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장] 중간지대 1
[제57장] 중간지대
장사벌.
장사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이곳 벌판에 새벽부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를 헤치며 서서히 앞으로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백자안이었다.
오른손에 상황보검을 들고 있는 그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영웅맹주가 된 이후 그가 고심했던 작전 계획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처럼 혼자서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지난 사흘간 서장무맹과 황군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
서장무맹과 황군 측에서 의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백자안 역시 무리가 따르더라도 일거에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불완전했다.
사실 완전한 몸 상태라고 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쓰러질 때까지 최대한 놈들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 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백자안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전에 몇 번 펼쳤던 무명폭잠공을 다시 가동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절대마인이 된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힘의 분배와 조절을 통해 지구력을 길러야 한다. 상황보검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명폭잠공을 일으킨 백자안이 상황보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의 내공은 천력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특수 내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 의외로 안개가 짙구나. 지금쯤이면 놈들이 보여야 할 텐데······.’
백자안이 안개에 휩싸인 장사벌을 쳐다봤다.
그 역시 장사벌 내부로 들어왔지만, 안개는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백자안의 시력으로도 그 내부를 잘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 정탐무사들이 서장무맹과 황군 무사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것도 이백만이나 되는 병력이 밀려들고 있다고 했었지.’
백자안이 내공을 끌어올려 눈에 모았다.
그의 시력이 수십 배 밝아졌다.
하지만 특수 안개라 그런지 주위 십여 장 외에는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으음, 놈들이 내가 직접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백자안이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떤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안개가 더욱더 짙어져 백자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래서일까.
백자안은 안개 속에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설마 내가 진법에 빠졌단 말인가. 만약 그게 맞는다면 고도의 환상진법 안에 갇혀 있는 것 같구나.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는 것일까.’
백자안의 발걸음이 다시 신중해졌다.
그때였다.
앞에 있는 안개 속에서 한줄기 음성이 들렸다.
“그대가 이번에 새롭게 결성된 영웅맹의 초대맹주인가?”
“그렇소. 귀하는 뉘시오?”
“후후후! 나는 황궁마신이라 한다.”
“황궁마신? 그럼 귀하가 승상 세력을 사주해 황위를 찬탈한 장본인이오?”
“그렇다. 그게 뭐 잘못되었느냐?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승상을 앉혔을 뿐인데······.”
“승상은 어디에 있소?”
“진 밖에 있다.”
“진? 지금 본인이 진법에 갇혀 있다는 뜻이오?”
“그렇다. 신선안개진이라는 것이다. 모르고 있었느냐?”
“그렇소. 지금 알았소.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오? 정말로 이곳 장사성을 공격할 생각이오?”
“당연하다. 하지만 네놈이 항복하면 아무런 피해 없이 마무리될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거절하겠소.”
“그럼 네놈들 모두는 죽는다. 열을 살리겠다. 마지막 기회이니 잘 생각해라. 하나, 둘, 셋······.”
황궁마신이 수를 세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허깨비처럼 흐릿하게 비치는 한 얼굴이었다.
이전에 소멸한 서불마신과 달리 노인의 것이었다.
백자안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미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압박이 가해질 것은 예상하였다.
다만 황궁마신이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잠깐만.”
백자안의 저지에 황궁마신이 수를 세는 것을 멈췄다.
“후후후! 왜 생각이 바뀌었느냐?”
“그건 아니오. 다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오.”
“무엇이 궁금한 것이야?”
“신선계 일이 궁금하오. 천마신이 부활했다는 게 사실이오?”
“후후후! 교활한 놈. 넘겨짚어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구나. 하지만 좋다. 어차피 숨길 일은 아니니까. 천마신께서는 봉인을 거의 푸셨다. 마지막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아직 준비되지 않아 기다리고 계시지.”
“지존검과 천마검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있소?”
“천음반선의 생사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소. 대답해줄 수 있겠소?”
“물론이다. 먼저 천음반선 그자는 죽었다. 감히 지존검과 천마검으로 천마신님을 소멸시키려 했기 때문이지. 한데 천음반선을 어떻게 아느냐?”
“내 친구에게서 들었소.”
“그 친구가 누구냐? 혹시 백자안 그놈이냐?”
“그렇소. 그는 나의 친구요. 천음반선님에 대해 궁금해 하기에 한 번 물어본 것이오. 한데 어떻게 돌아가신 것이오?”
“후후후! 자업자득이었지. 천음반선을 비롯해 새롭게 가담한 은둔반선 백여 명이 천마신님을 제거하기 위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왔었다. 하지만 천마신께서는 이를 예측하고 미리 준비를 해두셨지. 그 결과 천음반선을 비롯한 은둔반선 모두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으음, 그럼 지존검과 천마검을 제때 사용하지 못한 것 같구려.”
“그렇다. 천음반선 그놈은 두 보검을 가지고 천마신님의 원영을 깨뜨리려 했었지. 하지만 그게 가능해지려면 그 전에 지존검으로 서약의 돌을 내리쳐 진정한 힘을 회복해야 했다. 하지만 놈들은 검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백자안을 만나지 못해서인지 서약의 돌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게 패착이었구려.”
“그렇다. 천마신님을 만나기 전에 지존검의 위력을 강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백자안이 신선계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고 판단해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그랬었구려. 그럼 지존검과 천마검은 지금 어디에 있소?”
“천마신께서 가지고 계시다. 사실 이제 봉인해제가 눈앞에 다가온 것도 바로 지존검과 천마검 덕분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이치를 깨달은 천마신께서 이독제독의 방법으로 봉인을 스스로 해제하는 데 거의 성공하신 것이지. 다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지막 한 가지가 모자라 약간 답답한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 한 가지라 함은?”
“백자안의 피다. 지존검과 천마검이 놈의 물건으로 되었기 때문에 두 보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죽은 놈의 피로 보검을 씻겨내야 하는 것이다. 이후 지존검으로 서약의 돌을 파괴하면 완벽하게 봉인해제가 이루어지게 되지.”
“알겠소. 좋은 정보였소. 한데 그대는 자유롭게 신선계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오?”
“꼭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마신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지.”
“천마신을 제외한 다른 백대마신은 모두 봉인을 풀었소?”
“물론이다. 만상서생이라고 했나? 네놈 역시 백자안 그놈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구나. 또 알고 싶은 것이 있느냐?”
“알고 싶은 것이 많긴 하오. 한데 왜 이렇게 순순히 가르쳐주는 것이오?”
“오해하지 마라. 어차피 죽여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해주는 것이니까. 다만 나 역시 한 가지 묻겠다.”
“물어보시오.”
“백자안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그 친구의 피가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오?”
“그렇다. 천마신께서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고 완벽한 부활을 하셔야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기 때문이다. 내게 정보를 주면 책임지고 목숨을 살려주겠다.”
“거절하겠소. 내 어찌 친구를 배신하겠소? 다만 그 친구가 가족을 염려하는 것을 본 적은 있소.”
“백자안의 가족 말이냐?”
“그렇소. 그들의 행방을 아시오?”
“후후후! 그들은 모두 중간지대로 빠져 사라졌다.”
“중간지대란 어떤 곳이오?”
“중간지대는 신선계 외곽에 있는 신비지역으로 한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 반선들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절대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이오? 그곳에 괴수들이라도 출몰하는 것이오?”
“괴수와 요괴는 신선계 곳곳에 차고 넘친다. 중간지대는 아직 미개척지로 그야말로 신비의 땅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금역이 되었지.”
“그런 곳에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것이오?”
백자안이 처음으로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가족들이 적에게 잡혀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중간지대란 곳이 나타나 그에게 혼동을 주고 있었다.
“후후후! 그런 것까지 내가 설명해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시간이 대충 된 것 같군.”
황궁마신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백자안이 물었다.
“무슨 시간을 말하는 것이오?”
“그런 게 있다. 이제 너의 결정을 말해라. 투항하겠느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겠느냐?”
“내 마음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소. 그대의 제의를 거절하겠소. 절대 투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백자안이 상황보검을 고쳐 잡았다.
일단 황궁마신부터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 같았다.
사실 이번 싸움에 있어 적의 우두머리를 먼저 제거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일이었다.
특히 내심 부담이 되는 반야마신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지금 어서 처리해야 했다.
지금 몸 상태로 두 명의 마신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 이미 장사성이 함락되었거늘 굳이 싸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게 무슨 뜻이오? 장사성이 함락되었다니.”
“조금 전 내게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천축무맹 무사 백만 명이 입성해 완전히 장악했다고 말이다.”
“천축무맹?”
“그렇다. 사실 이번 작전은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그리고 황궁의 합동작전이었다. 우리는 너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았고, 이곳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지. 그 틈을 타 천축무맹 무사들이 입성하는데 성공해 대승을 거둔 것이다.”
“무슨 소리요? 내가 이곳에 머문 시간이 한시진도 채 되지 않는데 어찌 그동안 성을 장악할 수 있단 말이오?”
백자안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황궁마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신선안개진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잊었느냐? 신선안개진 안에서의 한시진은 바깥에서의 하루와 같다. 이미 네가 성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온 지 하루가 지났단 말이다.”
“어찌 그런 일이······.”
백자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궁마신이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줄까? 우리는 이미 네가 백자안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놈이 끝없이 역용을 하고 신분을 감추고 다녔지만, 우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
백자안이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그만큼 큰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소?”
“후후후! 이제 실토를 하는구나. 간단했다. 우리는 독고준과 흑천방주를 영웅대회 때 보내 새로운 영웅맹주가 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
“두 사람의 시체에 남은 무공의 흔적을 보고 알아낸 것이오?”
“그건 아니다. 네놈의 무공이 워낙 특이해 조금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번 당했기에 의심을 지우지는 못했지. 그러다가 네놈의 제자를 통해 마침내 알아낸 것이다. 영웅맹주 만상서생이 바로 백자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화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다만 네놈처럼 섭혼술의 일종을 우리 역시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펼쳤을 뿐이다. 방일화 그 계집은 아직도 자신이 섭혼술에 당한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장사성에 있는 영웅맹 무사들과 관군들은 어떻게 되었소?”
“지난번 삼의맹과의 싸움과 마찬가지로 전멸을 당했다. 생존자들 역시 이전처럼 중간지대로 빨려 들어가 다시 못 올 길을 떠났지.”
“또 중간지대요? 그 중간지대란 곳에 내 가족은 물론이고 삼의맹 생존자와 이번 전투에서의 생존자 모두 들어간 것이오?”
“그렇다. 이제 남은 것은 너를 신선계로 데려가 천마신께 제물로 바치는 것뿐이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