대주는 누구 편인데 나를 도우려 하는 것이오?”
“누구 편도 아니오. 다만 간수장 저놈과 최근 좋지 못한 일이 있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은 생각이오.”
백자안이 자신의 수하 두 명이 부간수장에게 죽은 사실을 알렸다.
그 사실은 스미치카도 들은 바 있었다.
스미치카가 설득을 당하는 것을 느끼자 백자안이 쐐기를 박았다.
“운송대주가 나서기 그렇다면 내가 간수장을 저지하겠소. 운송대주는 가만있기만 하면 되오.”
“좋소. 나는 중립을 지키겠소.”
“알았소이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인 후 간수장 아키토미에게 다가갔다.
아키토미는 이미 백 명의 부녀자를 선별해둔 후였다.
백자안을 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를 통해 그가 부간수장 두 명을 죽인 사실을 알고 있는 그였다.
하극상을 벌였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아키토미로서도 별 방법이 없었다.
부간수장들과의 유대도 그렇게 깊은 게 아니고 죽은 해신대 무사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해, 그냥 꾹 참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오?”
아키토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백자안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부녀가 백 명을 다시 데려가려는 것이오? 해신님의 지시가 있었소?”
“명은 없었지만 매일 계집을 상납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해신님은 때에 따라서 하룻밤에 계집 두세 명도 찾으시오. 상납할 계집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아시면 진노하실 것이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소? 계집이 부족하면 다시 잡아들이면 되지 어찌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오? 이 일이 대인자문주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이오? 지금이라도 계집들을 그대로 두고 돌아가시오.”
백자안이 언성을 높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스미치카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아키토미가 스미치카를 쳐다봤다.
스미치카는 못 들은 척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
이는 묵시적인 동의가 아닐 수 없었다.
아키토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계산이 매우 빠른 자로 절대 무리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내가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겠군. 나중에 해신님이 질타하시면 해신대주 탓으로 돌리면 될 테니까.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아키토미가 말했다.
“나중에 해신님이 질책하시면 그 책임을 그대가 지겠소?”
“물론이오. 내가 책임질 테니 어서 돌아가시오.”
“알겠소. 나중에 후회나 마시오.”
아키토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온 간수 십여 명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백자안이 다시 스미치카에게 돌아갔다.
“이제 출발하지요. 우리 두 사람이 반 시진 정도 함께 따라가 드리겠소.”
“하하하. 고맙소. 이번 일은 나중에 문주님께 말씀드려주겠소.”
* * *
백여 척의 운반선이 부녀자 삼만 명을 태우고 왜국 본토로 출발하자, 급해진 것은 백자안과 단목수련이었다.
운송대주 스미치카와 운송관 키리히코가 타고 있는 지휘선에 함께 있었으나, 반시진 후에는 해남도로 돌아가야 했다.
그전까지 부녀자들을 구출해야 하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부녀자들을 남해검파가 있는 복주에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이후 해남도로 다시 돌아와 백자안이 해신 미야모토를 암살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일단 이전처럼 운송대주와 운송관을 죽인 후 우리 두 사람이 그들로 역용하는 것이 최선이에요. 그러면 어떤 구실을 대서 운반선들을 복주로 데려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지휘선에 있는 대인자문 고수들의 무공이 심상치 않은 게 문제이군요.」
단목수련이 백자안에게 전음을 날린 후 배 위에 있는 삼백여 고수들을 쳐다봤다.
스미치카와 키리히코를 둘러싼 그들은 함께 모여 있었다.
백자안은 어떻게든 독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별 구실이 생각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차라리 이자들을 모조리 해치우는 게 어떻겠소? 우리 두 사람이 운송대주와 운송관으로 각각 역용을 해도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이오. 복주까지 간다고 해도 부녀자를 배에서 내리는 과정에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그렇긴 하지만 복주에 가면 우리 편이 있을 것이고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복주를 왜구가 점령했고 작전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면, 우리 명을 거역하지는 못할 거예요. 일단 복주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싸우는 것과 복주에서 싸우는 것은 그 지원 여부에서 큰 차이가 나요. 게다가 놈들을 여기서 모두 죽이면 백여 척이나 되는 배를 우리 두 사람이 어떻게 몰고 갈 건가요?」
「좋소. 일단 운송대주와 운송관 두 놈부터 제거해놓고 다시 생각합시다.」
백자안이 전음을 날린 후 단목수련과 함께 스미치카와 키리히코에게 다가갔다.
“운송대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데로 갑시다. 운송관 역시 함께 갔으면 좋겠소.”
“무슨 일이오? 해신대주. 문제가 있소?”
스미치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니오. 대인자문주님께 직접 보고를 드려야 할 사항이라, 다른 사람들이 들어선 곤란하기 때문이오.”
“으음, 혹시 해신과 관련한 내용이오?”
“그렇소. 어떻게 아셨소?”
백자안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땅한 구실을 못 찾고 있었는데 스미치카가 스스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해신과 대인자문주 두 사람 사이의 알력이 심하군.’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밀실로 갑시다. 해신의 비밀 계획에 대해 알려주겠소.”
“그럽시다.”
스미치카가 고개를 끄덕인 후 키리히코와 함께 백자안과 단목수련을 데리고 지휘실 안에 있는 밀실로 향했다.
그때였다.
대인자문 고수 한 명이 말했다.
“운송대주님. 여기서 말씀을 나누십시오. 해신이 반역을 꾀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데, 굳이 밀실에 가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려. 좋소. 해신대주. 여기서 이야기하시오. 모두 한 식구이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오. 해신대주 역시 해신보다 우리 문주님께 충성을 바치려는 것으로 보이니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있겠소? 어차피 해신대주 그대도 우리 대인자문 출신이 아니오?”
“특급 보안사항이라 그렇소. 수하 중에 해신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런 사람은 없소. 어서 말해보시오. 자꾸 밀실로 가자고 강요하면 나 역시 그대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스미치카가 안색을 굳혔다.
백자안 역시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으나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한 번 더 밀실로 가자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좋소. 사실 해신이 독립을 꾀하고 있소. 이번에 남해검파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대인자문과의 모든 협력관계를 끊고 이곳 중원무림을 독자적으로 공략할 생각이오.”
“그게 사실이오? 본문이 그동안 지원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 반역을 하겠다는 것인가. 해신 그자가 벌써 본색을 드러내다니. 해신대주 그대는 어떻게 우리 편을 들기로 한 것이오?”
“나는 대인자문주님의 무공이 해신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대세를 따르려는 것이오. 다만 지금 내가 한 말은 절대 비밀에 부쳐야 하오. 내가 한 말이 해신의 귀에 들어가면 그날로 바로 죽음이니까. 아, 그리고 아까 특급 보안 사항으로 밀실에서 말해주려고 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대인자문주님에 대한 암살 계획이오. 그것 역시 지금 말하겠소. 그러니까 이번에 남해검파를 점령한 이후······.”
“잠깐!”
스미치카가 급히 백자안의 말을 중단시켰다.
“왜 그러시오? 이곳에서 모두 말하라 하지 않았소?”
“문주님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니, 예외가 필요할 듯하오. 두 분은 우리를 따라오시오.”
“그럽시다.”
백자안과 단목수련이 스미치카와 키리히코를 따라 밀실로 내려갔다.
< [제23장] 구출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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