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금지된 술법 3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백자안이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그것도 괴이하게 짝이 없는 목소리라 더욱더 놀랐다.
하지만 백자안은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누구냐?”
백자안이 잠시 멈춰 섰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전방이었다.
삼장 정도 앞에 통로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는데, 아마도 그쪽에서 들린 것 같았다.
백자안이 섣불리 그곳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마계라는 말 때문이었다.
‘설마 마계에서 살수를 보냈단 말인가.’
백자안이 좀 더 변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조금 전 괴이한 목소리 이후엔 또 아무 말이 없었다.
‘괴이하군. 내게 경고를 한 것인가. 경고를 해서 나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 그쪽에 유리하지는 않을 텐데······.’
백자안이 심호흡을 했다.
일단 다시 한번 기감을 펼쳤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호신강기를 최대한 두껍게 한 후에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그였다.
저벅저벅.
얼마 후 길이 구부러지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우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동굴이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입구만이 아니라 동굴 전체였다.
마계 살수의 등장을 예상했던 백자안으로서는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호신강기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집채만 한 바위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모두 튕겨 나가고 있었다.
백자안은 바위들을 튕겨내며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나갔다.
무너지는 벽 사이로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 구멍으로 신형을 빠르게 이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멍 역시 순식간에 막혀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잔해 속에 그대로 파묻힐 것 같았다.
그때 백자안이 생각해낸 것이 바로 특수 이동대법이었다.
사실 처음 동굴 입구가 무너졌을 때 특수 이동대법을 펼쳐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절진이 펼쳐져 있는 경우 특수 이동대법이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있어 계속 전진했었다.
‘어쩔 수 없군.’
백자안이 특수 이동대법을 펼치기 직전.
전방에서 붉은 섬광과 함께 거대한 구멍이 또 하나 생겨났다.
백자안이 흡인력에 의해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그 직후였다.
급히 특수 이동대법을 펼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백자안이 당황했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미지의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백자안이 뭔가를 깨닫고 눈을 빛냈다.
‘동굴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진법에 갇혔던 것 같군. 환상미로진(幻想迷路陣)인가.’
백자안은 자신의 몸이 끝없는 구멍 속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 *
백자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느낀 것은 열기였다.
거대한 열기가 전신을 녹여버릴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으······.”
백자안이 의식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봤다.
열기 때문에 처음에는 눈을 뜨기 힘들었다가 이제야 주위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아!”
백자안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는 온통 펄펄 끓는 용암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용암 한가운데 우뚝 솟아나 있는 바위 위였다.
바위를 둘러싸고 용암이 펄펄 끓고 있었다.
용암이 끓고 있는 거대한 연못 중간에 백자안이 놓여 있는 셈이었다.
용암 연못의 크기는 끝이 없었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암초 위라 할까.
백자안은 이 모든 것이 환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단순한 환영진이 아니었다.
용암에서 느껴지는 그 열기는 실로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통증.
뼈와 살이 타들어 가는 괴로움.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싶었다.
유황불에 타들어 가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 백자안의 몸이 타들어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통증이 같았다.
백자안이 정신이 든 것은 그의 신체적 특징 때문이었다.
금강불괴라 할 수 있는 극한적 외공을 완성했기에 정신은 아직 견딜 만했다.
하지만 그것뿐 내공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고개만 조금 돌릴 수 있을 뿐 일어날 수도 없었다.
용암의 열기가 모든 운공을 막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역용도 풀려 본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자안이 갖가지 방법으로 이곳을 탈출하려 애쓸 때.
예의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마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구천마녀를 죽인 죄를 심판하기 위해 너를 데려왔다. 얼마 후 재판이 열릴 것이니 조용히 있도록 해라.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헛수고하지 말고 말이야.”
“웬 놈이냐? 어서 얼굴을 보여라!”
백자안이 소리쳤다.
“후후후! 그렇게 하지. 나는 이번에 새롭게 사자가 된 이중마인(二重魔人)이라고 한다. 네놈이 죽인 구천마녀는 나의 사매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놈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으나, 마계의 율법에 따라 정식재판을 열게 된 것이다.”
“이곳은 어디냐?”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마계라고. 마계 중에서도 죄인을 심판하는 지옥염화지(地獄炎火池)라고 하지. 네놈은 마계사자를 죽인 대죄를 저질러 이곳에 잡혀 온 것이다. 환상미로진을 이용해 추포한 것인데, 조용히 처벌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중마인이 말을 한 후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용암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마치 허깨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팔다리도 없이 몸통과 얼굴만 있었다. 그것 또한 허깨비와 같이 희뿌연 연기가 뭉쳐있는 모습이었다.
백자안이 자신이 장력을 날려도 그대로 통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쉽지 않겠구나. 저자 말대로 단순히 환영은 아닌 것 같구나. 잡혀 온 것도 그렇고 지금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 실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마계의 힘이 이토록 강력한 것인가.’
백자안이 낙담했다.
무력감을 느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비록 자신이 이곳에 제압당해 있기는 하나 아직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분명 자신은 마혈을 찍힌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인데, 굳이 재판을 연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했다.
‘혹시 아직 나를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인가. 제압은 해두었지만 죽일 수 없는 상태라면 내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자신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중마인은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기만 했다.
물론 통증은 여전히 엄청났다.
분근착골수를 수십 번 당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정신을 차리자. 모든 것은 심마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진짜 환상일 수도 있을 터. 내가 스스로 절망하여 자포자기하면 그때 실제로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백자안은 지금 이곳 또한 환상미로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중마인의 말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기대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을 믿어야 한다.’
백자안이 마음을 다스릴 때.
마침내 스스슷 하는 소리와 함께 허깨비 형상을 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들이 나타난 곳은 용암 속이었다.
용암을 뚫고 솟아난 그들은 품자 형으로 백자안을 둘러쌌다.
이중마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이중마인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계심판관(魔界審判官)님들을 뵙습니다.”
“으음, 저자인가?”
허깨비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계사자인 구천마녀를 죽인 죄를 저질러 율법에 따라 잡아 왔습니다.”
“마제께서 창안하신 마계환상추포진(魔界幻想追捕陣)을 사용할 정도로 무공이 강한 자였던가?”
“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금강불괴지신을 이룬 자라. 어서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진성마신인 우리가 왔으니 결론을 내려줘야지.”
마계심판관 중 주심이라 할 수 있는 허공대마신(虛空大魔神)의 말이었다.
참고로 마계의 진성마신은 일반마신과 구별하기 위해 대마신(大魔神)으로 불리고 있었다.
백자안으로서는 진성마신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세 사람을.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를 제압한 마계환상추포진이란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마제가 직접 만든 진법이라 내가 속절없이 당한 것인가. 진법 하나만 봐도 마제의 능력을 알 수 있겠구나.’
백자안이 마계의 주인이라는 마제를 떠올려봤다.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왠지 언젠가 넘어야 할 큰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정작 현실은 지금 눈앞에 있는 진성마신들을 넘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이중마인의 무공 또한 자신의 아래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본래의 공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승산이 거의 없을 수도 있겠구나. 물론 실제 싸워봐야겠지만······.’
백자안이 의기소침해지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허공대마신이 말했다.
“나는 허공대마신이라 한다. 마계의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진성마신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너의 재판을 맡게 되었단 것을 미리 밝힌다. 먼저 묻겠다. 네가 백자안이냐?”
“그렇소.”
“본계 사자인 구천마녀를 죽인 것을 시인하느냐?”
“그렇소.”
“알겠다. 순순히 시인하니 고문은 필요 없겠군. 만약 부인했다면 팔다리를 하나씩 먼저 잘랐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백자안이 말을 하며 운공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가능했다.
“판결을 내리겠다. 율법에 의해 너를 사형에 처한다.”
“하하하!”
백자안이 껄껄 웃었다.
마계 재판이라 해서 특별할 줄 알았지만, 너무 쉽게 끝나 황당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으면 해라.”
허공대마신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자안 역시 안색을 조금 굳혔다.
상대는 진성마신들이었다.
이번 재판이 처음부터 형식적이었다면 지금의 결과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백자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던 이중마인이 말했다.
“네놈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정식재판에 회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네놈의 특수한 신체 때문이기도 하다. 네놈을 죽이려면 진성마신 세 분 이상의 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금강불괴의 목도 자를 수 있는 보검도 있으니, 너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이중마인이 허공대마신의 허리에 달린 검을 쳐다봤다.
검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그 검은 아직 검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보검이 틀림없었다.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일단 시간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 질문이나 해보는 게 좋겠군.’
“무슨 생각을 하느냐? 유언이 없다면 바로 집행하겠다.”
“십만혈군을 비롯하여 혈교 잔당은 어떻게 되었소? 그대들과 십만혈군은 무슨 관계요?”
“후후후! 시간을 끌려는 것이냐? 좋다. 어차피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대답해주마. 십만혈군은 우리 마계의 후원을 받고 있다. 원래 변변찮은 술법사였는데, 네놈을 유인하기 위해 몇 가지 도움을 주었지. 앞으로 너 대신 무림을 다스릴 것이다.”
이중마인의 대답이었다.
“사람을 돌로 만드는 금지된 술법을 완성하도록 해주었다는 말이오?”
“그렇다. 금지된 술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한데, 그는 마력이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마력을 강화해주는 영약을 준 것이다. 그는 당연히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너는 우리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물론 마계 총군사님의 예지력이 그 힘을 발휘했지. 네놈이 아무리 역용을 했었어도 그분의 예지력을 벗어날 수 없었지.”
“지금 혈교 잔당은 어디에 있소?”
“그들은 지금 제남에 있다. 네가 태산으로 올 때 그들을 제남으로 보냈지. 아마도 지금쯤은 무림대회에 참가한 무림인 모두가 돌로 변했을 것이다.”
“믿을 수 없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자기 한 몸은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군웅들은 달랐다.
엄연히 말하면 그들은 백자안의 수하들이 아닌가.
모두 지존맹주인 자신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이번 출정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만변술사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 돌로 변한 사람들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백자안이 분노를 느낀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의 단전에 한 가닥 기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마력인가. 마계라서 그런지 천마력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