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양신 2
늦은 밤.
중원무맹 총단 맹주와 그 식솔이 머무는 지존각에 한 사람이 잠입했다.
지존각 지붕에 올라온 그는 바로 백자안이었다.
계획대로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는 삼의맹주를 직접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스스슷.
백자안이 삼의맹주의 집무실이 있는 곳 위쪽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집무실은 전각의 맨 꼭대기 층이었다.
집무실 옆에는 침실도 함께 있었다.
백자안은 이전에 이곳 지존각의 수리를 할 때 동원되었던 경험이 있어 그 위치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여기로군.’
백자안이 기왓장 하나를 살짝 들어냈다.
그 밑으로 집무실이 보였다.
한데 그 안에 한 사람이 탁자에 조용히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으로 보였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낮에 대연무장에서 봤던 삼의맹주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삼의맹주는 여전히 백자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반면 백자안은 아직 본 얼굴로 회복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깊이 숙고한 결과 지금처럼 전혀 다른 얼굴로 오는 것이 일단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몰라도 단둘이 있을 때는 일단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언제든 역용을 풀 수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일단 혈도를 제압한다. 어쩌면 내가 너무 저자를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다.’
백자안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삼의맹주는 자신의 머리 위에 백자안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백자안이 주저하지 않고 지풍을 날렸다.
바로 지존지법이었다.
이 지존지는 지금 그 위력이 막강해져 상대는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하고 당하게 되어있었다.
휙휙.
지풍이 삼의맹주의 마혈에 찍히기 직전 그의 신형이 움직였다.
쉽게 지풍을 피한 것이었다.
“누구냐?”
삼의맹주가 소리를 치며 천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깥에 들리지 않았다.
백자안이 이런 상황을 대비해 음파를 차단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스스슷.
백자안이 집무실 안으로 내려왔다.
이미 지풍이 실패했기 때문에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일단 대화를 해볼 생각이었다.
지풍을 피한 것으로 봐서 삼의맹주의 무공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일단 진실을 파헤치려는 의도 같았다.
삼의맹주 역시 서둘지 않았다.
“지존지? 예상대로 찾아왔군. 만나서 반갑소. 나의 양신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그것은 바로 삼의맹주의 말 때문이었다.
지존지법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원래 무명지라는 이름을 지존지로 바꾼 사람이 자신이었다. 이후 다른 사람에게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양신이란 말인가.’
백자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나는 양신이 아니라 백자안이오. 삼의맹주 그대는 왜 나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오?”
“역시 양신이었군. 무공 수위도 우리 두 사람이 비슷한 것 같고. 좋소. 싸움을 벌이게 되면 양패구상할 확률도 있으니, 대화부터 나눕시다. 진상을 알게 되면 그대 역시 내 말에 수긍할 것이오. 혹시 오늘 낮에 대연무장에서 나를 봤소?”
“그렇소. 그대의 엉터리 같은 양신 이야기는 잘 들었소. 처음에는 나도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그대의 말이 엉터리임을 깨달았소. 내 무공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어떤 독심술의 결과물일 터. 결정적으로 그대는 내 무공을 전혀 모르고 있소. 가까이서 보니 무공의 근원도 전혀 다른 것 같구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그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상대의 무공을 간파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실은 거리였다.
가까이서 보면 숨소리 등 여러 가지 징표를 통해 상대의 기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특히 백자안의 경우에는 그 능력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삼의맹주가 미소를 지었다.
“내 무공이 완전히 바뀐 것은 맞소. 하지만 분신술을 펼친 후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그렇게 된 것뿐이오. 무형검의 경지에서는 이전의 무공이 전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그대는 어떻게 해야 그대가 양신이라는 것을 수긍하겠소?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그대로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악마로 변할 것이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소. 불완전한 양신의 몸이긴 하지만 조심하면 나름대로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수도 있을 것이오.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소. 어차피 그대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너는 중원삼성과 무슨 관계냐?”
백자안이 분노를 드러냈다.
삼의맹주가 여전히 자신의 행세를 하는 것이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의맹주는 여유가 있었다.
“중원삼성은 내가 제거했소. 그것에 관한 내용은 낮에 들었으리라 생각하오. 아, 물론 그대는 자신이 양신이란 사실을 전혀 수긍하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오. 계속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대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소.”
삼의맹주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백자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단둘이 있으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한데 여전히 자신을 현혹하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군. 내가 보기에 너는 중원삼성이 내세운 최종 대리자인 것 같다. 내게 심리전을 펼쳐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인 것 같구나.”
“어쩔 수가 없구려. 양신은 스스로의 존재를 끝없이 부정한다는 것을 잊었소. 어차피 그대는 인간도 아니니 차라리 깨끗하게 소멸시켜주겠소.”
삼의맹주가 우수를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무형의 경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자안은 지존금광으로 대적했다.
금빛이 그의 몸에서 우러나왔다.
꽈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자안과 삼의맹주 두 사람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윽!”
“으윽!”
두 사람 모두 깊은 내상을 입은 듯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양패구상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우세를 점한 것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백자안이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한 후 삼의맹주의 목에 지존검을 갖다 대었다.
“어서 말해라. 네놈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백자안이다.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네놈이 양신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나를 죽이게 되면 너 역시 죽고 만다. 이미 괴물이 되어 나보다 무공이 조금 강해졌지만, 나를 죽이게 되면 결국 두 사람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우리가 죽게 되면 신선계 반선들을 누가 대적하겠느냐?”
삼의맹주가 지친 모습으로 말했다.
무공으로는 백자안에게 극히 미약하게 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형검의 고수에게는 그 차이는 매우 큰 것이었다.
백자안이 지존검을 들고 망설였다.
이대로 죽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모험할 필요가 있겠구나. 내가 이자에게 당하면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한 차례 몸을 떤 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물론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지존검까지 떨어뜨리자, 삼의맹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삼의맹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지풍을 날려 백자안의 혈도를 찍었다.
“으윽!”
백자안의 몸이 굳어졌다.
마혈을 찍힌 것이다.
해혈법을 믿고 그대로 당해준 것이었지만, 이 역시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으으······ 내가 졌다. 막판에 기혈이 흔들리다니. 역시 내가 양신었던가.”
백자안의 말에 삼의맹주가 품속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먹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어리석은 놈. 나는 네놈이 이런 선택을 할 줄 알았다. 진실을 알기 위해 다잡은 승기를 놓치다니.”
“무슨 뜻이냐? 그럼 내가 양신이 아니란 말이냐?”
“후후후. 그렇다. 너는 스스로 혈도를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연극을 했지만, 지금 그 점혈법은 대라신선이 와도 풀 수 없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나는 독심반선(讀心半仙)이라고 한다. 삼혈맹을 지원하는 반선 중 한 명이지. 중원삼성 그자들이 너무 설치기에 나 역시 연극을 조금 했다.”
“독심반선이라. 그럼 중원삼성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자들은 신선계에 있지. 왜 중원삼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다. 그자들 역시 네놈과 비슷할 테니까.”
“완전히 어리석지는 않구나. 사실 중원삼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놈을 이용했다. 하지만 만년서약에 따라 정식으로 강호에서 활동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무공이 강한 네놈을 최종 대리자로 정하고 모든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너 역시 제거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지금 나처럼 모든 무림인을 신선계로 데리고 가 완전 개조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건 무슨 뜻이냐? 무림인들을 입맛대로 세뇌를 시키겠다는 것이냐?”
“그렇다. 무림인 대다수가 진심으로 따르면 서약에 어긋나지 않고 무림을 다스릴 수 있지.”
“무림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후후후. 궁금한 것이 많구나. 좋다. 네놈이 제 꾀에 넘어갔으니 이야기를 해주마. 우리 신선계에는 우화등선을 목표로 수도하는 반선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한데 우화등선을 위해서 넘어야 할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상세계를 직접 만들어 다스리는 것인데, 이 과정을 거쳐야 보답으로 우화등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무림인들이 표적이 된 것이다.”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있군. 역시 너나 중원삼성이나 모두 주화입마되어 반쯤 미친 것이군. 천혈곡에 왔다던 수백 명의 반선이 모두 같은 생각이냐?”
“그렇다. 우리는 같은 뜻을 가진 반선들로 정심회(正心會)라는 단체를 가지고 있지. 중원삼성과 나는 정심회 회원으로 서로 경쟁하고 있다. 더 설명이 필요하냐?”
“삼혈맹 무리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자들은 중원삼성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을 깨닫고 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소림사 전투는 삼혈맹 수장과 내가 짜고 벌인 일이다. 조만간 삼혈맹 무사들 모두 소집할 생각이다.”
“삼혈맹 무사 중 전사자가 적지 않았다고 하던데?”
“후후후! 어차피 소모품들이다. 삼혈맹 수장들과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지. 내가 전 무림을 통일하여 무림왕(武林王)이 되면 그들에게 제후 자리를 내리기로 약속했지.”
“그들 역시 어리석군. 어차피 그들 모두 죽일 생각이 아니었나?”
“물론이다. 내 적수는 그놈들이 아니라 바로 중원삼성을 비롯한 정심회 회원들이니까. 이 정도 설명이면 되었겠지. 또 궁금한 게 있느냐?”
“내 무공 이름은 어떻게 알았느냐?”
“후후후. 이전에 너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중원삼성이 너를 회유할 때였지. 나의 특기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으로, 네놈의 여러 가지 신분과 중요 기억들까지 알 수 있었지. 그것이 바로 내가 너로 행세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자, 이제 모든 설명이 끝났으니 잘 가라. 어리석은 놈!”
독심반선이 지존검을 들어 백자안의 목을 겨누었다.
그대로 베기만 하면 목이 날아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존검을 내리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자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혈도를 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