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장] 복사천회 3
다음날. 저잣거리.
중앙 공터에 만들어진 널찍한 처형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정오에 실시하기로 공고가 난 처형식 때문이었다.
서장무맹 진영에 포로로 잡힌 사천무림연합 무사 천 명의 목이 오늘 잘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도 안팎이 그 일로 종일 떠들썩했다.
하지만 이미 성도를 비롯하여 사천성 전역은 서장무맹이 장악한 상태.
당장 이렇다 할 지원병력을 보내줄 곳도 없었다.
물론 사천성과 하남성을 제외한 다른 성들은 아직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의 침공을 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 역시 많은 무림인이 삼의맹에 차출되어 전사한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이 강남과 강북 무림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양쪽 모두 섣불리 세력 확충을 도모하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내실을 다져 각기 사천성과 하남성에 착실히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한 가지 재미있는 추측을 하였다.
양 맹이 세력 확충을 미루고 있는 것은 바로 실종 상태인 백자안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양 맹 중 어느 곳이든 먼저 전선을 확대하는 쪽에 백자안이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었다.
만약 그 분석이 맞는다면 양 맹 중 어느 한 곳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양 맹 모두 어부지리를 얻기 위해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였다.
반면 그 때문에 오히려 양 맹의 교두보 공고화 작전은 더욱더 치밀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항 세력의 기미가 보이면 발본색원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의 처형식이었다.
누가 봐도 오늘 처형식은 숨어 있는 복사천회 무사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들의 숫자가 오백에 불과하나 어떤 계기가 되면 그 폭발력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직도 많은 무림인이 사천성 전역에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구름처럼 모여드는 군웅 중에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흑도 무림인들처럼 대놓고 병장기를 차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기도가 남다른 사람이 적지 않게 보였다.
그들 중에는 복사천회 무사들도 있었다.
군중들 속에 숨어든 그들은 병장기를 봇짐이나 품속 등에 교묘히 감춘 채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 명령을 내릴 사람은 바로 복사천회의 군사 태을선생이었다.
백자안은 당기, 정진도인 등과 함께 처형장에 와 있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이 수만 명이 넘어서는 바람에 오히려 발각될 위험이 적어졌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복사천회 무사 중 지휘부 고수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왜 아직 놈들이 오지 않을까요?”
당기가 긴장된 안색으로 물었다.
태을선생이 처형장에 설치된 단상을 보며 말했다.
“곧 올 겁니다. 아마도 사람들을 일단 모아두고 포위하려 할 겁니다.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이지요.”
“아, 그럼 우리가 벌써 포위된 것인가요?”
“네. 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우리가 나서지 않는 한 특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관건은 어르신의 무공 수준입니다. 어르신께서 놈들을 일각 정도만 잡아둬도 포로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겁니다.”
“하기야 놈들을 모두 제압한다면 포위망 자체가 무력화될 테니까.”
당기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백자안을 쳐다봤다.
오늘 구출 작전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 희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만큼 오늘 백자안의 기도는 비범했다.
아직 내상이 절반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상황에 맞게 다시 일시 몸 상태를 특별하게 만들어 둔 그였다.
‘지존금광으로 승부를 본다. 동심원의 크기는 무한대로 넓힐 수 있으니, 파괴력을 조금 약하게 하는 대신 그 영향력을 확대한다면 일시 놈들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십만 명 이내만 오면 된다.’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몸속의 천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였다.
천력은 일반 공력의 결정체이자 무형공력까지 포함한 것으로, 그 파괴력은 측정 불가였다.
백자안 본인 역시 이 천력의 효능에 대해 아직 거의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백자안이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서장무맹 무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당문 쪽에서 대오를 갖춰 처형장 쪽으로 오고 있는 그들은 대략 오십만 정도였다.
사천성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서장무맹 무사들을 제외하면 성도 내에 주둔하고 있는 놈들이 거의 모두 온 것이었다.
“큰일 났군.”
태을선생이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서장무맹 무사들이 처형장 전체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웅들의 수를 십만 정도라고 볼 때 그 다섯 배의 무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구출 작전을 포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복사천회 무사들의 이탈은 없었다.
태을선생 역시 중과부적이라고 판단되면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포로들은?”
정진도인이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속한 청성파 무사들이 포로로 많이 잡혀갔기에 그들을 찾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서장무맹 무사들 사이에서 특수 포승줄로 포박당한 사천무림연합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새끼줄에 묶인 굴비처럼 긴 포승줄로 연결된 그들이 처형대 위로 끌어 올려졌다.
군웅들이 술렁인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공포 분위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둥둥둥.
“오늘 처형식을 주관할 분을 소개해 드리겠소. 바로 우리 서장무맹의 총군사 만통자님이시오.”
짝짝짝.
서장무맹에 투신할 생각을 하고 있던 흑도무사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나머지 군웅들도 마지못해 하며 박수를 보냈다.
“하하하! 예상대로 많이 모였군.”
단상에 오른 만통자가 득의한 표정으로 군웅들을 쳐다봤다.
이어 서장무맹의 십대장로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어르신. 놈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많아야 만 명 정도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충 봐도 오십 만에 가깝습니다. 이 정도면 성도에 있는 놈들의 주력이 거의 모두 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서장무맹의 병력은 대략 백만 정도.
그중 절반은 성도에 있었다. 나머지는 사천성 각지에 퍼져 각각 그곳 무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데 성도에 있던 주력이 거의 모두 이곳에 오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의 무공이 성도 밖으로 파견된 자들보다 높다는 것까지 고려할 때 오백 명밖에 되지 않는 복사천회 무사들이 감당할 병력은 절대 아니었다.
“오십만 대 오백이라. 천 배인가?”
백자안이 중얼거렸다.
사실 아까부터 주위 음파를 차단하고 있어 그들의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우려는 없었다.
“네. 놈들이 작정하고 온 것 같아요. 어쩌면 이놈들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듯해요.”
당기의 말에 태을선생, 정진도인 등 복사천회 지휘부 고수들의 안색이 더욱더 굳어졌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백자안이 말했다.
“당기 이 아이의 말이 맞소. 놈들이 처형할 사람은 비단 저들만이 아니오. 우리가 구출 작전을 펼치지 않아도 어차피 공격을 받을 것이오.”
“어르신.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야 뭐, 할 수 없지 않겠소? 원래 계획대로 할 수밖에. 하지만 놈들이 우리 말고 죄 없는 다른 사람들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작전을 좀 변경하긴 해야겠소.”
“어떻게 말입니까?”
“사람들에게 놈들의 의도를 알리고 함께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오.”
“아!”
“아!”
태을선생, 당기 등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백자안의 능력을 완전히 믿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실 이는 백자안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구나. 지난번 청성벌 싸움처럼 독 기운을 지존금광에 섞어야겠다. 워낙 놈들의 수가 많아 위력이 약해지겠지만, 반 시진 정도 놈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몸속에 있는 독 기운을 다시 분리해서 뿌릴 준비를 했다.
내상이 덜 회복된 상태인 데다가 적들의 수가 많아 이번에는 바로 살상하기 힘들 것 같았다.
다만 혈도를 찍은 것처럼 놈들의 공격력을 일시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최대시간은 바로 반시진이었다.
물론 그 반시진 동안 놈들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백자안의 몸 상태 또한 최악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서둘러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내가 놈들을 제압하면 포로들을 구출해 도주하도록 하시오. 곧바로 따라가겠소.”
“알겠습니다.”
태을선생이 고개를 숙였다.
압도적인 적의 전력 때문에 그가 애초 계획했던 계책은 지금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오직 백자안의 무공이었다.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 예상이 다를 수도 있으니 좀 더 지켜봅시다. 물론 놈들이 단 한 명의 우리 무사라도 처형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네. 어르신.”
태을선생, 당기 등이 눈을 빛냈다.
백자안이 우리 무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연대 의식을 드러내자 고무적인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다시 북소리와 함께 집행패를 든 만통자가 소리쳤다.
“죄인들을 모두 대령했느냐?”
“네. 총군사님.”
이번 처형의 실무적인 책임자인 집행관이 대답했다.
만통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처형대 위를 쳐다봤다.
벌써 천여 명의 사천무림연합 포로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처형 준비!”
집행관의 명이 떨어지자, 긴 칼을 들고 있던 집행무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 수가 무려 천명이었다.
아무래도 단 한 번의 처형으로 포로들을 모두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스스슥.
숙달된 동작으로 천여 명의 집행무사들이 포로들 뒤에 섰다.
칼을 높이 들고 있어 명이 떨어지면 곧바로 목을 벨 기세였다.
당기, 태을선생 등 복사천회 무사들이 급박한 표정을 지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백자안은 태연했다.
그는 집행패를 들고 있는 만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처형 직전입니다.”
태을선생이 급히 말했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집행패가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니까.”
“네.”
태을선생이 대답한 그때였다.
만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집행패를 들고 있었다.
그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제 집행하겠다는 표시 같았다.
하지만 군웅 중에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지난번에 백자안에 의해 죽임을 당한 환희대불에 이어 새롭게 서장무맹 태상장로가 된 혈안대불(血眼大佛)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총군사. 아직 복사천회 놈들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벌써 처형할 생각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하지만 이렇게 해야 놈들이 나타날 것이오. 놈들이 나타나면 장로들께서 모두 제거해주시오.」
「알겠소. 하지만 아무래도 놈들이 겁을 먹고 나타나지 않을 것 같소. 만약 그럴 경우에는 정말 여기 모인 놈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오?」
「그렇소이다. 어차피 여기 온 놈들 대부분은 심정적으로 우리에게 저항하는 놈들이 태반이오. 잠재적 저항 세력이 될 수 있으니 아예 모두 씨를 말리라는 것이 맹주님의 명이시오.」
「으음, 어차피 죽을 놈들이군. 알겠소. 어떤 경우이든 우리 장로들과 장로전 무사들이 선봉에 설 것이오.」
「고맙소. 만약 복사천회 놈들이 끝내 나타나지 않고 처형이 끝나면, 태상장로께서 다른 장로들과 함께 이곳에 있는 모든 중원 놈들을 깨끗하게 말살 시켜 주시오. 혹시 숨은 고수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방심은 하지 마시오.」
「물론이오. 백자안 그놈이 이곳에 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맹주께서도 그놈 때문에 이 많은 무사를 데리고 가라고 하신 게 아니오?」
「그렇소이다. 오늘 이 자리에 백자안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은 서불마신께서 직접 맹주님께 하신 말이오. 게다가 한 달 전 청성벌 전투에서 우리 무사들과 괴수들이 몰살당한 것도 놈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오. 솔직히 오백 명밖에 안 되는 복사천회 놈들이 중요할 게 뭐가 있겠소? 우리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은 백자안이오. 두 마신께서도 본맹과 서장무맹 양 맹 중 먼저 백자안을 죽인 쪽을 최종대리자로 삼을 생각이신 것 같으니, 우리 임무가 막중하오. 그럼 바로 집행패를 던지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