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19화 (20/172)

혹성강호. 19. 안전한 곳.

19. 안전한 곳.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강흑성은 무원비천류를 펼쳤다. 손과 발을 내지르고 차올리고 몸을 비틀어 무원신풍류의 보법으로 이동하고 다시 손발을 떨치고, 해가 뜰 때까지 쉬지 않고 수련했다. 그렇게 깨달았다.

‘내 것처럼 무공이 기억난다고 내 것이 아니야.’

내 것이 되려면 그만한 공을 들여야 한다.피와 땀으로 갈고 닦은 시간이 더해져야만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거다.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그러니 블루마운틴을 이긴 결과는 행운이다.아버지가 전해준 특별한 행운.

‘내가 겪는 일 자체가 정상이 아니니까.’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리란 어머니의 말씀과 분명이 관련이 있다.그렇지만 그 전후와 내막을 알 수 없다.그 남자가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알려고 노력한다고 알아질 알도 아니다.

‘아버지가 길을 열어줄 거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그거다. 그거면 된 거다.지금은 받아들이고 어머니 말씀을 좇아야 하다.나를 찾는 거다.

‘아니, 만드는 거지.’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보며 샹그릴라로 몸을 돌리던 강흑성은 기척을 감지했다.숲에서 어떤 존재가 다가오는 기척, 소리가 아닌 기감이다.매일 수련하는 무원신공의 화후가 일천한 수준인데도 감각이 곤두선다.

‘누구?’

타이그란의 본능과 무인으로서의 능력이 눈을 뜨기 시작한 강흑성은 재빠르게 공터를 피해 몸을 숨겼다. 거대수 뒤에서 다가오는 존재를 살폈다.

“큼, 이상한데. 여기 분명 누가 있었는데?”

민대머리를 번득이며 나타나 중얼거리는 존재, 움바바족 박현이다.사장 박준이 전서구를 보냈다더니 이틀 만에 저렇게 나타났다.싸늘한 눈빛을 내는 눈으로 숲 속 공터를 훑더니 강흑성이 숨은 거대수에서 멈춘다.

“누구냐?”

거대하다고 해야 할 움바바족의 칼.작두칼이라고 부르는 무기를 움켜잡은 박현은 살기를 풀었다.강흑성의 기운을 분명히 감지한 거다.당연히 강흑성의 무공화후가 아직 일천한, 박현을 알아봐 긴장을 풀어서기도 하지만, 움바바족의 본래 능력이 만든 결과다. 저들은 그런 존재다.

“오셨군요.”

강흑성이 거대수에서 몸을 내자 박현이 미간을 꿈틀했다.

“어라, 너 그 놈이구나?”

하프타이그란 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박현은 작두칼을 내리고 다시 코를 킁킁거렸다. 뭔가 이질적인 냄새가 강흑성에게서 맡아져서다.

“이게 무슨 냄새지? 음, 아는 냄샌데, 아 이거 뭐더라······”

강흑성이 다가가자 박현은 흉악하다고 남들이 말하는 움바바족의 얼굴을 놀람으로 만들며 강흑성을 다시 봤다.냄새, 블루마운틴의 피 냄새가 분명하다.강흑성의 전신에서 그 냄새가 풍겨 나온다.어깨를 경직했다.

“뭐, 뭐야? 이건 블루마운틴 피 냄새잖아! 뭐야? 그놈이 여기 있는 거야?”

주변을 빠르게 돌아본 박현은 부릅뜬 눈으로 다시 강흑성을 응시했다.그렇게 현실을 인지했다. 블루마운틴이 주변에 있다면 몰랐을 리가 없고, 놈이 여태 가만있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 상황자체가 이상하다.

“블루마운틴 피 냄새가 왜 너한테서 나냐?”

거친 눈길로 강흑성의 위아래를 빠르게 훑어보며 다시 코를 킁킁대는 박현.그렇게 다시 깨달았다.신선한 냄새가 아니란 것, 주변의 다른 곳에선 냄새가 나지 않는 다는 것.오직 강흑성에게서만 냄새가 난다.

“도대체 뭐야 이거?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잖아? 블루마운틴 피로 목욕이라도 한 거냐?”

말해 놓고 박현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블루마운틴이 어떤 괴수인가?머리 두 개에 팔 네 개 달린 흉악무도한 놈이다. 놈들과 싸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잘 씻었는데 냄새가 아직도 나네요. 이런 줄 알았으면, 다음부턴 조심해야겠습니다.”

무심하고 대수롭잖은 강흑성의 반응.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길 해봐? 뭐가 다음부터야?”

강흑성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 순간 삼백이가 나타났다.박현은 본체도 않고 강흑성에게 달려오더니 붉은 눈빛을 깜박인다.뭔가 의사전달을 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모습, 강흑성은 알아들은 듯 대답을 한다.

“그래? 얼른 가서 봐줘야겠다.”

둘이 그러는 걸 옆에서 지켜본 박현은 황당하단 얼굴로 말했다.

“니들 뭘 하는 거냐? 말 통하냐?”

박현을 여전히 무시한 체 삼백이는 다시 달려갔고, 강흑성은 사정을 말했다.

“전서구를 통해 아시겠지만 여자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도 아팠는데 강흑성 자신의 독 때문에 더 아프게 된 상황이란 것까진 말하지 않았다. 바로 살피지 않은 건 그녀들의 불안과 캐리언족 이란 현실적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더 고려하고 조심할 상황이 아니다.

“빨리 가서 살펴봐야겠습니다. 가시죠.”

삼백이처럼 돌아서 샹그릴라 쪽으로 뛰어가는 강흑성, 그 뒤에 남은 박현은 인상을 구겼다.

“저것들이 지금 나 무시하는 거 맞지?”

작두칼을 땅에 끌다가 에잇하며 나무를 후려친 박현은 샹그릴라로 향했다.

* * *

카이오 라는 이름의 캐리언족 여자다, 고열로 몸을 펄펄 끓는다.인사불성인 상태로 신음 하고 있다.이렇게까지 된 게 어젯밤부터라고 한다.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한 건 며칠 됐지만, 이젠 정말 위험한 상태인 거다.

“아니 이지경인데 왜 말을 안 한 거야?”

그렉이 화난 표정으로 말하자 여자와 아이들은 두렵고 위축된 모습으로 시선들을 내렸다.그 모습을 본 그렉은 한숨을 내쉬었다.타이그란 족인 자신이 화내는 건 이들에게는 여태 겪어온 세상의 모습인 거다.

“괜찮을 겁니다.”

강흑성이 말하자 명희가 쪼르르 다가와 걱정스레 확인한다.

“카이오 언니 정말로 괜찮은 거죠? 오빠가 낫게 해 줄 거죠?”

자신들을 구해줬다는 것만으로 살갑지 않은 강흑성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는 명희, 저 어린 가슴의 마음을 강흑성은 무심히 받아냈다.

“걱정마라.”

명희의 머릴 쓰다듬어 주려고 올라가는 손, 강흑성은 흠칫하며 손을 내렸다. 찬 숨을 마시며 의식 없는 캐리언 족 아가씨 카이오의 맥을 다시 잡았다.의학적 지식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 강흑성의 그 모습을 그렉이 기묘하게 바라봤다. 다들 숨죽여 바라봤다. 밖에선 사장형제가 얘기 중이다.

“흑성이 너 정말 할 수 있는 거냐?”

걱정이 돼 그렉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강흑성은 무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그 얼굴에서 그렉은 지난 일을 떠올렸다.마교 후예 묘진위에게 육합신탕이란 걸 만들어 먹인 강흑성이다.묘진위는 나아서 떠나갔다.

‘그래, 이놈은 그런 놈이지.’

그렉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흑성은 카이오의 혈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아니 그러니까 내말 좀 들어보라니까 그러네.”“뭘 들어봐 새꺄?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치사하게 핑계냐?“형은 도대체 말을 똥구멍으로 듣냐?”“어라? 이 새끼 이젠 아주 대놓고 형한테 하극상이네? 너 정말 죽어볼래? 여섯 살 때처럼 해줄까? 쌍코피 흘리면서 빌어야 정신 차리지 새꺄!”

주먹을 휘두를 기세인 박준에게 박현은 깊은 한숨으로 다시 말했다.

“잡것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크리듐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간 거야.”

박현은 주먹을 든 모습으로 멈칫했다.

“뭐? 크리듐 소문이 샜다고?”“그렇다고, 정말 심각한 상황이야. 퓨리엔트족놈들부터 시작해서 개잡것들이 다 몰려들고 있단 말이야. 형이 그때 말했지? 낯선 놈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보인다고 했잖아? 이유가 있는 거야. 피터지게 생겼어.”

정말로 그렇게 생겼다.크리듐을 노리고 몰려든 놈들이라면 물불 안 가릴 거다.움바바족 마을이 있든 없든 상관 안할 놈들이다.그렇다면 움바바족 마을로 여자들을 보내는 건 더 위험한 짓이다. 동생 말이 맞다.

“하 이런 개신발 샹그릴라 같은 일이 있나······”“족장님도 형한테서 온 전서구 편지 받고 안타까워 하셨어.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인데 형편이 이렇다고, 나보고 직접 가서 알리라고 하셨어.“불과 며칠사이에······ 왕개신발······”“이거 보통일 아니야 형. 우리 돈줄을 다른 놈들이 다 파가게 생겼다고.”“누가 아니래냐!”

버럭 소리치며 화내는 박준, 그 심정을 알기에 박현은 민대머리만 긁었다. 평소 같으면 같이 소리치며 대거리 했을 테지만 지금 상황은 아니다.

“소요산을 지켜낼 방법이 없을까?”

소요산, 옛날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그 산에 크리듐광석이 묻혀 있다.대전쟁 때 묻힌 괴수들의 사체가 변하고 괴수들의 몸통 안에서 생성돼 있던 것들이 노출된 것이다. 그걸 박현 부족이 찾은 건데 이젠 퍼졌다.

“아 이거 정말 미치겠네,”

박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크리듐 밀거래를 할 만한 대상들을 더 확보하고 물색하기 위해 계획 중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면 정말 대략난감이다.이런 상태에서 정찰본대가 알기라도 한다면 완전히 끝장인 거다.

‘정찰본대장 브라이튼 새끼는 카슨 같은 놈과는 달라.’

적당이 먹고 적당히 싸려는 놈이 아니다, 정찰본대장이란 지위도 지위지만 통 채로 삼킬 놈이다. 그 놈 출신이 악마족인 데바족인 것도 그렇다.

“그런데 형, 하프타이그란 그놈 이상하던데?”“뭐?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그놈한테서 블루마운틴 피 냄새가 니더란 말이지, 그게 안 이상하면 뭐가 이상해?”

눈가를 움찔한 박준은 후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상하지. 엄청 이상해.”

무슨 말을 하려고 형이 저러나 하는 표정인 박현은 뒷말을 듣고 눈을 치떴다.

“흑성이 걔가 블루마운틴을 잡아 죽였거든.”

* * *

독의 조종이라고 불리는 당문, 강호무림의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 아니 두려워한 존재, 천인대적이란 말을 만들어낸 불세출의 고수 당천상을 배출해낸 가문, 그 문파의 독술과 의술이 강흑성의 머리에 떠오른다.

‘결국 나 때문이야.’

카이오의 증상이 그렇다는 걸 확신한다.강흑성 자신의 피와 다른 약재들을 섞어 만든 해독약 때문에 나타난 증상이다.사람마다 복용 결과가 차이가 나고 다를 것은 당연한 일.카이오는 오음절맥의 체질 때문이다.

‘이대로면 아무 일 없었어도 삼년이상 살지 못해.’

구음절맥 칠음절맥과 더불어 절맥증은 타고난 천형이다.야수족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다.같은 세상에 살며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인간과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운명을 맞는 거다. 이 병이 그 증거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찡그린 채 잠든 카이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강흑성은 결심했다.

‘패천마안의 단서를 갖고 있는 지도 모르는 여자.’

그래서 살렸다, 목숨을 걸고 츄란족과 싸웠고 블루마운틴도 죽였다.이제 와서 그런 수고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방법을 모른다면 모르되 살릴 방법을 아는데 고민할 이유 없다.살리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침이다.

‘무원신침을 시전하자면 침을 구해야 해.’

어디로 가면 구할 수 있는지 안다. 블랙시티, 춘천에 가야 한다.

‘구해온다.’

강흑성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카이오가 신음했다.아니 의식 없는 상태의 중얼거림, 아니아니 괴로운 기억 속을 헤매는 잠꼬대다.

“카데온······ 누나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카이오는 허공으로 손을 허우적거린다. 눈물을 흘린다.카데온이란 이름, 동생인 듯한 존재를 부르며 괴로워한다.슬퍼한다. 미안하다고 한다.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카이오를 내려다보던 강흑성은 돌아섰다.

* * *

“뻥치시네.”

박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얼굴표정과 눈빛을 시시각각으로 바꿨던 박현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다.늘 그렇듯 박준이 특유의 장기를 발휘한다는 거다.어디서 그런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냐고 차가운 코웃음을 친다.

“아 정말 형이란 인간은 구제불능이야.”“하 이쉐키 정말, 그래, 네가 안 믿을 줄 알았다.”

박준은 믿든 말든 너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그런 박준의 모습에 박현은 미간을 찌푸리듯 좁혔다.평소와 달라서다. 진실이라는 걸 강조하고 더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현혹시켜야 하는데 아니다.

‘뭐야 이건, 정말로 정말이라고?’

눈동자를 흔들며 박현은 지금 드는 생각을 부정했다.지난번 왔을 때 해주려다 못했다는 이야기, 방금 전 형 박준이 한 강흑성의 환골탈태 이야기다.마검의 기운을 먹어치웠다는 것도 웃기지만 어제 일은 똥구라다.

‘블루마운틴을 어떻게 잡아 죽여?’

아무리 하프타이그란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타이그란족 중에서도 특별한 용사들만이 가능한 일이다.아니면 무공을 익힌 자이거나다.그런데 그랬다고? 하프타이그란으로 태어난 게 특별한 힘을 가진 건가?

‘무공을 사용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강흑성이 그랬다는 거다.블루마운틴을 때려잡는 모습은 분명히 무공이었다는 거다.아주 거칠고 포악한 힘을 발산한, 정순하지 않은 것이 박준의 눈으로 알아볼 정도로 보였다는, 하지만 분명 무공이었다는 거다.

‘묘진위란 자에게 당문의 육합신탕이란 걸 만들어 내상을 낫게 해줬다고?’

들을수록 헛소리고 곱씹을수록 황당한 얘기다.그런데 거짓이 아니란 거다.형 박준의 저 태도와 눈빛은 거짓말 할 때의 모습이 아니라 진실을 말할 때 얼굴이다.하지만 이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사장님.”

그렉이 다가오는 걸 본 박준이 반응하기도 전에 박현이 먼저 물음을 던졌다.

“이봐, 형이 하는 소리가 정말이야? 흑성이란 놈이 진짜로 블루마운틴을 때려잡은 거야?”

그렉은 대답대신 한쪽을 손으로 가리켰다.샹그릴라 홀 우측, 언제나 손님들에게 자랑하는 생수의 근원지, 우물 앞에 커다란 나무통이 있다.그 위로 비죽 걸쳐진 것은 푸른 빛, 한눈에 봐도 블루마운틴의 가죽이다.

“저, 저거!”

후다닥 우물을 향해 달려간 박현은 물과 섞은 약품 속에 담가놓은 것이 뭔지 확인했다.블루마운틴의 가죽이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약품과 물에 섞여 냄새를 맡지 못했던 거다. 지금 보는 건 실물이다.

“저, 정말로!”

치뜬 눈으로 돌아보던 박현은 그렉이 형 박준에게 하는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췄다.

“흑성이가 블랙시티 춘천에 갔다 오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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