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대인자문 2
둥둥둥.
“드디어 결승입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는 분이 새 맹주가 되십니다.”
풍류도인의 말에 군웅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
앞선 두 대결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백의무제와 흑의무제가 무공폐쇄를 당한 것이 오히려 대회 열기를 더욱더 뜨겁게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무공을 잃은 두 무제는 깨어나더라도 무림에서 은퇴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 동방무림의 패권은 무명객과 평범서생 두 사람 중 승자에게 돌아갈 것이 거의 확실했다.
“결승에 앞서 두 분께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어느 분이 승자가 되든 상관없이 우리 동방무림의 힘을 모두 모아 대인자문 놈들을 무찌르는 데 최선을 다하실 것을 맹세하십니까?”
“네.”
“네.”
무명객과 평범서생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무명객은 이미 평범서생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평범서생이 대인자문에서 파견한 고수라는 것이 그의 직감이었다.
‘저자의 정체를 확실히 밝히는 방법은 바로 본 얼굴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본신 무공을 어쩔 수 없이 펼치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무공의 경지가 높을수록 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문 법이지. 역용을 풀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무명객이 눈을 빛냈다.
상대를 이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체를 공개리에 밝히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해야 후환이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승부만 내게 되면 패자가 중요 보직을 맡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현 부맹주인 태극검선이 패배한 마당에 그 역시 자리를 내놓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풍류도인의 말에 무명객과 평범서생이 비무대 위에서 자리를 잡았다.
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울리며 시합 개시를 공식으로 알렸다.
대결 방식은 이전과 똑같았다.
누구든 비무대 밑으로 떨어지면 패배였다.
무명객이 담담히 평범서생을 쳐다봤다.
물론 그러면서 무형의 기세를 뿜어냈다.
바로 무형지기였다.
이전 혈심노인과의 대결에서 한번 시험해본 바가 있었지만, 지금은 질적인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서생은 여전히 그 무공 수준이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공격이든 방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러지 않고 일부러 힘을 안배하다가 단 한 번의 대결에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이 점은 평범서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무명객의 무공 수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무명객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대인자문의 문주인 내가 복병을 만났구나. 백의무제 그놈의 무공을 폐쇄했지만, 이놈은 확실히 다르다. 독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설마 무형검의 고수란 말인가.’
평범서생, 즉 대인자문주가 안색을 굳혔다.
그랬다.
놀랍게도 그는 현 대인자문의 문주였다.
따로 이름이나 별호가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며, 동방무림이나 중원무림에는 그저 대인자문주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무공 연마에 보내는 무공광이라는 것만 알려졌다.
대인자문주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무형검의 고수를 제외하고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기세 대결을 벌여본 결과 무명객이 무형검의 고수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초보 수준인 것 같았다.
반면 대인자문주는 이번에 신공 완성으로 유형검의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설사 놈이 무형검을 익혔다고 해도 서툰 무형검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지금 신공을 펼치면 내가 이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본 실력을 모두 보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향후 행보에 큰 차질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상승무공을 익힌 자는 내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할 것이다. 내가 익힌 대인자신공(大忍者神功)은 대인자문주의 문주만 익힐 수 있는 대인자심법(大忍者心法)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기호지세라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의심하는 자는 나중에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대인자문주가 눈을 빛냈다.
결단을 내리니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그의 기세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무명객이 흠칫하며 무형지기를 더욱더 끌어올렸다.
대인자문주 역시 당황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무형검 직전에 달한 그의 공력은 거대했고, 실제 작은 산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가 이처럼 동방무맹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맹주 자리를 노린 것은 바로 중원 무림 정복 때문이었다.
해남도 전투에서 해신방 무사 십만이 몰살당하자, 그의 충격 또한 매우 컸다.
해신방을 이용하여 중원 무림을 절반 정도 석권을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자신은 동방무림을 공격해 초토화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해신방 무사들이 몰살한 마당에 무사들의 수가 모자랐다.
대인자문 이십만 무사가 있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란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래서 동방무림 무사들을 해신방 무사 대용으로 써먹기 위해 이렇게 역용을 해서 동방무맹주가 되려 한 것이었다.
일단 동방무맹주가 되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동방무맹 전 무사들을 동원해 중원무림을 총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전쟁을 벌여 양측이 양패구상하게 되면 그때 대인자문 본진 무사들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동방과 중원 무림 양쪽 모두를 제패한다는 것이 그의 최종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목전에 닥친 시합의 승리에 자신이 없는 그였다.
“무명객이라고 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보아하니 별 소속도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기권을 하면 부맹주 자리를 주겠다. 어차피 새 맹주가 부맹주 인사권도 가지고 있으니까 믿어도 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의 무공이 내 생각보다 너무 높아 부득이 죽여야 해서 하는 말이다.”
“날 이기려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이오?”
“그렇다. 지금 내가 펼칠 무공은 최근에 완성한 신공으로 내가 죽거나 상대가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죽을 수는 없으므로 너는 반드시 죽게 된다. 절대 빈말이 아니니 신중히 판단해라. 두 번 권유하지는 않겠다.”
대인자문주가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가 익힌 대인자신공은 검법으로 표출될 때 가장 큰 위력을 지니게 된다.
평범해 보이던 검이 수십 장 길이의 푸른빛을 뿜어냈다.
기둥 모양의 청광인 그것은 한눈에 봐도 검강이었다.
기수식만으로 검강을 뿜어낸 것이었다. 실제 펼치게 되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지존검법으로 승부한다.’
무명객 역시 지존검을 높이 들었다.
바로 지존검법 중 제 이초식인 지존만상(至尊萬象)을 처음으로 펼치기 위해서였다.
‘지존검만 믿는다.’
무명객이 내공을 불어넣자 지존검에서 금빛이 우러나왔다.
그 길이는 대인자문주가 뿜어낸 푸른색 검강과 비슷했다.
와아아.
군웅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그들로서는 이런 광경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뭔지 모르지만 두 고수의 무공 수위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결국 죽음을 택했구나.”
대인자문주가 천천히 검을 앞으로 내렸다.
푸른색 검강 역시 따라 내려왔다. 무명객의 몸뚱이를 두 동강 내기 직전이었다.
그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하지만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 무명객으로서는 피할 공간이 없었다.
유일한 대적 방법은 바로 맞부딪히는 것이었다.
‘지존만상! 형상이 있는 모든 물건은 사실 모두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기에 가득하고, 가득하기에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이를 지존이라 한다.’
무명객이 자신이 나름대로 이해한 구결의 뜻을 음미했다.
원래 검초의 이름은 무명만상(無名萬象)이었으나, 지존만상으로 직접 이름 붙인 것은 자신이었다.
기억 속의 팔대무공에 붙여진 무명이라는 글자 대신 지존이라 이름 붙인 것은 바로 지존검 때문이었다.
지존검을 얻게 된 것을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래서 팔대무공에 지존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름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존이든 원래대로 무명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이었다.
무명객이 눈을 빛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무형법문이었다.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새로운 의미가 느껴졌다.
그것은 일종의 함의(含意)였다.
무명객이 지금 집중해서 생각하고 있는 글자는 바로 공(空)이었다.
공이라는 글자는 무형법문 전체를 관통하는 핵이었다.
‘공은 바로 실재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공에서 궁극적인 실제가 발견된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 탐욕이 없어 그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아닐까. 결국 무형법문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대자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공 역시 마찬가지다. 한 줌 진기로 천하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의미이지. 차라리 아무 생각을 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이니까.’
무명객이 천천히 지존검을 내렸다.
바로 지존만상 초식의 발현이었다.
지존검법은 각 초식의 겉모습에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별되는 것은 각 초식에 담은 깨달음의 질이었다.
무명객이 무형검의 초입에 올랐으나 아직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바로 덜 익혔기 때문이었다.
학(學)만 있었고 습(習)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 점은 대인자문주 역시 간파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그 빈틈을 메워가고 있었다.
물론 갑자기 무형검 경지가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툰 초보에서 안정적인 초보 무형검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무명객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바로 대인자문주였다.
‘어찌 이런 일이. 이대로 부딪히면 내가 진다.’
그 역시 무형검 직전에 도달한 사람으로 이번 대결의 결과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숨을 보전한 후 다음 기회를 노리는 일뿐이었다.
‘중원삼성이라 했던가.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여야겠구나. 내가 자만했다.’
대인자문주가 급히 소리쳤다.
“내가 졌다!”
순간, 무명객이 지존검을 멈췄다.
대인자문주의 검과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기권을 하는 것입니까?”풍류도인이 급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 무공이 무명객보다 약해 차라리 기권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대인자문주가 말한 후 스스로 비무대 밑으로 내려갔다.
기권패로 그의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와아아.
짝짝짝.
군웅들의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무명객 승리! 이로써 무명객께서 통합된 동방무맹의 신임맹주님이 되셨음을 선포합니다!”
풍류도인의 말에 군웅들이 다시 함성을 질렀다.
무명객이 포권지례로 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상대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직감이란 게 있었다.
“평범서생! 그대는 사실 대인자문의 문주가 아니오?”
“내가 말이냐?”
대인자문주가 흠칫했다.
비무대 밑에 있는 그는 이대로 사라져 대인자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소. 그대의 기운은 대인자문 고수들의 것과 유사하오. 그 정도 무공이라면 대인자문에서 최고일 것이오. 그렇다면 대인자문의 문주가 바로 그대가 아니겠소?”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 비록 오늘 패했으나 기권을 한 것이니 진짜 패배는 아니다. 다음에는 꼭 너와 겨뤄 승리를 거둘 것이다. 다음에 보자.”
대인자문주가 경공을 펼쳐 대연무장을 떠났다.
경공이 너무 가공해 아무도 따라갈 엄두를 못 냈다.
무명객이 그를 쫓아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잡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지만, 일단은 동방무맹의 맹주가 되어 동방무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무명객이 지존검을 높이 들었다.
“하늘의 뜻을 엄숙히 받들어 동방무맹의 맹주라는 무거운 책무를 받아들일 것을 맹세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군웅들의 함성과 박수에 대연무장 전체가 떠나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