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1. 마검의 주인.
11. 마검의 주인.
“쿠웩!”
선지피를 토혈하며 묘진위는 전신을 부들거렸다.
‘빌어먹을, 개처럼 굴러 이렇게 나무를 등지고 주저앉아 있구나······!’
나무, 신수라고 부르는 거대수들이 차지한 지구에 아직 남아 있는 소나무다. 대견함과 고마움을 느낄 새 없다. 총격에 솔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저놈······!’
붉은 엘프, 레드파운틴족은 검의 마성을 이미 깨웠다.레드파운틴 족의 비술로서 그리 했다.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처음부터 마검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거다.어떤 목적인지 모르지만 마검을 필요로 하는 거다.
‘가라레······!’
레드파운틴족의 전설이다.붉은 하늘, 그것이 도래하면 세상을 레드파운틴족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전설, 그 하늘을 열 신인이 강림한다는 이야기다.저놈이 그 전설을 말했다. 그렇다는 건 저놈의 목적이 그거다.
‘미친.’
토혈로 범벅된 입을 비틀어 묘진위는 웃었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다를 바가 없다.신교의 염원인 패천마천을 이루기 위해 검의 자취를 찾아 다녔다.그것을 마침내 찾았다.그런데 이 꼴이 되고 말았다.쾅, 얼굴 옆을 강타한 총격에 묘진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초점이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고 보니 붉은 엘프가 휘청거리는 게 보인다.원인은 로봇의 총격과 거기 합해진 다른 자들의 빔건 발사, 필사적이다.
“익!”
빔건의 난사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거대괴수사냥총의 탄환을 크라폰은 검으로 후려쳤다.하지만 그 충격을 몸이 못 이겨 뒤로 밀린다.워낙 강력한 총이기도 하지만 지금 몸 상태가, 마인과의 접전 때문에 그렇다.아니 그보다는 마검의 근원에너지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다.
‘강적을 물리치고 저런 놈들 따위에게!’
분노와 수치심으로 크라폰은 새 힘을 끌어냈다.정말 생각지도 못한 강적, 마교의 후예를 쓰러뜨렸다.이제 남은 것들을 처리하고 떠나면 된다.태백천군이 봉인했다는 패천마혈의 눈을 찾아내면 모든 게 끝인 거다.
‘모조리 죽인다!’
살기와 의지를 발산하며 크라폰은 걸음을 냈다. 미친 듯이 날아오는 빔과 총탄의 사이를 파고들며 검풍을 일으켰다. 이제 거리는 10m 남았다.
“저, 저놈, 죽여!”
패닉반응으로 박준은 빔건을 발사했다.그렉도 호랑이 눈을 치뜬 채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그렇지만 에너지 탄창이 다 비어가는 데도 붉은 엘프는 쓰러지지 않는다.이젠 휘청거리지도 않고 귀신같이 달려온다.
“피, 피해!”
박준이 소리치는 그 순간 붉은 엘프가 벼락처럼 쇄도해 왔다.혈광을 발산하는 마검을 일직선으로 찔러냈다.그대상은 공교롭게도 강흑성이다.앞을 막아선 삼백이가 탄창을 갈아 끼우는 찰나, 섬전의 공격이다.
‘흣!’
빔건을 발사하다 눈을 치뜬 강흑성.이 절체절명의 찰나에 눈앞에 스쳐가는 것이 있다.한 남자다.맨손 맨몸으로 적들을 쓰러뜨린다.괴수와 모든 야수족과 무인들, 그들의 사이에서 무인지경으로 죽음을 안긴다.
‘무원진경.’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 이 순간의 깨달음이 시키는 대로 강흑성은 움직였다.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마검의 검신은 두 손으로 합장해 잡았다.
팟.
촛불이 꺼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마검은 멈췄다.강흑성의 심장 앞에서, 정확하게 3cm를 남기고 검극이 멈췄다.그 날을 잡은 강흑성을 붉은 엘프가 경악한 눈으로 본다.그렇기는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뭐, 뭐?”
크라폰이 내야 할 반응을 박준이 내던 그 순간, 삼백이가 장총을 크라폰의 머리에 겨눴다. 거의 동시에 뒤쪽에서 카슨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크아아!”
남아 있는 왼손으로 슈트의 검을 뽑아 잡은 카슨은 크라폰의 머릴 내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엘프 크라폰은 삼백이가 겨눈 총신을 후려치고 강흑성의 복부로 발을 내질렀다. 그 움직임으로 카슨의 검을 피했다.
‘큭!’
복부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강흑성은 뒤로 물러났다.붉은 엘프의 발길질을 피하지 못한 건 자신의 반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죽음이 임박한 공격에 절로 반응한 몸, 그 직전에 떠오른 남자와 무공.
‘이게 뭐야? 누구야?’
치켜 뜬 눈을 흔들며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는 강흑성의 앞을 삼백이가 막아섰다. 그 앞에 붉은 엘프가 카슨을 공격하는 광경이 보이고 있다.
‘두 동강을 내 주마!’
의지를 삼키며 크라폰은 마검을 그었다.카슨의 전투대검을 피하는 동시에 휘돌린 몸으로 이어내는 반격, 벼락같은 그 공격이 혈광을 피워냈다.공격받는 당사자인 카슨은 필사적인 반응으로 내려친 검을 올렸다.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몸짓.그런데 붉은 빛의 검이 전투대검을 가르고 들어온다.수수깡처럼 찰나에 가르고 왼 옆구리를 두부처럼 갈라 들어왔다.
‘헉.’
형용하기 힘든 섬뜩한 감각에 카슨은 경직했다.그렇게 상대를 봤다.붉은 엘프, 레드파운틴족, 그의 눈동자가 핏물이 가득 찬 것처럼 붉다.흔들리고 있다.눈동자만이 아니라 얼굴이, 몸까지도 경련을 보이고 있다.
“이······”
미약한 외마디를 흘려내며 카슨은 동강난 검을 손에서 놓치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붉은 엘프 크라폰도 단혈보검을 쥔 채 같이 주저앉았다.
“뭐, 뭐야 저거? 왜 저래?”
박준의 놀란 반응처럼 그렉도 뜨거운 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빔건을 발사할 생각 같은 건 잊은 채로다. 뭔가 이변이 생긴 걸 직감한다.
“크어어······!”
붉은 엘프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거린다, 그런데 그건 카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박준과 그렉은 당황과 놀람의 눈으로 주춤거렸다.
“내, 내, 이름은······ 크라폰······ 레드파운틴족의······ 영광을······!”
부들거리는 경련 속에 처절한 목소리를 흘려낸 자.크라폰이란 이름을 밝힌 붉은 엘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온몸에서 정혈이 빨려나가기 시작했다.그것이 움켜잡고 있는 마검으로 들어가고 있단 것을 모두가 알았다.
“저, 저 검이!”
박준은 기함하며 뒷걸음질쳤다.경악한 그의 눈이 보는 것처럼 단혈보검은, 아니 마검 페천마혈은 크라폰의 정혈을 모조리 빨아들여 섬뜩한 혈광을 발산하고 있다.크라폰은 마른 장작처럼 변해 옆으로 쓰러졌다.
“으어어······!”
똑같은 일이 이어지고 있다.이번엔 카슨이다.왼 옆구리를 가르고 들어간 마검이 혈광을 꿈틀거린다.그때마다 카슨의 정혈이 빨려나간다. 크라폰처럼 카슨의 모습은 미라처럼 변해갔다.그런데 그 상황이 멈췄다.
“헛!”
그렉이 경악에 찬 외마딜 내고 박준은 얼어붙었다.강흑성이 마검을 움켜잡았기 때문, 카슨의 몸에서 뽑아냈기 때문이다.검이 울부짖고 있다.
귀를 파고드는 소리.아니 영혼을 찢어발기는 것 같은 이소리가 뭔지 묘진위는 알았다.패천마혈이 우는 소리다.이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삼백년 전에 사라진 전설이기에 알 수 없지만, 저건 그것이다.
‘무슨!’
후들거리는 몸을 경직한 묘진위는 다리를 세웠다.의지를 배반하며 쓰러지려 몸을 억지로, 사력을 다해 움직였다.3m 앞에 떨어진 언월대도를 지팡이처럼 의지해 잡고 일어섰다.후들거리는 몸을 그렇게 옮겨 갔다.
‘패천마혈이······!’
울부짖는 소리.영혼을 파고들어와 난도질 하는 것 같은 저 울음은 마검의 반응이다.뭔지 모를 흥분과 충격과 자각으로 인해서다.그게 기뻐서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르지만 그렇다는 걸 안다.그걸 봐야 한다.
‘신교의 영혼들이······!’
쓰러질 듯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묘진위는 샹그릴라 홀 앞에 다다랐다.출입구 앞의 데크 위로 엎어지듯 주저앉았다가 처절한 얼굴로 일어섰다.그렇게 홀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봤다.마검을 움켜잡은 젊은이를.
‘패천마혈을!’
혈광을 무시무시하게 발산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마검 패천마혈.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머리위로 올린 젊은 사내는 얼굴에 호피무늬가 있다.타이그란, 정확하게 하프타이그란이다.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검이, 패천마혈의 혈광을 젊은 사내가 흡수하고 있다.파동치듯, 아니 심장이 벌떡이듯 혈광이 출렁거리며 패천마혈에서 뿜어져 나오는데, 그것이 젊은이의 움켜잡은 두 손을 통해 들어간다. 전신이 혈광에 물들었다.
‘도대체 뭐야!’
이해할 수 없는, 보면서도 놀랍고 믿을 수 없는 기사, 묘진위는 주저앉았다.
* * *
“그러니까, 레드파운틴족이 이렇게 만들었다?”
마주보기 힘든 악마족의 눈동자, 데바족 정찰본대 대장의 시선을 회피하며 박준은 공손이 대답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카슨 팀장이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 마검이 폭주해서 붉은 엘프가 저 모양이 됐습니다만, 죽은 줄 알았던 마인이 달려들어서 가지고 도망친 결과지요.”
시선을 내리깐 박준을 브라이튼은 서늘한 눈길로 응시했다.샹그릴라 라는 이 술집 겸 숙박업소의 영상녹화시스템은 파괴됐다.게틀러의 벌컨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전적으로 목격자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
‘카슨 팀 대원들의 바디캠영상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동강나고 쪼개진 정찰대원들, 그들의 슈트에서 수거한 바디캠 영상들은 접전 순간의 충격적인 광경을 보여줬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 붉은 엘프가 검을 휘둘러 빔을 가르고 정찰대를 도륙했다. 그는 혼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브라이튼은 좁힌 미간을 꿈틀거리며 붉은 엘프의 시체를 내려다 봤다.카슨이 다급하게 지원요청을 하며 외친 말, 단혈보검을 가진 레드파운틴족에 의해 전멸상태라는 거였다. 이 현장은 정말로 그렇게 생긴 거다.
‘그렇게 됐는데 정작 이득을 취한 놈은 따로 있다?’
인간 무인, 마교의 후예라는 놈이 단혈보검을 가지고 도망친 거다.그놈은 처음부터 단혈보검, 아니 마검을 추적했던 놈으로 붉은 엘프를 뒤쫓아 왔다 했다.검을 쟁탈하려는 그 자리엔 야수족들도 끼어 몰살당했다.
‘마검이 정혈을 빨아먹어서 저렇게 됐다······’
다시 찌푸린 미간으로 붉은 엘프의 사체를 내려다본 브라이튼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저 모습이 된 카슨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여서다.그나마 안 죽은 건 마인이 검을 뽑아가서라 한다.
‘나머지를 안 죽이고 검만 가지고 도주한건······’
마인의 상태가 그랬다는 거다.붉은 엘프와 싸우다 죽을 만큼의 부상을 입었고, 그래서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일어나 검을 취해 도망갔다.그래서 여기 이자들, 샹그릴라의 주인과 직원들은 멀쩡하게 서 있다.
“운이 정말로 좋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연 박준은 데바족 정찰본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외뿔이 돋아난 악마 같은 얼굴의 데바족을 새삼 느끼며 뒷말을 이어냈다.
“도망친 마인이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이렇게 숨을 쉬고 있진 못할 겁니다. 그자는 검을 취해 여길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 같은 자들이야 사나 죽으나 신경 쓸 거리가 아니겠죠.”
말해 놓고 박준은 다시 데바족 정찰본대장을 힐긋 봤다.
‘으, 저것들 얼굴은 정말로 적응 안 돼.’
흉포한 야수족들도 두려워하는 데바족, 그야말로 악마의 형상이다. 강철갑옷을 입은 것 같은 강인한 육체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영혼의 존재다.육백 년 전 차원전쟁으로 지구를 침공해온 존재들, 이젠 한 식구다.
‘삼백 년 전 프락시안족 침략으로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젠가 데바족은 다시 전쟁을 일으켰을 거야. 저것들은 원래가 그런 것들이니까.’
데바족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삼키는 박준에게 물음이 건너왔다.
“마인이 가져간 검이 단혈보검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나?”
미간을 순간적으로 꿈틀했던 박준은 바 앞에 서 있는 강흑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릴 뻔했다. 그 반응을 붙잡고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정확한건 어떻게 알겠습니까? 검을 두고 싸운 자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걸 들려드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눈으로 목격한 것은 거짓이나 환상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 검은 게틀러를 가르고 정찰대를 저렇게······”
뒷말은 차마 더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박준, 그가 시선으로 가리키는 정찰대원들의 사체를 향해 브라이튼은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저것이상의 답이 없다. 그 누가 천산마갑슈트를 입은 정찰대를 갈라버릴까.
“그래, 그게 뭐든 확인하면 되겠지.”
혼잣말 같은 목소리를 흘려낸 브라이튼은 몸까지 돌리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송골매를 날리고 진돗개를 풀어서 반드시 찾아라!”
정찰본대의 대원들은 바로 명령을 이행했다. 정찰대의 눈인 비행로봇 송골매를 날렸고, 코와 귀가 되는 충견로봇 진돗개를 수림으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