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신선감옥 2
다음 날 아침.
백자안은 전날과 같은 자세로 감방 안에 있었다.
물을 비롯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체적 특성상 비록 내공 발현에 제한이 있었지만 물과 음식 없이 오래도록 버틸 수 있었다.
‘오행반선 그자가 말한 하루가 지났다. 천마검을 주지 않으면 정말 악 소저를 해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구나. 오히려 괴수 독이 몸에 완전히 퍼졌다. 해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앞으로 이틀밖에 살지 못하겠군.’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곧 오행반선이 올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던 터라 그 역시 초조한 표정이었다.
자신만의 생사에 관한 것이라면 오히려 초연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악미미의 목숨이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지닌 그였다.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이곳으로 잡혀 온 게 아닌가. 반드시 구출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놈의 뜻대로 천마검을 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문제는 지금 몸 상태로 무영신투술을 발휘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데······.’
백자안이 무영신투술로 피부밑에 있는 천마검을 꺼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내공을 전혀 운기할 수 없어 끄집어낼 수 없었다.
분명 몸속에 있는 것은 알겠으나 이를 확대해서 꺼내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오행반선에게 잠시 내공을 빌리는 수밖에 없겠군. 악 소저를 살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한데 왜 이렇게 안 오지?’
백자안이 쇠창살 밖을 내다봤다.
감방 밖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제 모습을 드러낸 오행반선 외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원래 보통 뇌옥에는 간수들이 배치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최소한 간수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곳 신선감옥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신선계라고 하지만 너무하구나. 명색이 감옥인데 지키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하기야 감방의 벽과 쇠창살이 모두 특수한 것이라 간수들이 필요 없긴 하다. 일단 놈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천마검을 꺼내놓도록 하자. 내공을 빌려달라고 하면 분명 의심을 할 것이니, 그 방법 역시 매우 위험하다.’
백자안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무영신투술을 펼쳤다.
사실 이 무영신투술 등 무명부록에 실린 비술들은 원래 내공이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공이 비록 없더라도 몸에 다른 제한이 없어야 했다.
중독 상태는 그런 제한에 해당했다.
따라서 어떤 비술도 소용이 없게 된 것이었다.
‘차라리 최후의 비책으로 무명폭잠공을 펼쳐볼까?’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몸속의 잠력을 발동하는 무명폭잠공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으로 그동안 여러 번 위기에서 그를 구해줬다.
그래서 이번에도 한 번 모험을 해볼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무명폭잠공 역시 기본 토대는 갖추어야 했다. 지금 상태는 너무 좋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사망할 위험이 컸다.
‘무명폭잠공이 실패하면 오히려 내가 자진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악 소저 역시 위험해진다. 차라리 천력을 다시 한번 느껴볼까.’
백자안이 마지막으로 몸속에 있었던 천력을 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화약 폭발을 온몸으로 막아낸 후 망가진 몸을 천력으로 회복한 경험이 있던 그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밤새도록 그 천력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천력이 몸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다른 공력은 중독 때문에 억제되어 있었으나, 천력은 아예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쉽게 사라질 천력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일주천을 해보자. 무명심법으로 운기하는 게 불가능하니 마음으로······.’
백자안이 자신의 마음을 보았다.
바로 관조(觀照)였다.
시간에 쫓기기 때문일까.
이전보다 훨씬 더 집중력이 생겼다.
사실 이렇게 마음으로 기를 돌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무형검의 원리가 비록 내공과는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기존의 내공을 바탕으로 한 기의 흐름에 무형검의 원리가 가미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존의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괴수 독으로 인해 기본적인 토대마저 무너진 상태였다.
백자안으로서는 오직 마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백자안은 천천히 이전에 익힌 무형법문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법문들의 의미는 대부분 깨우치지 못한 상태.
한 자 한 자가 너무 심오해 애초 그 모든 것을 터득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에 단전을 생성하는 것이었다.
배꼽 아래 기해혈이 아닌 마음에 단전을 만드는 것.
그것은 사실 무형검 중에서도 최고 단계인 지성에서나 가능했다.
백자안 역시 그동안 이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용기를 내 한번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음자리에 천력이 있을지 모른다. 천력의 흐름을 쫓아가면 마음의 단전을 생성할 수도 있으리라.’
백자안이 더욱더 집중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느낌상 하나의 점이 생성되었다.
그 점은 마음의 중심에 있었다.
‘사물의 이치는 자세히 살펴야 하고, 마음은 넓게 가져야 한다. 넓은 마음으로 집중하면 그 중심을 볼 수 있으리라.’
백자안이 눈을 감았다.
순간, 빛 하나가 보였다.
백자안이 상상 속이지만 손을 뻗어 그 빛을 만졌다.
만져보니 구슬과 같은 것이었다.
‘천상여의주와 비슷하구나.’
백자안이 천상여의주를 떠올렸을 바로 그때.
피부 속에 감추어 두었던 천상여의주가 서서히 움직이며 심장 쪽으로 향했다.
백자안이 깜짝 놀랐으나 그대로 두었다.
무영신투술로 물건을 몸속에 보관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의 몸속에 그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가상의 공간에 따로 물건을 보관해두는 것인데, 그 공간을 따로 볼 수 없어 몸속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물건이 실제 축소되는 것 또한 사실 느낌에 불과했다.
‘지금 보니 무영신투술이 특수 이동대법과 그 원리가 비슷하구나. 조금 더 연구하면 나 역시 특수 이동대법을 펼칠 수도 있을 듯하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뜻하지 않은 깨달음 때문이었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이형환위처럼 제한이 없는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선들이 백만이나 되는 대인자문 무사들을 이곳 신선계로 이동시킨 것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동시킬 대상의 절대적 축소 개념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원리를 더욱더 깊게 연구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마음의 단전에 집중할 뿐이었다.
‘천상여의주가 마음의 단전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내 가슴 속으로 그 보관 장소가 바뀐 것 같구나. 다시 몸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완전히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마음의 한 장소가 보였다. 그곳에 천상여의주가 자리한 것이 보였다.
‘천상여의주가 제 자리를 찾았군. 다만 실제 마음의 단전이 생성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상여의주가 자리 잡았으니 천력 역시 이제 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백자안이 신중하게 천상여의주를 이용해 일주천을 시도했다.
순간 한 가닥 청량한 기운이 흘러나와 몸 전체를 돌았다.
‘아, 천력이다.’
백자안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러한 성취에 머물지 않았다.
내친김에 천상여의주가 자리한 마음자리를 원래 단전 자리 기해혈과 연동을 시켰다.
그렇게 되면 무명심법을 통해 제대로 천력을 생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존의 내공과 무형공력 역시 함께 발전하게 될 것이었다.
백자안은 그 모든 힘을 하나로 뭉쳐 동시에 운공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성공한 다음 눈을 떴다.
곧바로 무명심법을 운공해보니 막힘이 없었다.
일주천을 하자 괴수 독 역시 해독이 되었다.
혈도 역시 무명점혈술을 펼칠 필요도 없이 풀려버렸다.
‘성공이다.’
백자안이 천천히 일어났다.
움직임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오히려 몸이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명심법을 운공했다.
그 결과 무명심법 단계가 한 단계 더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십성이었다.
‘뜻하지 않게 기연을 만났구나. 십일성과 십이성은 꿈의 경지라 할 수 있으니, 내가 실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최대치로 달성한 것 같다. 비록 마음의 단전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천력을 계속 쌓아 내실을 기하면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반선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최고의 경지인 지성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뜻하지 않게 무공이 상승한 것이었다.
비록 한 단계 오른 것이었지만 그 위력은 이전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최소 열 배에서 최대 백배까지 강해진 것 같구나. 이제 괴수 독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십성의 경지.
십일성과 십이성은 대부분 이론적인 단계였기에, 실제 강호에서는 십성을 대성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구성과 십성의 차이는 매우 컸다.
그것은 미완성과 완성의 차이였다.
백자안은 무명심법뿐만 아니라 팔대무공과 비술 등 다른 무공 역시 십성에 달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똑같은 십성이라도 그 완숙의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었다.
‘아직은 반선들 모두를 상대하는데 많이 부족할 것이다. 당분간 그들의 합공을 피하면서 천력을 쌓아간다면 나중에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백자안이 가부좌를 한 채 이번에는 무영신투술로 몸속에 보관한 물건들을 꺼내 살펴봤다.
지존검, 천마검, 무자천서, 천상여의주 등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모두 그대로 있었다.
특히 천상여의주는 우려와 달리 이전 모습 그대로였다.
‘천상여의주 자체는 변함이 없었구나. 다만 그 기운이 마음으로 흘러갔고 천력을 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궁금한 것을 알려주던 그 효능은 그대로 일 듯하군. 물론 잘 대답을 안 해줘서 탈이지만······.’
백자안이 천상여의주와 지존검 등을 다시 몸속으로 넣었다.
피부 안으로 넣는다고는 하지만 그 순간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제는 더욱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직 몸속에 넣어두지 않은 것은 천마검과 무자천서 두 가지였다.
천마검은 오행반선이 올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무자천서는 이전과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살펴본 결과 이전처럼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인가. 다만 나의 무공 경지가 높아져 뭔가 다른 느낌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천천히 연구하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무자천서 또한 몸속에 넣어둔 후 감방 안을 살폈다.
혼자 힘으로 감방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벽에 귀를 대어 옆 감방에 진짜로 악미미가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감방을 둘러싼 벽은 보통 벽이 아니었다.
재질이 남달랐다.
‘신선계에서 나는 돌로 만들어진 것인가. 음파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구나. 기감 역시 전혀 느낄 수 없다. 역시 신선계는 만만히 볼 곳이 아니구나.’
백자안이 석벽을 찬찬히 만져봤다.
자신의 힘으로 부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알기 어려웠다.
백자안은 벽면을 조사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번에는 쇠창살을 살폈다.
하지만 쇠창살 역시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부수는 것은 나중에 시도해도 된다. 가장 시급한 것은 악 소저를 구출하는 것이다. 일단 오행반선 그자를 기다려봐야겠군.’
백자안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발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백자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천마검을 다시 몸속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