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장] 영웅맹 1
[제56장] 영웅맹
정탐을 나갔던 대장군 이장락이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은 백자안이 장사성주가 되고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유관성에 이어 장사성의 주요 인물이 또 죽은 것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백자안이 난감해했다.
관부 무사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이장락이 아니던가.
한데 성주가 된 후 그와 제대로 인사도 못 해보고 잃게 된 것이었다.
총관 담대선생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이전 성주님과 마찬가지로 호남성에 이미 침투한 놈들에 의해 당한 것 같습니다.”
“대장군이 이끄는 정탐부대가 기습을 당한 곳이 악양 근처라고 했습니까?”
“네. 아무래도 호북성을 통해 놈들이 진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담대선생의 말에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옆에 앉아 있는 절대황녀와 황룡선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양은 장사성에서 약간 북쪽으로 호북성 접경 지역에 있었다.
물론 악양 역시 호남성에 속하는 여러 성 중 한 곳이었지만, 일차 방어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백자안이 담대선생, 절대황녀, 황룡선생 세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용 가능한 무사들의 수는 삼십만 정도.
장사성 관군 이십만.
절대황녀와 황룡선생이 이끄는 무사가 십만 정도였다.
“놈들이 악양을 점령하게 되면 이곳 장사 역시 위험해집니다. 우리 역시 악양으로 무사들을 보내 놈들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황룡선생의 말이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모레 있을 영웅대회 때 무림인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림인들 역시 서장무맹의 공격이 임박한 마당에 우리를 돕겠습니까? 이곳 장사성에서 서로 협력체계를 갖춘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백자안의 말에 황룡선생 역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황군 역시 우리를 토벌한 후 영웅대회에 참석한 무림인들을 공격하려 할 겁니다. 이번에 새롭게 결성될 무림맹 지휘부 고수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일단 힘을 합쳐 황군을 격파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설득한다면 동맹출정이 가능할 겁니다.”
“공주님 의견은 어떠합니까?”
“저 역시 황룡선생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거꾸로 서장무맹의 공격이 먼저 예상되면 오히려 우리가 먼저 무림맹과 힘을 합쳐 놈들을 상대해야 할 거예요. 상호주의를 적용하는 것이지요.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지만 그러한 점도 고려해야 할 거예요.”
“좋은 의견이십니다. 공주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정탐부대를 확장해 놈들의 동태를 더욱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백자안이 정리를 했다.
절대황녀가 아닌 그가 회의를 주재하게 된 것은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백자안을 전면에 내세워 천하 각지 성주들의 호응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얼마 후 작전 회의를 마치려 할 바로 그때.
무사 한 명이 취의청 안으로 들어왔다.
“영웅맹(英雄盟)에서 임시 지휘부 고수분들이 왔습니다.”
“영웅맹?”
백자안이 의아해하자, 담대선생이 말했다.
“이번 영웅대회 때 결성될 맹의 이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직은 가칭에 불과하지만 삼의맹이 유명무실화된 지금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새 이름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어서 모시고 오시오. 안 그래도 미리 만나 상의를 하고 싶었는데 잘되었습니다.”
* * *
“죽림거사(竹林居士)라고 합니다.”
“천룡자(天龍子)입니다.”
“광무대제(狂武大帝)라고 합니다.”
관아에 온 영웅맹 지휘부 고수는 모두 세 명이었다.
적어도 열 명은 넘을 거로 생각한 것에 비해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의 별호를 듣는 순간,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무림에서 은퇴한 것으로 알려진 무림십대고수 중 세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으로서는 절대검신 단목군과 남해기인 이후로 처음 만나는 무림십대고수였다.
사실 그들 세 사람은 은자림 소속으로 최근까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이 멸망 직전까지 몰리자 어쩔 수 없이 강호에 나와 무림인들을 규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도자급 고수의 출현을 바랐던 무림인들은 환호했다.
그 결과 추진된 것이 바로 이번의 영웅대회였다.
물론 이렇게 최후 저항 무림인들이 대거 모이게 된 것이 적들의 계략이라는 말이 많았지만, 무림의 단결을 볼 수 있는 자리라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었다.
백자안, 절대황녀, 황룡선생, 담대선생의 소개 역시 곧바로 이어졌다.
죽림거사 등 삼인이 절대황녀에게 정식으로 예를 표했음은 물론이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고생이 많으시지요?”
“아니에요. 저보다 황궁에 감금되어 계시는 폐하께서 고생하고 계시지요.”
절대황녀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사실 강요에 의한 양위를 하고 구금된 전대황제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과 황궁이 이렇게 함께 겁난에 처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세 사람 중 대표로 보이는 죽림거사가 말했다.
황룡선생이 말했다.
“세분은 이번에 결성될 영웅맹에서 어떤 자리를 맡고 계십니까?”
“딱히 맡은 자리는 없습니다. 다만 영웅대회 추진단의 공동단장을 맡고 있지요. 이번에 영웅맹이 공식적으로 결성되고 맹주께서 선출이 되면, 아마도 맹주님이 직접 저희를 적재적소에 쓰지 않을까 합니다.”
“세분 중 한 명이 맹주직을 맡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따로 맹주를 뽑으려 합니까? 아니면 따로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겁니까?”
“예리하시군요. 기다리는 분이 있긴 합니다.”
“혹시 그분이 바로 삼의맹주 백자안 대협이십니까?”
“네. 비록 삼의맹이 해체수순이 되어 남은 무사들이 거의 없지만, 백자안 대협은 여전히 건재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화입마로 인해 절대마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늘 돌아오셨지요. 이번에도 반드시 복귀하시리라 믿습니다.”
“아! 그럼 영웅맹은 곧 삼의맹을 뜻하는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맹을 창설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은거 고수들을 모을 수 있으니까요.”
죽림거사의 말에 황룡선생, 절대황녀 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번 대패를 당했던 삼의맹의 부활보다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백자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금 무림에서 마신과 반선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고수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백자안이 물었다.
“백자안 대협이 복귀하리라 확신하십니까?”
“성주님이시군요. 늦었지만 정식으로 성주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성주님 취임을 축하드리러 오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군요.”
“아닙니다. 시국이 시국이라 공주님의 명을 받들어 일시 성주 자리를 맡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은 성주보다는 만상서생이 편합니다.”
“예상대로 겸손한 분이군요. 공주님이 전격적으로 성주 직함을 내리신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대 성주님을 시해한 자객을 손수 제거하셨다면서요?”
“네. 놈을 붙잡았는데 그만 자동으로 독이 발작하고 말았지요.”
백자안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줬다.
죽림거사 등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들었다.
하지만 정작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황룡선생이 말했다.
“세 분께서 이곳에 오신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영웅대회에 참가해 여러분과 목전의 위기에 대해 의논하려 했습니다.”
“동맹을 체결하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네. 알고 계시다니 말을 꺼내기가 편하겠군요. 지금 승상이 이끄는 백만 황군이 오고 있어 대책이 시급합니다. 특히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악양 방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회전이라도 귀 측와 동맹을 체결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허허. 사실 저희가 온 것도 같은 목적이었습니다. 다만 저희를 먼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정탐무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서장무맹 백만 무사가 호남성 경계를 넘어 천자산 일대에 포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영웅대회 때 이곳 장사가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생각보다 놈들이 빠르게 진격했군요. 우리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장사성 관군 이십만을 천자산으로 보내 놈들을 막아주십시오. 영웅대회가 끝날 때까지만 버텨주면, 대회가 끝난 후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서장무맹 세력을 궤멸시킨 후에는 당연히 황군들을 상대해야겠지요. 기세를 모아 공격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서장무맹과 황군을 무찌른다면 다시 북진하여 천축무맹 세력을 공격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중과부적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력은 점점 불어날 겁니다. 세상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고수들이 많으니까요.”
“으음······.”
황룡선생의 난색을 보였다.
절대황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상하긴 했지만 서장무맹 무사들의 총공격에 관군들이 동원된다면 그 피해가 막심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면 동맹 체결은 물 건너갈 것 같았다.
“어느 쪽을 먼저 돕는가의 싸움이군요. 무림과 관부가 힘을 합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사실상 최종 결정권을 지닌 절대황녀가 안색을 굳혔다.
겉으로만 보면 먼저 호남성 경계로 들어온 서장무맹 세력을 합공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관군 이십만이 그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면, 남은 병력은 절대황녀와 황룡선생이 이끄는 십만 무사뿐이었다.
“어렵겠습니까? 성주님 생각은 어떠합니까?”
죽림거사가 백자안을 쳐다봤다.
백자안으로서는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관부와 무림이 서로 힘을 합치기를 바랐으나, 이렇게 처음부터 기 싸움을 벌일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으음, 이래서 지휘권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구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영웅맹의 맹주 자리까지 확보해야겠다. 분위기로 봐서 본래 이름으로 복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 실력으로서 맹주가 되는 게 가장 좋을 듯하다. 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천하 각지에서 은거 고수들이 대거 몰려왔을 테니, 그들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실력으로서 승복을 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은 그 후 때를 봐가며 하면 될 일이다.’
백자안이 생각을 마친 후 말했다.
“아무래도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웅대회 전에 서장무맹 놈들이 쳐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은?”
“제 생각이지만 놈들은 무림인들이 이번 영웅대회에 빠짐없이 모이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한데 그 전에 공격을 가하게 되면 일망타진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놈들은 무림인들이 대거 모여 영웅맹을 결성하기를 기다려 그때 공격을 가해올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성주님 말씀도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우리 역시 아직 맹이 결성되지 못해 지원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무림인들이 모일지도 아직 모르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백자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황녀가 급히 전음을 그에게 보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이대로 동맹이 무산된다면 나중에 대회 때도 어려울 거예요.」
「공주님. 제 생각은 일단 장사성에 무사들을 계속 주둔하면서 먼저 공격해오는 적과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웅맹과 힘을 합쳐서 말입니다. 특히 새롭게 선출될 영웅맹주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니, 지금 당장 악양으로 무사들을 보내는 것은 보류해야 할 듯합니다.」
「그 말씀은 악양을 놈들에게 내주자는 뜻인가요?」
「네. 어차피 최종 승부는 이곳 장사성에서 나게 되어있습니다. 전략적 요충지를 잃게 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전력의 분산 또한 이로울 게 없습니다. 특히 서장무맹 세력이 이미 호남성 권역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장사성을 중심으로 싸워야 할 때입니다. 게다가 악양 역시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게 사실이고요.」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절대황녀가 전음을 보낸 후 죽림거사 등 세 명에게 백자안이 건의한 내용을 그대로 제의했다.
죽림거사 등이 서로 잠시 논의한 후 수락을 했다.
“좋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서장무맹이나 황군이나 먼저 장사성에 도착하는 세력에 대해 힘을 합쳐 싸우기로 하지요. 새롭게 뽑힐 영웅맹주께서도 아마 수락하실 겁니다.”
“네. 좋아요. 대회가 차질 없이 진행되었으면 하네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때쯤 장사성이 적들에 의해 포위될 가능성도 배제 못 할 듯합니다.”
“각오해야지요. 어쩌면 배수진을 치는 격이라 더 좋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여러모로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최후의 격전이 될 테니까요. 그럼 모레 대회 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