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3. 내 이름 강흑성.
3. 내 이름 강흑성.
“조심해서들 돌아가시길.”
카슨과 정찰대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한 박준은 이내 손을 내리고 침을 뱉었다. 걸음을 옮겨 흑랑성패과 블랙엘프패의 시체더미로 다가갔다. 찡그리고 한숨 쉬며 보다가 기름통을 찾아 와 잔뜩 부었다.
“너희는 기름도 아깝다.”
차갑게 말하며 박준은 새삼스레 기름통을 응시했다.서울폐허지역에서 찾은 것들, 아주 오래전 과거 사람들이 사용한 화석연료다.이걸 사용하는 건 유랑민들뿐이다.아무도 탐하지 않는 것, 이런 때나 쓰는 거다.
“개자식들아, 내 가게를 부순 대가다.”
화이어스틱을 꺾어 불을 붙인 박준은 시체더미 중앙으로 던졌다.기름을 뿌린 탓에 불이 확 솟구친다.몇 걸음 물러나 잠시 응시하다 벨트사이에서 조그만 크리듐조각을 꺼냈다.깨알만한 그것을 불속으로 던졌다.
“워.”
확 커진 불길에 놀라 박준은 뒷걸음질했다.예상한 결과지만 역시 놀랍다.눈꼽만한 크기의 크리듐조각이 발산하는 에너지, 열기가 엄청나다.해가 저물어 가는 초저녁인데 샹그릴라 주변이 한낮처럼 환해졌다.
‘순도가 10도 안 되는 건데. 크리듐, 정말 신비한 물건이야.’
강력하고 순수한 에너지의 결정체, 그것으로 인해 인류의 화성개척은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크리듐을 기반으로 한 반영구동력의 완성, 에너지의 제약에서 탈피한 인류는 화성을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화성이 지구는 아니지.”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피워내며 박준은 중얼거렸다. 무섭게 타오르는 흑랑성패와 블랙엘프패의 시체더미로 다시 다가가며 과거를 더듬었다. 자신도 겪어보지 못한 역사, 삼백 년 전 대전쟁으로 망해버린 지구다.
‘거듭된 이종족과 인간들의 전쟁······’
데바행성인들의 지구침략, 그것은 대전쟁 이전의 또 다른 삼백년 전이다.파괴되고 망한 저희행성을 버린 그들이 지구를 침략해 왔고 백년간의 전쟁 끝에 휴전, 인류와 데바족은 공생을 결정했다. 하지만 결국 깨졌다.
“데바족이 침략해온 육백년 전의 차원전쟁, 그 후로 삼백년이 흘러 다시 대전쟁. 하, 이건 뭐 누가 짜놓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되냐.”
허탈한 독백으로 과거 역사의 의미를 더듬은 박준은 문득 미간을 깊게 좁혔다.
“무림인들이 육백년 전과 삼백년 전에 끼어든 건 정말 신의 장난인거야?”
황당하고 황당한, 이해되지도 않고 믿기도 힘든, 그냥 벌어진 일이었기에 받아들이는, 그 역사는 난해하다.다중우주의 충돌 때문이라는 데, 그것도 이해가 쉽지 않다.어떻든 두 번의 전쟁 때 많은 것들이 끼어들었다.
“이종족들······”
불길을 보며, 저 불 안에서 재가 되고 있는 자들을 생각하며 박준은 새삼 현실을 뜨겁게 삼켰다. 데바족이 침략해 지배하던 행성의 수인족과 이종족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까지도 차원의 틈을 통해 넘어왔다.그렇게 지구는 아수라장이 됐다.차원전쟁이라고 부르는 육백 년 전 첫 전쟁이후로 인류와 데바인들의 공생은 다른 이종족들까지 포함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그 시간이 삼백년을 유지했는데, 평화가 유지됐다.그 후 삼백 년이 지나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났다.또 다른 외계종족의 침공이었다.이름 하여 대전쟁, 그 참혹한 종말의 전쟁은 지구의 평화와 질서, 모든 것을 파괴했다.차원전쟁으로 복원했던 세상을 초토화시켰다.
“프락시안들······!”
새삼 그 무서운 종족을 떠올린 박준은 어깨를 떨었다.육백 년 전 이 데바인들의 침략이었다면 삼백 년 전의 전쟁은 프락시아 행성인들의 침략이었다.그들에 맞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힘을 합쳐 싸웠다.그렇게 지구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갔다.인류와 데바인들을 포함한 이종족연합은 마침내 전쟁에서 이겼지만 지구를 버리고 화성으로 이주했다.핵으로 파괴되고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에서 살수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신비롭게 거대수(巨大樹)들이 자라났다.지구에서 자란 적이 없는 새로운 생명체인 거대수들, 방사능을 빨아들이고 산소를 풀어냈다.그렇게 지구는 숨을 이어냈다.그러나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그들이다.
‘무림인들.’
두 번의 전쟁에 모두 그들이 나타났다.육백 년 전 그들의 출현으로 인류는 데바인들의 정복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무림인들은 무공을 전파했고 십대문파를 이뤄 지도층을 형성했다.그런 일이 거듭 반복된 것이다.
“화성에서 이런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후아.”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박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자신 역시 역사로서 알뿐인 과거를 짐작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고 어려운 일이다.그저 지금 세상이 만들어진 원인이 그것이라는 생각에 사유가 깃들 뿐이다.
“휴.”
재차 한숨을 내쉰 박준은 문득 창고를 돌아봤다.
“근데 그렉 이 자식은 뭐하고 자빠진 거야?”
눈썹을 확 세운 박준은 소리치려다가 기묘한 예감을 삼켰다.아무리 그렉이라지만 일이 이 정도까지 됐는데도 안 나오고 있는 게 뭔가 이상하다.
‘뭐야?’
미간을 좁히고 꿈틀거리던 박준은 멀티워치를 조작해 창고 안 감지기를 작동했다. 생명체의 체온을 감지해 내는 열감지기, 정확히 작동한다.
‘어라?’
두 개의 붉은 점이 보인다.그렉 말고 다른 누군가 있다는 소리다.천천히,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선 박준은 샹그릴라 홀 안으로 들어갔다.
‘쓸 일이 생겼구나.’
바 뒤쪽으로 빠르게 이동한 박준은 장총을 꺼냈다. 유물 같은 과거의 화약총이다.
‘t-rex, 이거면 3미터가 넘은 블루마운틴도 한방이야.’
거대한 장총에 갓난아기 팔뚝만한 탄환을 삽입한 박준은 뒷문으로 나갔다.
* * *
게틀러를 멈추라고 지시한 카슨은 음울한 어둠이 내리 덮이고 있는 주변을 살폈다. 모니터로 보는 것으론 성이 안차 해치를 열고 고갤 돌렸다.
‘사방에 숨어 있는 것들이 있는데······’
수림이 우거진 사방, 숨결과 기척이 느껴진다. 이종족들과 잔류유랑민들, 괴수들과 맹수들, 지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지구의 현 주인들이다.
‘화성인이 된 원래 지구인들이 버린.’
지구는 그런 곳이다.거대수들이 방사능을 없앴지만, 그래서 이렇게 원시림들이 퍼져 다시 녹색이 됐지만, 과거와 함께 버린 행성이다.이곳엔 온갖 위험한 것들이 득실댄다. 그런 곳에 다시 돌아와 살 이유는 없다.
‘그래도 괜찮은 곳이야.’
카슨은 미소를 피워냈다.오늘 샹그릴라 박준과 거래한 크리듐을 생각하니 그렇다.화성박스 하나 가득 든 그것의 가치는 엄청난 것이다.못해도 삼천가구가 쓸 전기를 생산하는 양이다. 그걸 금화 원박스에 샀다.
‘원박스, 금화 백 개에 샀으니 횡재한 거지.’
박준이 가치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원박스가 아니라 텐박스는 요구했을 거다.그건 금화천개, 충분히 그 정도의 가치다. 화성으로 가져가면 텐텐까지는 못 받아도 텐 하프텐은 받을 수 있다. 그건 금화 천오백 개다.
‘파이브박스 정도는 팀원들에게 나눠주고 텐은 내가.’
금화천개, 그 가치가 줄 행복을 상상하며 카슨은 흡족한 미소를 피워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우고 현실에 집중했다. 도망중인 반화성조직의 생존자, 그 어린놈을 잡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명예가 걸린 일이다.
‘우린 레드스콜피온. 이미 보고를 했으니 끝을 봐야 해.’
정찰대에게 실패란 없다.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을 내야 한다.
“가자.”
해치를 닫으며 내린 카슨의 명령을 따라 이십 명의 정찰대를 태운 게틀러는 북으로 달렸다. 어둠과 합쳐진 수림은 바람 속에 괴수처럼 꿈틀댔다.
* * *
“그렉! 엎어져라!”
창고문을 열자마자 박차고 들어간 박준은 소리쳤다. 매머드도 잡는 총 t-rex를 육중하게 겨누고 부릅뜬 눈에 살기를 드리운 채 그들을 봤다.
‘뭐야 저 모습은?’
창고 안에서 자신을 보는 두 사람, 타이그란 직원 그렉과 그 앞의 어린 인간이다. 열두어살 됐을까싶은 남자애다. 얼굴과 몸이 바짝 말랐다.
“앗, 사장님,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렉이 바로 반응하며 손사래를 친다.뭐가 아니라는 건가, 박준은 알아들었다.자신이 장총을 겨누고 살기를 발산할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다.그렇게 보인다. 저 어린 남자애는 아무리 봐도 위협이 될 존재가 아니다.
‘어?’
t-rex를 내리려던 박준은 흠칫했다.어린남자애가 손에 쥔 것이 뭔지 알아서다.크레몬, 폭탄이다.계란만한 크기의 납작한 원형 동전 같은 것, 하지만 계란을 터트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경 십미터를 휩쓴다.
“그거 버려!”
박준은 총을 겨누며 격하게 소리쳤다.그 반응에 눈을 치뜬 그렉은 비로소 알았다.청년이 손이 크레몬을 쥐고 있다는 것을, 저걸 터트리면 그렉 자신과 사장 박준은 날아간다는 것을.안 죽는단 소리가 뭔지 알았다.
‘저놈!’
그렉 자신의 손에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거다.크레몬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하다.절대로 안 죽는다는 소리는 저걸 품고 나온 소리다.
“야야! 그러지 마! 우리 사장님이야!”
그렉이 소리쳤지만 청년은 크레몬을 쥐고 단호하게 말한다.
“총 먼저 치워.”
박준이 그렉에게 화를 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저놈은 뭐야!”“아 그게요, 하 이거 참.”
당황과 놀람으로 우물거리면서 그렉은 생각했다. 사장 박준이 다가오는 기척과 문을 여는 것도 느끼고 있었지만, 무공을 익힌 자신은 당연한 거지만, 청년은 다르다. 무공이랄 게 없다. 그런데 반응은 기민하다.
“야! 너 뭐야?”
그렉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박준이 위협적으로 총을 겨눈 채 물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총구를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존재, 청년이 대답했다.
“강흑성.”
정체를 물어봤는데 돌아온 대답, 그렇지만 진정한 정체를 말한 게 맞다. 누구나 가진 이름, 그것만큼 근원의 정체성을 품은 것은 없으니까.
* * *
강력한 충격 속에서 카슨은 모니터를 봤다.퓨리엔트족이다.숲의 사냥꾼으로 불리는 호전적인 종족, 표범 대가리의 놈들, 사방에서 총질이다.
“저것들이!”
라이피언 족답게 그라온이 흉성을 드러낸다. 사자가 표범에게 공격당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 분노를 무시하고 카슨은 외부를 살폈다.
‘대략 육십여개.’
열 영상으로 파악한 빔 섬광의 숫자는 그쯤이다. 하지만 더 될 수 있다.
‘퓨리엔트족······’
흉포하고 호전적이지만 전술에 능한 놈들이 퓨리엔트족, 귀신대가리로 불리는 정찰대의 게틀러를 공격했을 때는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소리다.
“벌컨.”
카슨의 짧고 명료한 명령에 대원들은 눈빛을 칼날처럼 번득였다.이어진 수신호에 따라 천산마갑슈트의 전투력을 최대치로 올리고 소총을 잡았다.이제 벌컨이 사방으로 불을 뿜고 난 직후 뒷문을 열고 나갈 것이다.
“발포.”
카슨의 냉정한 음성이 나오자마자 게틀러의 사면에서 벌컨 포신이 튀어나왔다.육연장의 포신은 맹렬한 소리로 돌아가며 빔을 퍼부어냈다.그렇게 게틀러의 사방 수림이 초토화 되어 갈 때 대원들이 튀어나왔다.
* * *
“그거 계속 가지고 있을 거냐?”
불안한 눈으로 박준은 물었고 청년은 대답 없이 서늘한 눈빛만 내고 있다.손에 쥐고 있는 크레몬, 저걸 어쩌지 못한 채 총을 내린 게 후회된다. 그러라고 한 그렉을 줘 패고 싶다. 그런데 저 놈의 신세도 참 기구하다.
‘반화성조직에게 잡혀 살았다니, 그것도 오년동안이나.’
그렉이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들어 사정을 알게 됐다.놀라운 건 열두어 살이 아니라 열여덟 살이란 것이다.저 외모는 정말 놀라울 뿐이다.
‘아무리 잡혀 있는 동안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해도······’
속생각을 밀어내며 박준은 현실을 물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정찰대가 널 추적하는 거라면서?”
그렉이 돌아봤지만 박준은 냉정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정찰대가 쫓는 도망자와 엮이고 싶지 않다.”
애처롭게 마른 얼굴의 청년은 서늘한 눈빛을 순간적으로 번득이고 일어섰다.그게 대답이고 결정이란 것을 그렉과 박준은 알았다.그래서 각자가 다른 생각을 품는 그때였다. 창고문을 향해 가던 청년이 쓰러졌다.
“어?”
그렉은 눈을 치떴다. 쓰러진 청년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서다.
“야! 뭐야? 왜 그래?”
바로 달려가 청년을 살핀 그렉은 박준을 돌아보고 말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렉의 호랑이 눈을 보고 인상을 구긴 박준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손에 그거부터 치워!”
청년이 움켜쥐고 있는 폭탄, 크레몬을 뺀 그렉은 청년을 안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