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21화 (22/172)

혹성강호. 21. 가는 길.

21. 가는 길.

“후아.”

계곡 물에 세수를 한 강흑성은 머릴 흔들어 물을 털어냈다.

“좋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계곡의 수림을 흔들어주고 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그렉이 준 지도에 의하면 가평, 녹수계곡이 다.

‘왜 녹수계곡이지?’

그렇게 써진 입석을 지나온 길에 봤다. 아주 오래된 바위였는데 정말로 세월의 더께가 녹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렇지만 흘러가는 물은 정말 맑다.

‘지도는 어디서 구한 걸까?’

새삼 그렉의 정체에 대해 다시 의문을 품었던 강흑성 묵직한 눈빛을 하늘로 올렸다. 그렉의 정체가 뭐든 그의 마음이 어떻다는 걸 아는 마당에 부질없다. 블랙시티 춘천을 향해 간다고 하자마자 지도를 내 준거다.

‘진심으로 날 걱정해 주는 사람, 아니 타이그란 사내······ 칼은 칼로 갚지만 은혜는 은혜로 갚는 것. 어쨌든 정찰대의 검문에 걸리면 골치 아파져.’

지도를 지닌 게 발각되면 그렇다.실상 지도야 퍼질 대로 퍼져 있다.그런데 대부분의 지도가 경험자들의 말과 기억에 의존해 만든 조악한 것들이다.그렉이 준 것은 정찰대 같은 데서나 가지고 있을 정밀한 지도다.

‘그들과 안 마주치게 조심하는 수밖에.’

지도를 확인하고 품에 넣은 강흑성은 소매를 걷은 군복을 새삼스레 살펴봤다.역시 그렉이 준 것, 대전쟁 당시 군인들이 입던 것이라고 했다.삼백년이 지났지만 밀폐용기에 담긴 채로 발견돼 아무 문제가 없다.

‘블랙마켓에선 제법 비싸게 거래된다던데.’

주변 환경에 따라 빛깔이 변하는 것이 이 군복의 특징이다.강하고 질기며 한서에도 대비가 된, 그야말로 전투환경에 최적화된 의복인 것이다.이 군복을 기반으로 천산마갑슈트가 만들어진 거라고 그렉이 말했다.

‘빔건도 받아 올 걸 그랬나?’

생각 끝에 강흑성은 피식 웃었다.석달치 월급을 주고 퓨리엔트족에게서 샀다는 핸드건, 군복과 함께 그렉은 그걸 가져라가고 했다.하지만 사양했다. 마검을 가져간다고,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그렉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강흑성이란 존재의 불가측성을 이젠 인정하고 알기 때문이다.블루마운틴을 어떻게 때려잡는지 봤기 때문이다.강흑성이 빔건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더 권할 일이 아닌 거다.

‘패천마혈.’

고물철검처럼 보이는 마검.물가의 바위에 배낭과 같이 걸쳐 놓은 검을 강흑성은 돌아봤다.저 검은 강흑성 자신의 의지에 반응한다.살기를 품고 휘두르면 마검의 흉성이 준동한다. 피를 갈구하는 흉악한 포효다.

‘너하고 나는······’

상념을 끊는 기척을 강흑성은 감지했다.바로 반응하며 배낭을 지고 검을 잡았다.웅크린 자세로 주변의 기감을 살피며 기척의 근원을 좇았다.뭔지 모를 섬뜩한 기운, 전신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기운이 다가온다.

‘뭐냐.’

흑청빛 눈동자를 빛내며 강흑성은 마검 페천마혈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그 순간 봤다. 확하고 칼이 예기를 보이듯이 계곡에 나타난 존재다.비탈에서 비상하는 것처럼 점프해 물에 착지한 그림자, 캐리언족이다.

‘저!’

강흑성은 눈을 부릅떴다.계곡 물 한가운데 내려선 캐리언족 남자가 정상이 아니어서다.고양이족 특유의 얼굴과 유연한 몸, 누가 봐도 캐리언 족이다.그런데 눈이 네 개다.팔도 네 개다.등에는 칼날이 돌출했다.

“크르르르.”

이를 드러내며 붉은 눈알을 흉악하게 빛내는 캐리언 족, 야수족이 아니라 괴수다. 야수족 중에서 가장 약한 종족이라 야수족이라고 불리지도 않는 존재들, 그런데 지금 저자의 모습과 기운은 전혀 그렇지 않다.

‘블루마운틴처럼 팔이 네 개!’

게다가 눈도 네 개다.저런 캐리언 족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웅크린 저 몸의 등에 튀어나온 칼날들은 뭔가?저건 분명히 칼날이다.저게 어떻게 가능한가?칼에 찔린 게 아니라 분명 튀어나온 거다.

‘어?’

강흑성은 또 한 번 당황과 놀람을 삼켰다.캐리언 족이 고개를 물에 처박고 미친듯이 물을 마셔서다.마치 사흘은 물 한 모금 못 마신 것 같다. 저만큼 마셨으면 됐을 텐데 하는 데도 그치질 않는다.대체 뭔가?흑청빛 눈으로 캐리언족을 응시하던 강흑성은 조심스레 움직였다.발을 들어 옆으로 이동했다.그 순간 캐리언족이 고갤 들었다. 이를 드러내고 가라앉은 울음을 흘려낸다.하지만 달려들지 않고 다시 물을 마신다.마검 패천마혈을 내린 강흑성은 계곡 물가에 서서 캐리언 족을 바라봤다.굳이 싸울 이유도 없거니와 상대도 물을 마시는 게 목적인 게 분명한, 그걸 방해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상황, 돌아서 계곡을 벗어났다.

* * *

“왜 안 알려주셨어요?”

명희의 안타까운 분노를 받아내느라 그렉은 애를 먹었다.

“흑성이가 일부러 새벽이 떠난 거란다. 그 마음을 헤아려줘야지. 걱정 안 끼치고 다녀오려고 그런 거잖니? 자자,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해 주렴.”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는 명희를 겨우 달래고 그렉은 힘겨운 숨을 내쉬었다.처음엔 타이그란족인 자신을 무서워하더니만 이젠 화를 내는 명희다.그게 귀엽고 가엽고 그렇지만 강흑성을 생각하니 또 한숨이 난다.

‘쟤는 도대체 언제부터 흑성이를 알았다고 저러는 거야? 흑성이가 특별히 잘해주거나 살갑게 구는 것 같지도 않던데. 살려준 은인이라 이거야?’

그랙은 입을 더 비죽거리며 투덜댔다.

“자식이 나한테 이런 뒤치닥거리를 앤기고설랑, 에잉.”

해가 저물고 있다.강흑성이 지금쯤이면 가평이나 청평쯤을 가고 있을 거다.해가 저물 테니 곧 야숙을 해야 한다. 저 밖의 밤은 무섭고 흉악하다.

‘쳇, 환골탈태하고 마검까지 가진 놈을 뭘 걱정해.’

블루마운틴을 그렇게 잡아 죽이는 존재니 걱정할 필요 없다.다시 생각해도 그건 황당하지만, 여태 강흑성이란 존재를 겪은 일들이 다 그렇다.그래도 여전히 걱정을 하게 된다, 이 세상의 위험은 상상초월이다.

“흑성아, 무사히 돌아와라.”

허공을 향해 기원 같은 중얼거림을 흘려내는 그렉의 귀에 사장 박준의 고함이 파고들었다.

“뭐하냐! 저녁장사 준비해야지!”

역시 변함없는 박준은 변장을 하고 있다.혹시나 매화검문의 눈에 띨지도 모른다며, 수염을 붙이고 대머리 가발을 쓴 괴상한 모습으로 꾸몄다.그 모습을 보며 움바바족 동생 박현은 쉬지 않고 한숨을 쉬어댔다.

* * *

거대수를 올려다 본 강흑성은 해가 완전히 기우는 걸 확인하며 올라갔다.무원신풍류를 펼쳐 어렵지 않게 몸통과 가지를 차며 거대수에 올랐다. 꼭대기에서 주변을 돌아 본 후 가지 사이에 로프를 이리저리 얽어맸다.

‘됐어.’

야숙용 그물침대를 만든 강흑성은 배낭을 내려놓고 그물침대에 누웠다.삼백이가 싸준 화성식품으로 저녁도 일찍 해결했고 편하게 자는 일만 남았다. 거대수 꼭대기의 자신을 공격할 만한 위험인자는 거의 없다.

‘붉은혓바닥 원숭이들이라면 접근은 하겠지.’

괴수가 아닌 그놈들은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 무리를 지어 공격하는 건 분명히 인간에게 위험이지만, 지금의 강흑성 자신에게는 위험이 아니다.

‘푹 자고 새벽 일찍 출발하자.’

그물침대에 누워 흐린 미소를 피워내던 강흑성은 바로 눈을 떴다.

‘이건?’

기척, 기운이 느껴진다.낮에 한번 느꼈고 실체를 보기까지 한, 캐리언 족이다.

* * *

“제기랄 놈들이······!”

박현은 작두칼을 움켜잡고 신경을 곤두세웠다.부랴부랴 지하밀실로 숨게 된 상황, 귀신대가리 정찰대가 들이친 위쪽이 어떤지 모르겠다.형 박준이 원체 기름장어처럼 처신이 좋은 위인이기는 하지만 걱정이다.

“어떻게 해······!”

명희 엄마가 두려움으로 부들거리면서 안절부절이다.캐리언족 여자들을 포함한 인원 전부가 숙소에 있던 참이긴 했지만 명희와 다른 아이들은 홀에 있었다.박준이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도 도와준다며 그랬다.

“별일 없을 거요. 형님이 잘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박현이 찡그린 얼굴로 말하자 명희 엄마는 어깨를 움츠렸다.아무리 도움을 받았고 받고 있는 대상이지만 움바바족인 거다.마주보기도 무서운 얼굴로 저렇게 말하면 숨이 막힌다.그렇지만 딸 걱정은 떨칠 수 없다.

“명희가, 명희가······!”

제대로 말도 못하는 명희 엄마의 손을 캐리언족 여자가 잡았다.명희와 같이 돕는다면 홀에 있던 샤이닌의 엄마다.역시 두려운 눈으로 말한다.

“같이 기도해요······!”

명희엄마와 샤이닌의 엄마는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두 아이와 함께 있는 다른 여자아이 진숙이와 제나의 엄마도 곁에 무릎 꿇었다.나머지 캐리언족 여자 여섯 명도 합세 했다.다 함께 기도드린다.

“어, 제길 기도는 무슨······”

박현은 어색한 당황을 삼키며 옅은 짜증을 냈다.여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그렇다.하지만 기원을 올리는 대상인 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기에 거부감이 생긴다.신은 허상이며 나약한 존재들의 위안일 뿐이다.

‘종족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 다른데 신은 무슨 얼어 죽을 신.’

각기 다른 그 이름의 신이 절대신 이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이 세상. 지구에 사는 종족들의 공통된 깨달음이다. 그래서 저렇게 같이 기도한다.

“아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

현상황을 곱씹으며 박현은 계속 인상썼다.

* * *

바 앞에 얼어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아이들, 캐리언족 여자아이 둘과 인간 여자아이 둘을 말없이 응시한 브라이튼은 박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취향이었나?”

눈썹을 꿈틀한 박준은 강한 음성을 뱉어냈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만, 보이는 것하고 진실은 늘 그렇듯 다릅니다. 없는 혐의를 씌워서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참지 않겠습니다.”

브라이튼이 미간을 거칠게 꿈틀거렸다.데바족 특유의 악마 같은 얼굴에 드리운 분노는 감히 마주 보기 힘들게 흉악하다.그 살기를 뱉어낸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지금 누구한데 그따위 소릴 하는지 알고서 하는 거냐?”

확 다가서는 브라이튼, 그 손이 당장 모가지를 잡혀 비틀릴 것만 같아 박준은 움찔했다.

‘아이 개신발 샹그릴라!’

정말이지 오늘 밤은 재수 옴 붙은 날이다.예상치 못하게 들이닥친 정찰대 때문에 그마나 있던 손님들도 가버렸다.이놈들이 왜 왔는지 모르지만 명희와 아이들이 못 피했다.그나마 동생 박현과 여자들은 숨었다.

‘삼백이 자식이 넋을 놓고 있는 통에, 에이 못된 자식!’

강흑성 생각만 하는지 삼백이놈이 정찰대가 오는 걸 인지 하지 못했다.아니 그래서가 아니다, 정찰대가 의도하고 은밀하게 접근해서다.삼백이란 로봇이 있는 걸 알기에 이쪽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치한 접근이다.

‘역시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지?’

마검을 가지고 사라진, 카슨의 정찰대를 전멸시키고 도주한, 그렇게 말한 묘진위의 행방을 못 찾은 거다. 그래서 샹그릴라를 의심하는 거다.그렇게 온 길인데 아이들을 봤다.이 상황을 넘기자면 강하게 나가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뭘 어떻게 한다고?”

얼굴을 들이대고 으르렁 거리는 브라이튼의 분노는 불이 번져나가듯 커지고 있다.그 눈을 응시하고, 두렵지만 외면하지 않고 박준은 말했다.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팔려가던 아이들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같이 있게 됐습니다. 노예로 부리거나 더러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게 아닙니다. 보다시피 저 아이들은 여기서 일합니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이죠.”

브라이튼의 미간이 거칠게 곤두서는 걸 개의치 않고 박준은 계속 말했다.

“손님들에게 귀여운 웃음으로 응대하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보호자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매상에 영향을 줍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업할지 아직은 미정입니다만, 장사꾼이니까 돈을 버는 일이 목적입니다.”

브라이튼이 입을 열려는 데 박준은 남은 말을 바로 뱉어냈다.

“이걸로 피해를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뭐?”“여자와 아이들, 샹그릴라의 주인인 저와 엮어서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고, 그로인해서 생기는 기회와 이득을 다른 누군가 챙기려 한다면 참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샴 장군을 압니다.”

브라이튼의 얼굴에 처음으로 다른 변화가 생겨났다.

‘중부지구 사령관을 안다고?’

대전에 있는 화성 제7군단이다, 자신들 정찰대도 그곳의 지휘를 받는다. 그들과는 분명 군대와 정찰대라는 구분이 있지만 지구의 현실이다.

“여자와 아이들의 일은 이미 알렸습니다. 정확한 진실은 츄란족 노예상인들로부터 구한 일이죠. 아주 잘했다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정찰대들도 못한 일을 했다고요. 예, 그리샴장군은 불의를 증오하는 분이시죠.”

브라이튼은 눈동자를 미세하게 흔들다가 박준의 멱살을 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