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4화 (15/172)

혹성강호. 14. 깨어나는 소리.

14. 깨어나는 소리.

매일새벽 4시면 잠이 깬다.마치 누군가 곁에 있어 잠을 깨워주는 것 같다.더 기묘한건 피곤함이 없다는 거다.전날 아무리 힘들고 피곤했어도 자고 일어나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운기를 하고 나면 몸이 날 것 같다.

‘오늘도 무원신공으로 무원진력을 쌓아보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흑성은 운기조식의 깊은 명상 속으로 가라앉았다.내외를 망각하고 참된 자아를 깨닫는 때,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희열과 전율의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눈을 뜨면 아침이다.

‘6시.’

정확히 두 시간의 운기조식을 마친 강흑성은 말 그대로 날아갈 듯한 몸과 마음의 상태로 일어섰다.숙소를 나가니 해가 막 떠오르고 있다.부상(扶桑)의 그 빛 아래서 묘진위가 운기행공을 하고 있다. 아주 느린 움직임이다.

‘마교의 패천개벽신공.’

묘진위가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일주일 전 보는 순간 알았다.

‘나는 저걸 어떻게 아는 걸까.’

숙소 계단참에 앉아서 강흑성은 새삼 의문을 씹었다.생전처음 보는 것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이 기이한 기억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다.변화가 일어난 후부터, 그날 그 남자의 영상을 보면서부터다.

‘레드파운틴족의 검격을 받아내던 그 순간의 그 남자······’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강흑성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묘진위가 펼치는 저 행공의 이름이 패천개벽신공이란 것을 아는 건 그 남자로 인해서다. 무원진경의 무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과 같다.그 남자가 익히고 깨우치고 연마한 무공.당문의 비기, 그것이 강흑성 자신에게로 전해졌다.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들이 떠오른다.그가 준 것이다.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건 그런 거다.

‘그는······’

심중에 돋아나는 단어, 태어나서 한 번도 불어본적 없는 말을 강흑성은 삼켰다.

‘아버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강흑성은 전신의 소름을 털어냈다.고개를 들며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때가 되면 진정한 나를 찾게 될 것이라고, 아버지가 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던.이 일은 그런 일, 때가 도래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를 악물었던 강흑성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털어냈다. 어차피 헤아리지 못할 터, 심중을 다스리며 지금 몰두해야할 현실로 몰입했다.

‘혼천무상대법까지도 기억해 냈어.’

묘진위가 붉은 엘프 크라폰과 싸울 때 사용한 마교의 비기다.그 명칭과 묘용을 기억해 냈다.마교의 비기중의 비기인 그것은 본래 다른 묘용이 있다.황당하도록 무섭고 소름끼치는, 육체를 바꾸는 신체치환이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젊은 자의 육체를 취해 영원히 살 수 있을 텐데.’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강흑성은 진위를 가늠했다. 그렇다는 기억은 분명히 있지만 그게 실제로 이뤄진 걸 본 기억은 없기에 당연한 의문이다.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강흑성은 상념에서 떨어져 나왔다.

“삼백아.”

녹즙이 든 잔을 들고 다가온 삼백이가 잔을 내민다.씩 웃으며 잔을 받은 강흑성은 단숨에 마셨다. 그런데 마침 나온 그렉이 쌓인 말을 뱉어낸다.

“저 쇳덩이 새끼 하는 짓 봐라 저거. 여태 나한테는 물 한잔도 안준 놈이 흑성이한테는 아주 지극 정성이구나, 도대체 뭐냐? 흑성이를 사랑하냐?”

삼백이는 그렉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크악! 이쇠스끼가!”

깊고 긴 숨을 몰아 내쉬며 묘진위는 행공을 마쳤다.그렉이란 이름의 타이그란족 사내가 삼백이란 로봇을 향해 욕하며 달려들고, 강흑성이 그걸 막아서는 아침의 풍경이다.사장 형제가 마침 나와 그걸 보고 있다.한숨 쉬는 사장 박준과 그 곁에서 흉악하게 히죽거리는 움바바족 동생 박현.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형제라는 저들은 황당함은 이곳의 현실이다.

‘기묘한 곳이야.’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며 묘진위는 강흑성이란 존재를 다시 더듬었다.당문의 비법으로 탕약을 만들어 자신의 내상을 다스려준 젊은이다.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묻지도 않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패천마혈의 정혈을 흡수한······’

강흑성은 그런 존재다.그런 이에게서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패천마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지금 모습은 칙칙한 철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건 신교의 보검, 그것도 미련을 버림이다.

‘내가 손댈 수 없는, 아니 헤아릴 수도 없는 거대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이야.’

강흑성을 보고 겪으며 그렇다는 걸 때달았다. 마음에 남은 미련과 잔재를 완전히 씻어냈다. 그런 묘진위의 귀에 사장 박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계속 그러고들 있을 거냐! 아침 먹고 일해야지!”

* * *

“크워어!”

움바바족답게 박현은 엄청난 힘을 자랑했다.수림의 거대한 나무들을 옮겨오는데 제 몸통만한 걸 세 그루씩이나 끌고 왔다.퉤하고 침을 뱉고 팽개치면서 하는 말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에이 혼자할라니 빡세구만, 친구놈들 데리고 왔으면 거저먹긴데.”

정말로 그러면 작업은 손쉽고 수월할 거다. 움바바족이 박현말고 서넛만 더 있어도 빠르고 쉽게 이뤄질 거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이다.

“야야, 그것보다는 깨끗하게 다듬어야지!”

박준이 소리치자 그렉은 심술 난 입으로 반응한다.

“홀을 빈티지 하게 꾸민다면서요? 그럼 이정도면 됐지 뭘 더 다듬어요? 더 깨끗하면 이상하죠.”“뭐가 이상해? 돼도 않는 소리하고 있네!”

통나무 다듬는 도구를 든 박준은 그걸로 그렉을 다듬을 기세다. 하지만 그렉도 지지 않는다. 같은 도구를 같이 들이대면서 제 할 말은 다 뱉는다.

“그럴 거면 화성에서 골조며 벽체며 다 주문해서 하면 되지 뭐 하러 이 짓을 하고 있습니까? 뭐가 DIY고 핸드메이드예요? 힘들기만 하고 제대로 되겠어요? 도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감으로 하는 거잖아요?”

샹그릴라를 새로 복원한다는 사장 박준의 계획.

“몇 번을 말해야 되냐! 내가 손수 집지은 게 한두 채가 아니라고 했잖아! 도면? 그거 다 내 머릿속에 있다고! 그 호구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호구란 말의 의미가 모호해서 그렉이 얼굴을 더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묘진위가 나섰다. 언월대도를 손에 쥔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휘둘러댔다.

“어?”“뭐야?”

박준과 그렉은 동시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자신들이 몇 시간째 다듬는 통나무들이 묘진위의 칼부림에 삽시간에 다듬어지고 있어서다.가지들이 다 잘려나가고 껍질도 벗겨진다.그야말로 귀신같은 칼놀림이다.

“허이야, 대도를 저렇게 손칼처럼 다루다니······”

박준이 감탄을 냈고 그렉은 역시 경탄한 가운데 서늘한 안광을 흘려냈다.

‘내상을 완전히 회복했구나. 불과 일주일 만에.’

묘진위의 상세는 정말 심각했다.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는 게 당연한 정도였다.그런데 이레 만에 언월대도를 휘둘러 무공을 펼치고 있다.원인은 강흑성이 만들어 준 탕약, 육합신탕이라는 그 약물이다.

‘흑성이는······’

새삼스러운 마음과 눈으로 강흑성을 돌아본 그렉은 눈을 부릅떴다.움바바족 박현이 막 잘라 끌고 와 팽개친 통나무, 강흑성과 삼백이는 거기 붙었다.그런데 그 나무 밑둥에서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밀려나왔다.

“암흑개미다!”

그렉이 소리치자 박준과 묘진위는 부릅뜬 눈으로 반응했다.암흑개미, 그건 치 떨리는 공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동물들이면 그 어떤 존재이든 암흑개미를 피해야 한다. 물리면 참혹한 최후를 맞기 때문이다.

“흑성아! 어서 피해!”

소리치며 그렉은 창고로 달려갔다. 그 어떤 약품으로도 퇴치가 안 되는 저것들은 불태우는 수밖에 없다. 화염방사기를 가지고와 태워야 한다.

“야! 그렉아!”

박준의 다급한 부름에 반응한 그렉은 창고 앞에서 멈춰 돌아봤다.그렇게 다시 눈을 치뜨고 얼어붙었다.암흑개미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그것들이 강흑성을 덮어버린 모습이다.그런데 가루로 흩어진다.

‘뭐!’

숨도 쉬지 못하는 충격의 눈으로 그렉은 봤다. 암흑개미들이 강흑성을 덮었다가 떨어지는 모습, 암흑빛이 사라지고 속빈깨알처럼 흩어지는 광경.

“세상에······”

떨리는 숨으로 제대로 말도 못한 채 그렉은 눈만 부들거렸다.

* * *

어김없이 새벽 4시에 눈을 떴다.숙소 밖 멀리 수림 어디선가 악마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죽은 동물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악마새들.아마도 괴수들이 싸우다가 죽었거나 그 비슷한 일일 거다.

‘배가 고파.’

강흑성은 그 느낌을 따라 침대에서 일어섰다.정말로 음식이 필요한 허기가 아니라 진짜느낌.마음과 변화한 이 몸이 원하는 것이 있다.그건 바로 독이다.어제 암흑개미들을 먹어치울 때와 같은 짜릿한 자극이다.

‘필요해.’

강렬하게 몸과 마음이 원하고 있다.어려서부터 독에 강했던 자신이고 환골탈태 후엔 더 강해진 것으로 자각하고 있지만, 현재의 수준은 그런 것 이상이다.무원진력을 수련하고부터 허기진 것처럼 독을 원하고 있다.

‘암흑개미떼보다 강력한 독.’

그걸 찾아서 먹어야 한다, 아니 어제처럼 독을 흡수해야 한다.그 어떤 독도 꺼리길 것 없다.다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다.그렇다는 걸 안다.

‘수림으로 가는 거야.’

결심을 굳힌 강흑성은 어제처럼 망태기와 호미를 들고 숙소를 나섰다.삼백이가 기다린 듯이 따라 나온다. 괴수사냥총을 어깨에 걸치고 뒤따르는 걸 제지하지 않았다. 말 듣고 안 따라올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삼백이는 마음을 가졌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다는 걸 강흑성 알았다. 잘해 줘서가 아니다.

‘나를······’

마음을 열 대상을 찾아서 그런 거다. 박준도 그렉도 삼백이를 로봇으로만 보고 대한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지만 그렇다.

‘날 보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삼백이의 마음, 생각이 그렇다는 걸 강흑성은 안다.그래서 삼백이의 마음을 받고 마음을 전했다.붉은 눈동자가 깜빡이는 걸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안다. 그러면 미소와 눈빛으로 대답한다.삼백이와 친구가 됐다.

“삼백아. 나 오늘 위험한 행동을 할 거야.”

뒤돌아보며 강흑성이 말하자 삼백이는 붉은 눈을 깜빡였다.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강흑성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어제 봤지? 그런 거야. 나한테 필요한 일이라서 하려는 거야.”

삼백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수긍의 눈빛을 냈다.강흑성이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걸 이젠 확실히 알고 있어서다.어제는 암흑개미떼의 공격을 받았지만 멀쩡했다.그 독을 흡수했다.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거다.

“지독한 독을 가진 놈을 찾아야 하는데······”

강흑성이 중얼거리자 삼백이는 바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뭔가 생각난 게 분명한 행동, 강흑성은 뒤따라 달렸다. 그런데 숨이 하나도 안 찬다.

‘이대로 수십 킬로를 달려도 아무렇지도 않겠어.’

달라진 자신의 상태에 미소 짓던 강흑성은 흠칫했다.

‘무원신풍.’

머리에 무공이 떠오른다.무원신풍, 무원진경상의 경공이다.무원진경은 당문의 비전이다. 그러니 기억으로 떠오른 아버지는 당문과 관련있다.정확히 어떤 관계이고 내막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뿌리가 당문이다.

‘해보자.’

구결을 따라 강흑성은 내력을 운기했다.발바닥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며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오륙미터 앞서 달리던 삼백이의 곁에 붙었다.

‘내력이랄 것도 없는데!’

강흑성은 흥분과 전율을 느꼈다.그 순간 힐긋 돌아본 삼백이는 눈을 반짝이더니 속력을 더 낸다.그 속도도 강흑성은 가볍게 따라갔다. 그렇게 둘은 수림을 헤쳐 달려갔다.둘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것은 늪이다.

‘뭔가 있구나······!’

작은 호수라고 해야 할 늪.수면이 부유물로 덮여 있고 진흙으로 펄이 되어 있는 곳이다.이 곳에 뭔가 사악하고 흉악한 존재가 있음을 느낀다.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에 강흑성은 삼백이를 돌아봤다.붉은 눈을 강하게 번득이는 삼백이가 괴수사냥총을 움켜잡고 사방을 주시한다.강흑성의 생각과 의지를 믿고 있지만 위험에는 적극 대처하겠다는 모습이다.

‘내가 안일하게 생각했어.’

삼백이의 모습을 보고 늪의 기세를 느끼고 강흑성은 옅은 후회를 삼켰다. 물론 두려움은 없고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지만 준비가 소홀했다.

‘그 마검이라도 가져올걸 그랬나.’

어차피 늦은 일, 후회를 털어내고 강흑성은 늪으로 다가갔다.지닌 거라곤 망태기와 그 안의 호미뿐, 그렇지만 이 몸을 죽일 존재는 없다고 확신한다.고작 이런 늪에서 괴수들에게 죽을 거라면 진즉에 죽었다.

‘뭐든 나와라.’

눈동자에 흑청빛 기운을 띄운 모습으로 강흑성은 소리쳤다.

“우워어!”

늪지대를 흔들며 퍼진 그 소리에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부유물과 진흙의 늪 속에서 검은 형체들이 솟구쳤다.마치 포탄을 쏘아낸 것처럼 늪 밖으로 나타난 것들, 용수철 같은 점프력으로 강흑성을 향해 다가온다.

‘대포알 거머리!’

일명 리틀 그라운드 웜이라고 부르는 놈들이다.십여세 어린아이만한 몸통을 가진 놈들이다.주름진 흉한 몸통을 튕기고 점프해 사냥감을 덮친다.

‘그래 와라!’

거머리 떼의 공격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순간 깨어나는, 깊고 깊은 속으로부터 포효해 나오는 진정한 자아를 잡았다.

“네놈들의 독이 필요하다! 모조리 먹어 치워주마!”

호미를 잡고 망태기를 던진 강흑성은 거대거머리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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