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5화 (16/172)

혹성강호. 15. 가야할 시간.

15. 가야할 시간.

눈을 뜨며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묘진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실내를 돌아봤다.샹그릴라 사장 박준이 만들어 놓은 지하밀실.이 안에서 지낸 날이 여드레가 됐다.죽을 뻔했던 목숨을 구했고 부상도 완치했다.

‘헛된 일은 아니었어.’

지나온 날들, 신교의 신병 패천마혈을 찾아 헤매 다닌 세월.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신념과 의지를 갖고 매진한 인생의 목표였다.신교의 적통후인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그 일이었다.

‘사명, 그것을 마침내 이룰 기회를 잡았었지만······’

붉은 엘프 크라폰이란 자에게 선수를 뺏겼다.신교의 보검을 소장하고 있다는 골동품상, 마교전문가로 행세한 자신에게 감정을 의뢰한 그가 죽었다.크라폰이 죽이고 검을 취했다.그를 쫓아 이곳까지 왔던 거다.

‘패천마혈을 아우른 존재.’

강흑성이다.그 젊은이는 신교의 기록에도 없는 기사(奇事), 이변을 만들어냈다.마성이 깨어난 패천마혈은 절대로 그렇게 다스를 있는 것이 아니다.석년의 마교주 절대천마 혁리추 정도의 절대고수라면 모를까 안 된다.

‘신교의 원혼들이 깨어나 울부짖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건만······!’

그 지경에 이른 패천마혈을 강흑성이 잠재웠다.뭘 어떻게 한 건지 패천마혈의 힘을 흡수하고 고철검으로 만들었다.그 존재가 자신을 살렸다.

‘받아들여야 해.’

깊고 깊은 숨을 내쉬며 묘진위는 마음속에 남은 불씨에 모래를 덮었다.완전무결하게, 모든 미련과 의구심을 다 버렸다.패천마혈이 강흑성에게 그렇게 된 결과를 받아 들였다.그건 삼백년이 흐른 세월을 받음이다.

‘강흑성, 하프타이그란 청년, 그가 이후를 만들어 낼 것이야.’

그에게 마지막으로 품고 있던 비밀을 알렸다.패천마혈의 진정한 부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다.패천마안(覇天魔眼), 그것을 찾으라 했다.

‘이루어지고 흘러갈 대로 되겠지.’

깨달음, 그것을 새로운 신념으로 품고 묘진위는 떠날 준비를 했다.준비라고 해봐야 언월대도 하나 잡고 가버리면 그만이다.그러니 실소가 난다. 블루마운틴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 하나로 세상을 떠돈 자인 거다.

‘여전히 손에 쥔 것은 이것뿐인가?’

애병, 언월대도를 새삼 응시하던 묘진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새 목숨을 얻었지.”

강흑성이 줬다. 당문의 비전 육합신탕을 만들어 내상을 씻어줬다.그 도움이 아니었으면 폐인이 되어 고통 속에서 남은 생을 갉아먹었을 터다.그건 바로 죽느니만 못한 것, 벗어날 방법이란 혼천무상대법 밖에 없다.

‘대법으로······’

신체치환, 누군가 건강한 자의 육체를 차지하는 거다.그러나 그 대법의 비기는 이론만으로 전해졌을 뿐 이뤄진 사례가 없었다.비기를 펼치는 정확한 요결도 군데군데 이가 빠지듯 실전됐다.그러니 방법이 아니다.

“후우.”

어떠하든 묘진위 자신은 살았고 새로운 눈으로 생을 보게 됐다는 결론.

“가자, 떠나가야 할 자는 가야지.”

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묘진위는 미소를 지었다. 홀가분한 미소다.

* * *

대포알 거머리.이놈들의 원형 아가리엔 톱니 같은 이빨들이 빼곡히 나있다.공격대상의 머리를 덮듯이 삼켜버린다.이빨로 머릴 자르고 주름진 몸통을 꿀렁거리며 흡혈을 하는 거다.그러면 몸통은 금세 두 배가 된다.

‘무원도법(武元刀法).’

머리에 떠오르며 그려지는 무원진경상의 무공.호미를 움켜쥔 채 강흑성은 그것을 펼쳤다.용수철처럼 튕겨 날아오는 대포알 거머리들을 호미로 후려쳤다.사선으로 찍어 내리고 돌며 가르고 연속해 돌아 후렸다.쾅, 쾅.삼백이가 발사하는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강흑성은 정신없이 거머리들 사이를 누볐다.괴수사냥총에 맞아 폭죽처럼 터지는 거머리들의 피와 독과 살점들을 맞으면서, 호미로 놈들의 몸통을 가르고 쪼갰다.

‘좋아! 너무 좋아!’

희열을 만끽하며 강흑성은 무원도법의 흐름을 풀어냈다.처음해보는 무공.정확한 자세도 한번 연습해 보지 않아 엉성하고 위태롭기 그지없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펼쳤다. 대포알 거머리들은 흉악하게 흩어진다.

‘너무 많아!’

희열 뒤로 찾아오는 현실을 강흑성은 이사이에 물었다.늪에서 튕겨 나오는 대포알 거머리들은 줄지를 않는다.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다 뭘 먹고 살까 싶다.그런데 이놈들은 한번 흡혈하면 몇 달씩 잔다고 들었다.

‘윽!’

종아리의 첨예한 고통에 강흑성은 눈을 치떴다.잠깐 움직임이 늦어진 틈을 파고든 거머리가 오른다리 종아리를 물었다.뭐라고 형용하기도 힘든 감각, 통증이다.그 때문이 휘청한 사이 왼 어깨에도 한 놈이 붙었다.

‘익!’

휘청거리는 강흑성을 노리고 대포알 거머리들은 폭풍처럼 달려들었다.그 모습을 본 삼백이는 t-rex를 미친 듯이 연사했다. 그러다 총탄이 떨어지자 장총을 휘둘렀다. 거머리들은 터지면서도 강흑성을 물고 있었다.

“우아아!”

강흑성이 함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삼백이가 붉은 눈을 강하게 번득였고, 온몸에 대포알 거머리들이 붙은 형상의 강흑성은 뜨겁게 웃었다.

“이거야.”

함성을 지른 순간부터 변한 강흑성의 눈동자.흑청빛이 어른거리는 눈을 본 삼백이는 뒤로 물러섰다.그 순간 강흑성의 몸으로부터 흑청의 기운이 퍼져 나왔다.확 터지듯 나온 그 기운은 거머리들을 삼키듯 덮었다.삼백이의 붉은 눈이 강렬한 빛을 내는 가운데, 그렇게 바라보는 속에서 강흑성은 무원신공의 힘을 발휘했다. 독을 독으로 제압하고 모든 곳을 아우르는 절대 독의 힘, 무원진력의 기공으로 거머리들을 흡수했다.피이이, 하고 튜브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기음을 내며 대포알 거머리들은 껍데기로 변했다.체내의 독과 에너지를 강흑성에게 다 뺏기고 재처럼 떨어졌다.본능적 두려움으로 물러나는 놈들도 모조리 빨려갔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강흑성은 부들거렸다. 전율과 환희를 만끽하며, 흑청빛 눈동자를 빛내면서, 주변의 대포알 거머리들을 자석처럼 당기며 웃었다.

“으하하하하!”

수림과 늪을 뒤흔드는 강흑성의 그 웃음을 삼백이는 고요히 바라봤다.

* * *

“갔네.”“갔어.”

박준과 박현이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옆에서 그렉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뭔가 시원섭섭한 느낌이어서다. 묘진위라는 무인은 샹그릴라에 위험을 몰고 왔다가 이렇게 소리 없이 가 버렸다. 그 일이 기묘하기만 하다.

‘무슨 마음으로 떠난 걸까.’

묘진위의 마음을 짐작하려는 건 그렉만이 아닌 듯, 박준이 같은 의문을 말한다.

“마검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린 걸까?”

박현이 움바바족 특유의 흉악한 표정을 빙글거리며 입을 연다.

“마검은 무슨, 그런 고철검에 무슨 미련이 남겠어? 솔직히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못 믿겠구만. 어때? 다 꾸며낸 이야기 아냐? 형 특기잖아?”“이 자식은 근데 사람을 뭘로 보고? 그게 거짓말이면 귀신대가리들은 뭐겠냐? 걔들이 일이 없어서 그러고 다니겠어? 지금 만나게 해줄까?”“아이 씨, 왜 짜증이냐? 나는 그냥 그런 생각도 든다 이거지.”“그런 생각? 너 분명히 나보고 꾸민 얘기라고 했다, 내 특기라고?”“아니, 나는 형이 어릴 때부터 버릇처럼 공갈을 치던 인간이라······”“뭐 이섀꺄!”

박준이 주먹을 휘두르며 쫓아가고 박현이 거구를 피하며 도망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광경이어서 그렉은 한숨을 쉬었다.그러는데 삼백이와 강흑성이 돌아왔다.또 숲에서 약초를 캐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모습 그대로 망태기와 호미를 지녔다.그런데 약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 니들은 어디 가면 간다고 말 좀 하고 다녀라.”

빈 망태기를 보며 그렉이 짜증을 섞어 말하자 강흑성은 예감을 품고 물었다.

“그 사람 갔습니까?”

박준과 박현을 바라보는 삼백이를 응시하던 그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떠난 모양이다.”

물어보지 않은 뒷말을 그렉은 이어냈다.

“검은 안 가지고 갔더라.”

강흑성은 시선을 돌리고 아무 반응도 내지 않았다. 그러는데 박준이 소리쳤다.

“뭣들 해! 일해야지! 월급은 공짜로 나가냐!”

호랑이 눈을 부라리며 인상 쓴 그렉이 먼저 통나무 다듬기를 시작했고 강흑성과 삼백이도 달라붙었다. 샹그릴라 재건은 그렇게 이뤄져 나갔다.

* * *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가지고 가.”

박준은 한 말을 다시 했다. 그래서 박현은 원박스를 행낭에 넣다가 짜증을 냈다.

“가져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이 자식은 근데 형이 말하는데······”

눈썹을 세우며 화를 내려던 박준은 스르르 표정을 풀었다.

“아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체념한다는 얼굴로 손을 내젓는 박준, 그 얼굴을 불만스럽게 보던 박현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크리듐 밀거래라는 위험을 감수한 건 형 박준, 그렇지만 금화 한 푼의 이득도 취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안하다.

“족장님이 형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행낭을 여미며 박현이 말하자 박준은 입을 비죽거린다.

“고양이 쥐 생각해준다네.”“정말이야. 보답할 일이 뭐가 있을까 궁리중이시더라고.”“맨날 궁리지. 어느 천 년에.”“음, 장가보내줄 생각을 하시는 것 같던데.”“뭐? 장가?”“어 참한 색시감이 어디 없냐고 주변에 물으시더라고.”“정말이냐?”“내가 왜 거짓말을 해?”

자신 있게 말하는 박현과 반색한 얼굴의 박준을 그렉과 강흑성과 삼백이가 지켜봤다. 뭔가 흥미진진한 상황, 그런데 반전이 있을 것 같은 예감.

“그래서? 여자를 찾았어?”“어, 추천받은 여자가 있다는 소리까지 듣고 왔어.”“허, 정말이라고?”“정말이라니까? 형이 인간나이로 한참 때를 놓친 거잖아? 그렇다고 나이 먹은 여자를 색시감으로 구해줄 수는 없다고, 젊은 여자여야 한다고 했지.”“지, 진짜?”

침을 꿀꺽 삼키는 박준에게 박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스무 살이라더라, 우리 옆 마을에서 가장 예쁘다고 하더라고. 에, 정확히 철원 육단리, 거기 있는 마을이야.”

박준은 갑자기 미간을 확 좁혔다.

“우리······ 옆 마을?”

박현은 박준의 표정을 모르는 체 하던 말을 이어냈다.

“엉덩이가 커서 아이도 잘 낳을 거래. 물레 돌리는 솜씨도 아주 좋다던데?”“야, 그 여자 너희 부족이냐? 움바바족?”“그야 당근이지.”

자랑스레 대답한 박현의 목을 박준이 확 달려들어 잡았다.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컥! 왜, 왜이래!”

박준을 매달고 박현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그렉과 강흑성과 삼백이는 지켜봤다.

* * *

“자, 다시 개업이다!”

샹그릴라의 간판에 불을 켜며 박준은 기쁘게 웃었다.그 마음을 십분 공감하기에 강흑성도 엷게 미소 지었다.드디어 마무리공사를 끝낸 샹그릴라, 본래의 기초위에 새로 지은 커다란 통나무집은 생각보다 멋지다.

‘전보다 나은 것 같아.’

박준이 호기롭게 말한대로다. 집을 몇 채나 지어봤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박준이 경험하며 살아온 삶이 궁금해진다.

‘움바바족 형제를 둔 사람.’

박준과 박현을 생각하며 피식 웃은 강흑성은 길 저편에서 흔들리는 불빛들을 봤다.샹그릴라를 다시 연다는 전단지를 풍선에 띄워 보낸 결과다.술이 그리운 자들이 오고 있다. 야수족이든 인간이든 누구든, 손님이다.

“손님들 온다! 장사 시작하자!”

박준의 기쁜 목소리를 따라 강흑성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그렉과 삼백이도 주방에서 마지막 준비로 화덕에 불을 붙였다. 밤은 그렇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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