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17.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17.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이 미친놈이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구만!”
당황과 분노에 사로잡힌 박준은 발을 굴렀다.강흑성이 삼백이와 사라졌기 때문.그 이유가 노예사냥꾼 츄란족을 따라가 여자들을 구하려는 거다.그게 미치게 한다.못 본 척 모르는 척 살아도 죽을 판인 세상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제 놈이 남을 동정할 꼬라지야? 하 진짜, 그 자식 눈알 보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정말 뭐하자는 수작이야? 아으 정말! 그래, 제기랄 거, 어쩔 수 없어······!”
이 악문 숨을 흘려내는 사장 박준을 그렉이 불안한 눈으로 응시했다.박준의 기상시간도 전에 이 상황을 알고 깨운 결과가 이제 저 입에서 나올 것이어서다.어젯밤부터 강흑성의 눈이 쌔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다.
“사장님.”
박준이 하려는 말을 가로채 잘라내듯 먼저 입을 연 그렉은 간곡히 말했다.
“우리가 찾으러 가야 합니다. 흑성이하고 삼백이 둘이서는 그놈들에게 죽을 겁니다. 정찰본대에 알리고 어서 찾아가야 합니다. 정찰대도 원칙적으론 노예사냥꾼들을 잡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원칙일 뿐이고 정찰대를 움직이자면 돈이 들지만, 그러니까 수완 좋은 사장님이 움직이셔야······”“내가 왜?”
눈썹을 확 세운 박준은 그렉을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놈더러 그러라고 내가 시켰냐? 츄란족 노예샤낭꾼들 뒤를 치다가 뒈지라고 시켰어?”“아니 사장님 그게 아니라 이일은······”“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일이고 저 일이고 이젠 못 참겠다. 그래, 그놈이 오고부터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생겼어, 그놈더러 오라고 한 적도 없지. 제 발로 왔다가 제 발로 간 놈, 죽든 살든 제가 알아서 할 일이야.”
간곡한 표정이던 그렉은 미간을 뒤틀며 뜨거워진 숨을 뱉었다.
“그렇게 치사하게 말씀하실 겁니까?”“뭐 치사해? 아니 이자식이 근데?”“여기가 뭐 안전이 보장된 놀이공원입니까? 아니잖아요? 샹그릴라가 있는 이곳이 어딥니까? 북쪽 데빌그라운드로 가는 길목이잖아요? 자치도시나 블랙시티들하고 멀어서 야수족들이 언제나 들끓는 곳이고요? 그런 놈들 상대로, 그 사이에서 장사하고 이득을 취하는 게 사장님 아닙니까?”
박준이 다시 소리치려는 데 그렉은 빠르게 뒷말을 냈다.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뭐?”“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정말 치사하고 비겁하잖습니까?”“뭐뭐? 하, 이자식이 정말로 막나가네!”“예, 저도 막나갈 때는 막나갑니다. 움바바족 동생 있다고요? 데려와서 날 때려죽이라고 할 건가요? 오라고 해요? 쓰벌, 한판 뜨자 이겁니다!”“너 이 쉐키!”
박준은 참지 못하고 그렉의 멱을 잡았고 그렉은 상관없이 말했다.
“일 잘한다고 흡족해 하던 때는 언제고, 정말 치사합니다. 인간들이 원래 가장 비정하고 잔인한 종족이라는 거 압니다만, 그 부분은 데바족도 치를 떠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죠. 잘 먹고 잘 사십쇼.”
박준의 손을 잡아 뜯은 그렉은 돌아섰다. 그 등에 대고 박준은 소리쳤다.
“개소리마라! 내가 자선사업가냐! 이런 데서 목숨 걸고 장사하는 게 그런 놈 돕다가 죽겠다는 건 줄 알아!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는 거야! 그래! 너는 타이그란 족이라서 그렇겠지! 나하곤 아무 상관없다 이거야!”
박준이 소리치는 가운데 그렉은 숙소에서 핸드건을 챙겨 나왔다.떠돌이 퓨리엔트족에게서 금화 세 개를 주고 산 무기, 유일한 그것 지니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이나 차도 없이 달려야 하는 상황을 이 악물며 달렸다.
‘제길,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 피도 섞이지 않은 남인 강흑성이 어디서 뭘 하다 죽든 살든 알바 아니다.그런데 그게 안 된다.이 목에 단도를 들이밀던 하프타이그란.그 특별하고 기묘한 인연 위에 더해진 것은 후회스러운 기억이다.
‘또 외면하도 도망칠 수는 없어!’
이를 악물며 그렉은 전력으로 질주해 나갔다.
“야 이 미친놈아!”
그렉이 달려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소리친 박준은 안면을 실룩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시선 던지고 서 있다가 에잇, 하고 발을 구르며 돌아섰다. 무기고를 열고 빔건을 꺼냈다. 바로 2창고로 달려가 쪽문을 열었다.
“에이 슈발 샹그릴라!”연신 욕을 하며 덮개를 벗긴 박준은 차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기름통을 들고 주유구에 기름을 채웠다.운전석에 올라 키를 돌리니 트르릉 하고 엔진이 깨어났다.벽전체가 열리는 문인 2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미친놈이지!”
소리치듯 말한 박준은 사륜구동 지프차를 몰고 나갔다.바퀴는 바람 빠질 일 없는 강성고무의 골동품 차, 이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마지막 모델이다.이걸 2창고에 두고 애지중지, 그렉도 뭐가 있는지 모르 게 했다.
“제길, 어쨌든 쓰긴 쓰는 구나!”
맹수처럼 튀어나가는 지프차의 질주에 박준은 어느새 짜증과 분노를 다 잊었다.시원하게 들이치는 바람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그러노라니 그렉이 보인다.차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더니 멈춰 서서 황당한 얼굴이다.
“뭐 햄 마! 어서 타!”
박준이 속도를 늦추자 그렉은 비호처럼 뛰어올라 차에 탔다.
* * *
세 놈을 쪼개고 네 번째 놈의 정수리에 검을 내려치는데 놈의 빔건이 섬광을 뿜었다.그 찰나의 순간에 강흑성은 머릴 틀었다.왼쪽 관자놀이를 스치며 빔이 지나갔다.화끈한 그 느낌 속에서 검의 울음을 들었다.확, 하고 퍼지는 피.갈라버린 츄란족의 피에 광분한 패천마혈의 울음이 전신에 공명한다.품고 있던 정혈을 강흑성 자신에게 다 빼앗긴 마검.그런데 새로운 피를 먹고 더 갈구하고 있다. 그 피가 눈앞에 있다.
‘마지막 놈.’
뒤로 물러나며 빔건을 겨누는 놈, 강흑성은 먹이를 덮치는 맹호처럼 튀어나갔다.하지만 네 번째 놈을 가르느라 거리를 줬고 시간을 줬다.놈의 빔건 총구가 가슴을 노리고 있다.피해야 한단 그 순간 놈이 터졌다.쾅, 뒤늦게 귀를 파고든 총성.마지막 츄란족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삼백이가 박수를 친다.쇳덩이 손으로 치는 박수, 숲을 울리고 퍼져나간다.
“후아.”
참았던 숨을 내쉰 강흑성은 검을 내렸다. 츄란족의 피를 먹어 붉은 빛을 번들거리는 마검 패천마혈, 이젠 다시 잠든 것처럼 울부짖지 않는다.
‘이 검이······’
달려 나가게 만들었다.츄란족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나가게 했다.죽이리라고 마음먹은 순간, 검을 움켜쥐고 마지막 그 결의를 삼키는 찰나에 그렇게 됐다.삼백이의 도움으로 이겼지만 무모하고 아찔했던 싸움이다.
‘무원도법은 제대로 된 법식도 아니고 마치 도살부의 칼부림 같았어.’
츄란족들을 베고 갈라버린 강흑성 자신의 칼 쓰기, 그건 분명 당문의 비전 무원도법이었지만 마검의 울부짖음과 충돌하고 섞이면서 엉망이 됐다.
‘생전처음 펼쳐보는 도법이니 엉망은 당연하겠지만 이건 달라.’
마검의 마기라고 해야 할지 힘이라고 해야 할지, 흡수한 정혈의 힘이 준동해서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작용들이 이렇게 만들었다. 기억처럼 떠올라 펼치는 당문의 무공과 충돌하는 상황인 거다.
‘이런 무모한 짓을 다시 하면 안 돼, 완벽하게 이기고 제압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안 돼. 이건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러니 다스리고 다듬어야 한다. 칼날을 갈 듯이 정교하고 예리하게 날을 세워야 한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건 반복하는 수련밖에 없다.
“아저씨······”
가녀린 목소리에 강흑성은 현실로 돌아왔다.철창의 마차 안에 있는 여자아이가 부른다.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아이는 여섯 살쯤은 된 것 같다.
‘이런!’
강흑성은 바로 움직였다.콧물이 흐르던 아이의 코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다.독가루 때문이다.츄란족들을 처리하는 동안 중독이 된 거다.
“이 물 마셔라. 어서.”
가지고 온 수통의 뚜껑을 열고 강흑성은 아이에게 한 모금 마시게 했다.독가루를 만들며 같이 만든 해독약이다.삼백이가 츄란족 시체에서 열쇠를 찾아 철창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가 쓰러진 여자들을 살폈다.
* * *
“잠깐 세워보십쇼!”
그렉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박준은 브레이크를 밟았다.수림을 관통해 동쪽으로 이어진 길.이 길의 끝엔 블랙시티 춘천이 자리 잡고 있다.츄란족노예사냥꾼들의 목적지가 거리다. 여자들은 거기서 팔려나갈 거다.
“제길!”
조수석을 열고 나간 그렉이 욕하는 소릴 들은 박준은 고개를 빼며 물었다.
“뭔데? 왜 그래?”
창문 밖으로 머릴 내민 박준에게 그렉은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블루마운틴이 뒤로 붙은 것 같습니다.”“뭐?”
눈을 까뒤집듯이 크게 뜬 박준, 그 곁으로 바로 돌아온 그렉은 조수석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어서 밟아요! 전속력으로 달려요!”
박준이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독촉, 떠밀린 듯이 박준은 악셀을 밟았다. 그렇게 차를 다시 움직이고서야 그렉을 돌아봤다. 블루마운틴을 생각하는 현실의 두려움과 압박에 그렉의 짓거리를 더해 한숨 쉬었다.
‘호랑이 자식아, 장사는 네가 잘하는 구나. 이러는 거 아니다, 으이그.’
속으로 그 말을 던지며 박준은 차의 속력을 최대로 올렸다.
* * *
“감사합니다.”
눈물로 얼룩이 진 얼굴에 웃음을 만들며 여자 아이는 고개를 숙인다.이름이 명희라고 했다.이제 숨이 제대로 돌아온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다.
“몇 살이니?”
무표정한 강흑성의 물음에 명희는 수줍은 미소로 대답한다.
“여덟 살이요.”
다소 놀란 눈을 여전한 무표정으로 감추고 강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살 정도 된 줄 알았더니······’
제대로 된 성장환경이었다면 저보다는 크고 건강할 거다. 하지만 노예사냥꾼들에게 잡혀 팔려가던 처지와 환경, 제대로 클 수가 없는 거다.
‘나처럼 잡혀서······’
지난 오년간 겪은 지옥을 떠올린 강흑성은 눈동자가 흑청빛으로 변하는 줄도 모르고 뜨거운 숨을 이 사이에 물었다. 명희가 흠칫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자신에게 들어 있는 마검의 힘이 외부로 드러나서 라는 걸.
“아.”
어색한 표정을 지은 강흑성은 여자와 아이들을 주욱 훑어봤다.캐리언족 여자 열과 아이 둘, 인간 여자 둘과 아이 둘.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잡혔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행동하기엔 상황이 급했지만······’
그렇지만 저질렀으니 책임을 저야 한다.목숨을 구해줬으니 알아서들 갈길 가라고 할 수 없다.그건 다시 죽거나 잡히라는 소리와 같다.처음부터 모르는 척 외면했으면 모르되 손을 댔으면 끝까지 책임 져야 한다.이일의 동기가 한 푼 값어치 없는 영웅심도 아니고 생각조차 품어 본 적 없는 정의감도 아니다. 오로지 패천마혈의 단서를 잡기 위한 목적이었다.그렇다고 해도 했으면 끝까지 가는 거다.아니면 저들을 또 죽는다.
‘내가 필요해서 벌인 일, 마무리까지 감당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생각에 물든 눈으로 강흑성은 그녀를 봤다.패천마혈이란 잠꼬대를 한 캐리언족 여자, 여전히 의식이 불명한 모습으로 철창 안에 누워있다.
‘아픈 게 확실한데······’
그 순간 삼백이가 어깨를 쳤다.돌아보니 붉은 눈을 반짝이며 손짓한다.둘이 온길 저편, 샹그릴라다. 그곳으로 돌아가자는 거다.맞는 말이다. 지금 현재로선 그 방법 밖에 없다.그런데 박준이 받아줄지 모르겠다.
‘부탁을 해보자. 다른 곳 어딘가 안전한 곳을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있게 해달라고 해 보는 거야. 그 사람, 사장님이라면 방법이 있을 지도 몰라. 아니 그보다는 혹할 만한 뭔가를 제사해서 거래하는 게 더 가능성 있어.’
수완 좋은 사장 박준, 그를 생각하며 결심을 굳히던 강흑성은 미간을 확 좁혔다.등골을 조이며 엄습한 흉악한 기운 때문이다.뭔가 다가온다.
‘뭐가!’
강흑성이 벌떡 일어선 그 순간 삼백이도 붉은 눈을 번득였다. 로봇의 청각에 포착된 존재, 거대한 그림자가 숲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블루마운틴!’
고릴라를 닮았지만 전혀 다르다고 할 괴수, 3미터에 이르는 체구와 두 개의 머리에 네 개의 팔을 가진 놈, 시퍼런 그 눈을 강흑성은 마주 봤다.잔혹한 의지와 광포한 살기를 품은 눈, 블루마운틴은 웃음 짓고 있다.
‘저놈이······!’
강흑성이 분노와 살기를 일으키는 같은 순간이다.우우웅, 하며 검이 울어댄다.다시 붉은 빛을 내며 진동한다.그 마성이 내부의 힘과 공명한다.
“흐으.”
목과 어깨의 결림을 풀어내려는 듯한 움직임으로 강흑성은 숨을 내쉬었다.두 손으로 움켜잡은 마검 패천마혈을 가슴 앞에 세웠다.그 모습에 반응하는 것인지 블루마운틴운이 걸어온다.여자들은 비명을 지른다.
“삼백아.”
강흑성의 뜻을 알아들은 삼백이가 여자와 아이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 앞을 가로막듯이 선 강흑성은 다가오는 블루마운틴에게 말했다.
“모가지를 잘라주마.”
흑청빛 눈동자 무섭게 빛낸 강흑성은 블루마운틴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