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2화 (13/172)

혹성강호. 12. 과거, 전설, 그리고 형제.

12. 과거, 전설, 그리고 형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다니······”

창백한 안색으로 묘진위는 시선을 돌렸다.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어려운 몸 상태, 하지만 목숨을 건졌다.힘겹지만 숨을 쉬고 팔다리도 붙어있다.

“원래 아무도 안 들이는 곳인데······”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박준을 그렉이 기묘한 눈으로 흘겨봤다. 자신과 강흑성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고 가끔 손님을 받는 곳인 게스트하우스, 그 밑에 이런 지하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종의 방공호 같은 거다.그렉의 눈길을 느낀 박준은 얼른 변명의 말을 꺼낸다.

“야, 일부러 숨긴 건 아니라······ 에이, 내 집 갖고 내 맘대로 하는 거지 이렇게 변명까지 해야 돼?”“누가 뭐랍니까?”“너 그 눈은 뭔데? 왜 사람을 그렇게 보는 건데?”“내 눈 갖고 내가 보는데 뭘 그럽니까? 호랑이족 눈이 원래 이렇습니다?”“뭐가 원래 그래! 타이그란족 중에 그렇게 치사하게 흘겨보는 놈이 어딨어!”“치사하게 흘겨봐요? 이 눈이요? 아 좋아요, 그럼 대놓고 흘겨보겠습니다.”“아니 이자식의 신분질서를 흐리면서 뭐하자는 거야!”“신분질서랴뇨! 사장이라고 갑질하지 마십시오!”

박준과 그렉의 기묘한 언쟁을 보던 묘진위는 아무 말없이 있는 강흑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프타이그란이지?”

주먹이라도 날리려던 박준과 그걸 가소롭게 받아내려던 그렉은 움직임을 멈췄다. 마교 후예 무인 묘진위와 강흑성에게 눈길을 돌리고 침묵했다.

“맞습니다.”

강흑성이 담담히 대답하자 묘진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존재를 만났군.”

하프타이그란, 정말로 희귀한 존재다. 뭣보다 강흑성처럼 저렇게 평상시엔 알아볼 수가 없다. 마검을 잡았던 그 순간에야 드러났던 존재다.

“그렉 너는 알았지?”

박준이 다시 그렉을 쏘아봤다. 알면서 왜 속였냐는 거다.

“아 뭐 그건······”“그래놓고 나를 그런 눈으로 흘겨봐?”“음.”

박준과 그렉의 신경전을 무시하듯 묘진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검의 이름은 패천마혈이다.”

눈 부라리던 박준과 그렉은 다시 시선을 모으며 침을 삼켰고, 강흑성은 이어 나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교, 마교라고 부르는 우리가 만들어낸 신병이 그것이다.”

내상으로 창백해진 얼굴에 엷은 미소를 피워내며 묘진위는 허공을 응시했다. 아스라한 눈빛, 자신이 아는 것들, 비밀과 전설과 진실을 말한다.

“삼백 년 전 이 땅에 프락시안족이 침략해 왔지. 그러나 그 이전에 중원은 침략 당했다. 그 무서운 종족에 의해 세상이 망해가고 있었지. 그래서 우리 신교는 프락시안 족을 물리칠, 세상을 구할 병기를 제작했지.”

그것이 바로 패천마혈이라는 소리, 묘진이 자신도 선대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 내면을 말한다.

“강호에서는 마교가 저주받은 마검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해서 그들의 정혈과 영혼을 검에 불어넣었다고 했지.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검에 자신을 녹여 넣은 이들은 바로 신교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세상을 구하려 했지.”

박준은 근질거리는 입을 꾹 참았다.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마교의 입장에서나 할 소리고, 다른 자들의 눈으로 보기에 마교가 만든 마검은 세상을 구원하는 병기가 아니라 마교의 염원을 이룰 병기인 거지. 그래서 태백문의 태백천군이 그렇게 한 거고.’

전설 같은 이야기, 박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묘진위는 계속 이야기했다.

“신교의 고수들은 프락시안 족을 물리치는 데 모든 것을 바쳤다. 그 용기에 감화된 중원무림인들도 뜻과 힘을 합쳐 싸웠지. 마침내 십만대산에서 만검산장을 필두로 한 중원무림연맹과 신교는 손을 잡고 프락시안 족과 최후의 접전을 벌렸다. 그 싸움에서 밀린 프락시안족은 도망쳤지.”

아는 이야기다.그들은 지구로의 길을 열었다.그때에 중원의 무인고수들이 밀려들어왔다.그중에 태백문의 태백천군이 마교주에게서 마검을 취해 마성을 잠재워 단혈보검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전설이 된 역사다.

“기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가 아닌가 말이야?”

묘진위는 허탈한 미소를 흘려냈다. 무엇이 그런지, 기묘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뭔지, 박준과 그렉은 미간을 좁혔고 강흑성은 지켜봤다.

“지구는 육백년 전에 이미 데바족의 침공을 받았어.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했지.”

묘진위의 시선을 받은 그렉은 콧등을 움찔거렸다. 야수족들이 같이 살게 됐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변화였다.

“그런 세상이 삼백년이 흘렀는데 다시 또 침공을 받은 거야, 이번엔 프락시안 행성인들, 중원을 침공한 족속이지. 그들을 따라 중원무인들이 이 세상으로 넘어왔고. 삼백년을 거듭하며 생겨난 일, 이해하기 어렵지.”

박준이 아는 체 하며 입을 열었다.

“에, 그건 다중우주이론에 따라서 그 중원이 그 중원이 아닌 별개의 중원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고, 육백년 전엔 초전도연구소의 실험이 원인······”“누군가 장난친 것 같은 일이야.”

박준의 말을 무시하듯 자르고 묘진위는 제 말을 뱉었다. 박준이 쓴 침을 삼키는 표정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했다.

“육백년에 걸쳐 두 번 넘어온 무인들, 그들은 같은 세상에서 온 존재들이 아니었지만 같은 신념과 가치를 가졌기에 동종의 뿌리를 찾아 융화했지.”

그랬다. 지구인들과 같이 프락시안족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고 마침내 몰아냈다. 삼백년간 이어온 십대문파의 균형은 전쟁을 통해 부침을 겪었지만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제 화성으로 이주한 핵심의 세력이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차가운 눈빛을 흘려낸 묘진위는 차가운 음성을 이어냈다.

“외적을 맞아 목숨을 바치고 영혼을 합해 싸운 이들이지만, 그 위기와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나면 다른 마음이 생기게 되지, 그게 사람이야. 화성으로 간 문파들, 패천마혈을 알게 되면 서로 차지하려 할 거야.”

차지하려 하는 그 일이 어떤 건지 박준과 그렉과 강흑성은 알아들었다. 외적과의 전쟁처럼 죽고 죽이는 치열하고 무서운 싸움, 탐욕의 전쟁이다.

“패천마혈은 마성이 깨어났다.”

묘진위는 강흑성의 앞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장검.세상이 단혈보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신교의 보검이다.그런데 어딜 봐도 보검이나 마검으로 안 보인다. 그저 칙칙한 철검이다.

“신교의 고수들이 영혼을 바쳐 불사른 힘, 그것이 깨어났는데 사라졌어.”

검에서 시선을 든 묘진위는 강흑성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눈길을 따라 그렉과 박준도 강흑성을 바라봤다. 둘은 침을 삼켰고 묘진위는 말했다.

“젊은이, 그대가 패천마혈의 힘을 먹어치웠어.”

그 순간이다, 삼백이가 밖에서 보낸 신호가 지하실을 울렸다.

“접근자가 있다! 정찰본대가 돌아왔는지도 몰라!”

소리치며 박준이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 * *

“넌 뭐야?”

으르렁거리는 울림의 말.당장 달려들 것 같은 거대한 존재를 올려다보며 삼백이는 장총을 겨눴다.붉은 빛을 내는 눈동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거대괴수사냥총 t-rex가 제대로 된 대상을 제대로 겨눈 거다.총구를 응시하고 있는 존재는 평균 신장 3미터의 거인족 움바바다.흉악하게 주름진 민대머리 얼굴이 일그러진다.바위 같은 주먹은 꿈틀거린다.

“부숴버리기 전에 총 내려라.”

움바바족은 칼을 느릿하게 움켜쥐었다. 움바바족의 상징과도 같은 커다란 칼, 작두를 연상케 하는 직도는 흑빛에 가까운 쇠빛의 날을 번득인다.

“누가 빠른지 해볼까?”

움바바족은 안면을 실룩거린다.그런데도 삼백이는 물러서거나 총을 내리지 않는다. 붉은 빛의 눈동자를 빛낼 뿐이다.그래서 움바바족의 눈동자엔 흉성이 빛난다.칼을 후려치면 삼백이의 몸뚱이는 두쪽이 될 것이다.

“쇳덩이 새끼가!”

움바바족이 자제를 잃고 칼을 후려치려는 그때, 박준이 소리쳤다.

“삼백아 물러나라!”

다급히 소리치며 달려온 박준은 삼백이의 장총을 잡아 내리고 움바바와 삼백이의 사이에 섰다.뒤늦게 달려온 그렉과 강흑성은 기묘함을 느꼈다.박준이 나타나자 움바바족이 칼을 내렸기 때문이다.특별한 일이다.

‘뭐야? 움바바족이 나타난 것도 이상하지만 칼을 그냥 내려?’

황당한 의문을 품은 그렉의 앞에서 박준과 움바바족은 서로를 욕했다.

“왜 여길 오고 지랄이냐!”“에이 썅! 누고 오고 싶어 왔는 줄 알아! 올 사람이 안 오니까 내가 왔지!”

정확히 욕은 아니지만 그렇게 들리는 대화, 황당한 광경이다.

‘뭐, 뭐야, 이 상황은?’

그렉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자신이 미친 게 아닌 가 싶었다.움바바족이 어떤 존재인가?머리 두개 달린 거대 고릴라 괴수 블루마운틴과 맞짱 뜨고 죽이는 족속이다.저 칼을 들면 반드시 죽인다.

‘인간 말을 저렇게까지 유창하게 하는 움바바족은 처음 봐······!’

정말이다. 박준과 투덕대며 언쟁을 벌이는 모습은, 아니 말투는 영락없이 인간이다. 인간친구들이나 형제들이 말싸움하는 모습이 바로 저거다.

“등신아, 여기 상황이 지금 어떤 줄 아냐?”“알면 왔겠냐?”“에이 이걸 그냥? 들어봐, 지금 정찰본대가 주변에 깔렸단 말이야.”“뭐? 귀신대가리들이? 그게 정말이야? 오면서 못 봤는데?”“그래? 어, 너 혹시 비둘기폭포에서 놀다 온 거 아니야?”“뭐야? 몰래 와서 봤어?”“아 됐고, 거기 있다 왔으니까 정찰본대랑 안 마주쳤겠지. 아무튼 지금 상황이 심각하단 말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까무러칠 걸?”“뭔데 그래? 정말 무슨 일 있었어?”

미간을 무섭게 좁힌 움바바족은 샹그릴라 주변을 빠르게 훑어봤다.

“아까부터 피냄새가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움바바족의 눈은 강흑성에게서 멈췄다. 의문으로 좁힌 미간과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누가 봐도 무섭고 흉악하다.

“이 놈한테서 나.”

피 냄새가 난다는 말. 박준은 바로 반응했다.

“야, 헛소리 닥치고 왜 왔어?”

움바바족은 강흑성에게 미련이 남은 시선을 박준에게 돌리고 쏘아부쳤다.

“잊었어? 크리듐 판 돈을 가져와야 할 거 아냐? 팔았다면서?”

그렉은 눈가를 움찔하며 뒤로 이어 나온 말에 충격을 받았다.

“족장님이랑 다들 형이 중간에서 입 닦은 거 아니냐고 흥분했단 말이야!”

형, 움바바족은 박준에게 형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게 무슨!’

너무 놀라서 호랑이 눈을 부릅뜬 그렉은 강흑성을 돌아봤다.강흑성도 놀람을 감추지 못해 눈을 크게 떴다.삼백이는 머릴 갸웃거리고 있다.

“내가 그거 변명하고 달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전서구는 그 뒤로 왜 안 보내? 여기서 얼마나 장사 잘 해 먹고 있길래? 어라? 왜 저래? 가게가 개박살 났잖아? 뭐야? 어떤 새끼들이 저렇게 만들었어!”

이제야 샹그릴라의 파괴된 모습을 인지한 움바바족은 흥분해 날뛰었다. 누가 그랬는지 알면 당장 작두칼로 모가지를 치겠다는 듯이 욕을 했다.

“크아! 누가 우리 형 가게를 이렇게 만들었어! 죽여버린다아!”

박준은 한숨 쉬었고 그렉과 강흑성은 놀란 눈만 깜박거렸다.

* * *

새벽별이 지기도 전에 눈을 뜬 강흑성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한 번도 해 본적 없는데 자연스레 떠올라 행하게 되는 심법과 운기행공, 무원진력이다.당문의 상승비기인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깊은 명상에 들었다.

“후우.”

두 시간의 운기를 마친 강흑성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힘이 넘친다.이렇게 상쾌한 몸 상태는 처음이다.환골탈태 후에 이전과는 전혀 달라졌지만, 심신일체의 이런 컨디션은 처음이다.

‘약초.’

머리에 떠오른 것을 붙잡으며 강흑성은 방에서 나갔다.가볍게 세수를 하는데 삼백이가 다가온다.붉은 눈동자를 깜박여 아침인사를 하는 로봇, 강흑성은 엷은 미소로 인사 한 후, 망태기와 호미를 찾아 들고 나섰다.

* * *

“으하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그렉은 방에서 나왔다.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다.샹그릴라의 영업시간이 오후에 치중돼 있느니 늦게 일어난 건 아닌데, 왜 그런지 마음이 찜찜하다.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알아야 할 걸 놓친 기분이다.그런데 어제 일의 충격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싹 잊었다.

“대박, 움바바족과 형제사이라니.”

사장 박준이 그렇다.어제 찾아온 움바바족이 바로 동생, 이름이 박현이다.괴수인간이라는 움바바족이 그런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괴이하고 놀랄 일.박준과의 인연이 그렇다. 그들은 한 어머니가 기른 형제가 맞다.

“으, 술을 과하게 먹었더만, 속이 쓰리네.”

어제 밤늦게까지 박준 박현 형제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그들이 자라온 이야기.박준사장의 어머니가 숲에 버려진 움바바족 아기를 거둬 키운 이야기다.그래서 박현은 인간처럼 말하고 박준의 동생인 거다.

“근데 얘는 왜 안 일어나? 야, 삼백아, 흑성이 깨워라!”

삼백이를 소리쳐 부른 그렉은 미간을 옅게 좁혔다. 이렇게 부르면 삐거덕거리는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야 할 삼백이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뭐야?’

묘한 기분과 예감이 들어 그렉은 강흑성의 방문을 열었다.

“어?”

강흑성이 없다. 침대의 이불을 잘 개어져 있다. 벌써 깨어나 나간 거다. 삼백이가 불러도 기척이 없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강흑성을 따라 나갔다.

“어딜?”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말한 그렉은 불안한 얼굴로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갔다.

“흑성아! 삼백아!”

소리쳐 불러보지만 어디에서도 대답이 없다.숙소와 창고와 홀, 아무데서도 안 보인다.저절로 시선은 수림으로 간다. 깊은 어둠을 품은 수림으로.

‘설마?’

불안을 현실로 받아들이려는 순간, 그렉은 숲에서 돌아오는 두 그림자를 봤다.강흑성과 삼백이, 둘은 소풍갔다 돌아오는 애들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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