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녹림왕 1
[제60장] 녹림왕
둥둥둥!
“지금부터 녹림대회를 개최합니다!”
와아아.
풍운장원 대연무장에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대녹림이 주최한 이번 대회는 보통 대회와 다르게 밤에 개최되었다.
하지만 사방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 대낮과 다름없었다.
사회를 맡은 사람은 대녹림의 총관 청산객(靑山客)이었다.
“대회에 앞서 먼저 이번 녹림대회의 성격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흘 후 천축무맹 총단에서 벌어질 영웅대회에서 천축무맹과 서장무맹, 그리고 우리 흑도 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맹의 맹주가 선출되게 됩니다. 우리 대녹림은 흑도 무림의 대표로서 이번 녹림대회를 통해 통합맹주 선출대회에 나갈 대표를 뽑고자 합니다.”
와아아!
백만에 가까운 무림인들이 함성을 질렀다.
풍운장원 대연무장에 모인 그들의 수는 주최 측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많았다.
원래는 대녹림 무사 십만에다가 일반 흑도인 일이십만 정도 보태 최대 삼십만 정도로 생각했었다.
단상 위에 앉아 있는 대녹림 수장 녹림왕이 득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어차피 오늘 자리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다.
‘후후후!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언제 토사구팽당할지 모른다. 서장무맹주 불사대불, 천축무맹주 우주존자,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 있는 반야마신 이 자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선 세력이 필요하다.’
녹림왕이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지휘부 고수들을 쳐다봤다.
녹림칠십이채의 채주들과 칠십이 호법 등 주요 고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대녹림 외에도 다른 흑도 방파의 수장들도 대거 참석해 있었다.
그들 역시 대녹림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의 하수인 역할을 하며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의지할만한 배후 세력이 없어 이렇게 대녹림을 중심으로 단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한편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은 이런 움직임을 보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중원에서의 기반을 닦을 때까지 흑도인들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 녹림대회 개최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청산객의 말이 이어졌다.
“녹림대회는 오늘부터 사흘간 매일 밤 이루어집니다. 누구든 도전을 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은 바로 대녹림의 수장이자 녹림칠십이채의 총채주이신 녹림왕입니다. 이미 녹림왕께서는 한 장의 출전권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출전권을 두고 오늘부터 사흘간 대회가 벌어지게 될 겁니다. 그럼 시합에 앞서 지휘부 소개부터 있겠습니다. 참고로 우리 흑도 무림은 영웅대회를 앞두고 단결을 위해 하나의 맹을 결성했으며, 그 명칭은 바로 흑도맹(黑道盟)으로 정했습니다. 흑도맹은 제가 속한 대녹림을 중심으로 이미 천하에 퍼져 있는 수많은 흑도방파들이 가입된 상태로 앞으로 그 소속 문파는 더욱더 늘어날 겁니다. 요컨대 우리 흑도맹은 우리가 받들고 있는 서장무맹과 천축무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주요 무림세력이 된 것입니다. 아, 물론 본맹 역시 사흘 후 영웅대회 때 결성될 통합맹에 흡수될 운명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 흑도맹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독자세력으로 계속 남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와아아!
함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청산객의 다소 과격한 발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두는 어느 정도 계획된 일이었다.
오늘 녹림대회에 앞서 녹림왕이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지휘부에 흑도 세력의 결집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자치권이 필요하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세력 구축 운운은 아직 수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흑도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자 녹림왕 역시 흠칫하는 표정이었다.
‘후후후! 하기야 언제까지 우리가 그자들의 밑에서 지내겠는가. 정파 무림이 멸망한 이상 앞으로 최소 삼 년간은 우리 흑도인들의 세력이 확장될 것이다. 서장무맹이나 천축무맹 세력이 아직 지리적인 낯섦을 극복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없이는 통치할 수 없을 것이다.’
녹림왕이 다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라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자가 있을지 몰라 감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행히 대녹림 지휘부 고수들은 물론이고 다른 흑도방파 수장들 모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녹림왕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단 두 사람이 미미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로 칠십이 호법에 속하는 자들로 바로 왕일과 왕이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왕일과 왕이로 역용한 백자안과 방일화였다.
두 사람은 무사히 풍운장원 안으로 들어왔고, 이렇게 대회장까지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심결에 녹림왕과 눈길이 마주친 백자안이 급히 방일화에게 전음을 날렸다.
「일화야. 녹림왕 저자가 우리를 의식하고 있다. 좀 더 열렬하게 박수를 보내도록 해라.」
「네. 사부님도 장단을 잘 맞춰주세요. 우리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느라 너무 건성으로 호응했던 것 같아요.」
방일화가 전음을 보낸 후 조금 전보다 배는 더 열렬하게 환호했다.
백자안 역시 적극적인 몸짓을 보이자, 그제야 녹림왕 역시 미소를 지었다.
청산객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럼 먼저 흑도맹의 맹주이신 녹림왕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
흑도 무림인들이 함성과 함께 녹림왕을 환영했다.
말 한마디로 슬쩍 흑도맹이 결성되고 그 맹주로 녹림왕이 되었지만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 오늘 대회가 녹림왕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형식적인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수의 도전자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흑도인 중에는 세력을 이루지 않고 낭인무사처럼 홀로 움직이는 자들도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단상 앞으로 나온 녹림왕이 입을 열었다.
“흑도맹주이자 대녹림 수장을 맡고 있는 녹림왕입니다. 오늘 이렇게 천하 영웅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파 무림 놈들이 멸망한 지금 당금 무림은 우리 흑도인의 것입니다. 아, 물론 우리가 받들고 있는 서장무맹과 천축무맹과의 관계도 계속 유지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된 관계가 아닙니다. 앞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대등하게 관계를 구축해 나갈 겁니다. 이번에 통합맹주 출전권을 우리 몫으로 한 장 가져오게 된 것도 다 그 자치권의 일환입니다. 그렇게 알고 앞으로도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일이 있긴 합니다.”
녹림왕이 안색을 조금 굳혔다.
군웅들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한 가지 일이 모두의 가슴을 억누르고 있었다.
“최근 우리 흑도인을 닥치는 대로 주살하고 있는 악마 같은 연놈이 있습니다. 아직 그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그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형제들이 십만 명에 육박합니다. 제가 이번 대회를 통해 여러분의 대표로 확정이 되면 맹세컨대 놈들을 손수 잡아 그 복수를 할 겁니다. 그러니 다들 안심하십시오.”
와아아.
짝짝짝.
엄청난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지난 한 달간 악마 같은 일남일녀에 의해 흑도인들이 무참히 죽어 나간 일은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직접 목격한 자들은 드물었다.
다들 소문만 듣고 있어 그 피해 상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목격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방일화가 눈을 빛내며 전음을 날렸다.
「사부님!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 언제 우리가 악마 같은 연놈이 된 건가요?」
「나도 모르겠다. 일단 지켜보자.」
「네.」
백자안과 방일화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녹림왕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요지는 자신이 중심이 되어 흑도무림을 더욱더 단합시키고 향후 무림의 중심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의 지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장무맹과 천축무맹이 우리를 대신해 정파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공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방적인 복종 관계는 지속하기 어려우며, 그 점에 있어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는 데 합의를 이룬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최근 우리 흑도인들을 대량살상하고 있는 연놈을 제가 아니라도 서장무맹과 천축무맹 측에서 제거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최후로는 반야마신께서 직접 수고를 해주실 수도 있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짝짝짝.
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이제는 도전자를 받아야 할 차례였다.
청산객이 말했다.
“누구든 좋습니다. 녹림왕께 도전하실 분은 나오십시오.”
군웅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 한두 명은 나올 거라는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었다.
이는 사실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이기도 했다.
자칫 도전했다가 녹림왕의 눈 밖에 나면 출셋길이 막히기 때문이었다.
녹립칠십이채주 중 한 명인 상록채주(常綠寨主)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본 채주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도전자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이참에 녹림왕을 출전권자로 합의추대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사흘간이나 도전자를 받기로 한다는 게 너무나 형식적이라 생각했습니다. 녹림왕께서는 이미 흑도맹까지 창설했고 그 맹주까지 되신 분입니다. 도전자를 받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제 생각이 어떻습니까?”
와아아아.
“옳소이다.”
“찬성합니다.”
백만 군웅들의 열띤 지지가 터져 나왔다.
흑도 무림인들이 대거 모인 자리라 그런지 그 기세가 대단했다.
물론 그 중 상당수는 지난 일 년 간 외세 무림의 힘을 등에 업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해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흑도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온갖 냉대를 받았던 그들은 이번 기회에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 가나 예외는 있기 마련.
군웅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합의추대를 하면 뒷말이 많을 겁니다. 차라리 대녹림 내부의 고수 중에 한 명이라도 지목해서 대결을 펼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만 대결은 오늘 하루로 끝내는 겁니다.”
와아아.
“옳소!”
“대찬성이오!”
한 번의 시합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림인들의 심리였다.
녹림왕이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대결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누구를 상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군요.”
“상대는 녹림왕께서 결정하십시오. 누구든 좋습니다만, 최소 대녹림의 칠십이 호법 정도는 되어야 할 겁니다. 아, 물론 칠십이 채주 중 한 명도 괜찮겠지요. 아니면 굳이 대녹림이 아니라도 외부 방파의 수장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본인이 지목하란 말이오?”
“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지목을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으음, 지목이라.”
녹림왕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 위에 있는 고수들을 둘러봤다.
그 결과 외부 고수들은 일단 배제했다.
녹림왕의 눈길을 하나같이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녹림왕의 무공은 최근 엄청나게 높아져 있었다.
백자안을 혼자서 제거하겠다고 하는 것이 허풍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승산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조건이 있어, 자칫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녹림왕 또한 외부 고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대녹림의 고수였다.
관례로 녹림왕은 십 년에 한 번 내부 도전을 받게 되어 있었다.
마교처럼 강자존의 전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녹림왕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지위는 호법과 채주였다.
특히 채주 중 한 명이 녹림왕 자리에 도전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옳지. 저 녀석이 있었지. 왕일 저자가 아까 이번 대회를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참에 깨끗하게 죽여 본보기로 삼는 게 좋겠구나.’
녹림왕이 왕일로 역용해 있는 백자안을 가리켰다.
“왕 호법 그대를 지목하겠소. 그대가 나를 이기면 관례에 따라 새 녹림왕과 흑도맹주가 될 것이오. 아, 물론 통합맹주 선출 시합 출전권도 가지게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