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23화 (24/172)

혹성강호. 23. 블랙시티 춘천.

23. 블랙시티 춘천.

팔미계곡을 지나자 춘천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칠전동으로 불렀다는 오르막길 위의 동네를 지나가노라니 대전쟁 때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대공포와 군대가 있었던 자리가 폭격을 맞아 사라진 흔적들이다.

“여기가 춘천이구나.”

산자락에 서서 강흑성은 춘천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분지의 지형으로 이뤄진 도시.삼백 년 전 프락시안족과의 대전쟁 때 승리를 견인한 도시다.

‘꽤 복잡해 보이는데.’

무수한 가옥과 건축구조물들이 도시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면 저 안에 들게 된다.온의상회, 박준이 알려준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선 자치대를 찾아 출입을 허가 받아야 한다.

“가자.”

곁에 동행이 있어 그에게 말하듯, 독백을 던지고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내리막길을 따라 춘천이라는 블랙시티의 초입으로 다가갔다.예상대로 자치대의 검문소가 있다. 들고나는 통행자들이 그곳을 거치고 있다.

“신원, 목적.”

검문소의 라이피언 위병이 갈기를 흔들며 강한 시선을 던진다. 그 앞에 선 인간 남자는 춘천을 들어가려는 목적을 이야기 하지만 신원은 명확히 못 밝혔다. ID를 가진 도시민이 아니라면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통과.”

출입증을 발부받은 인간 남자가 검문소를 지나갔다. 그 뒤로 멈춰 선 강흑성은 라이피언 위병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다. 배낭에 가로지른 검을 훑어보고 강흑성의 체격을 살핀 위병이 의례적인 물음을 던진다.

“신원, 목적.”

강흑성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강흑성, 도시민이 아니라서 신분증은 없습니다. 구매할 물건이 있어서 온의상회를 찾아왔습니다.”

라이피언 위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유랑민이고, 뭘 사러 왔다 이거지?”

들고 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럴 터, 라이피언 위병은 옅은 짜증으로 뒷말을 냈다.

“원하는 물건을 구한 다음엔 자치대 본부에 가서 명확하게 증명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한 말과 내용이 틀리거나 신원이 불량한 자로 판명나면 곤란해 질 거야. 도시 안에서 머무는 동안 다른 짓거리 말고, 알았나?”

제 위치를 과시하며 엄하게 말하는 라이피언족에게 강흑성은 고갤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통과, 라는 소리와 함께 출입증을 발부받은 강흑성은 걸음을 내다 문득 뒤돌아봤다. 라이피언위병의 곁에 서서 출입증을 발부해 주는 로봇, 가슴으로 카드를 토해내는 박스로봇은 삼백이처럼 아주 오래된 기종이다.

‘저 로봇은 모델명이 어떻게 되나?’

강흑성이 바라보는 걸 느꼈을까?로봇은 고개를 돌려 강흑성을 봤다. 아무 빛도 내지 않던 눈동자가 붉은 빛을 아주 잠깐 냈다.마치 일 잘보고 잘 돌아가라는 인사 같다.그렇게 깨달아지는데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래, 너도 잘 지내라.’

마음속으로 인사를 던진 강흑성은 가던 길을 내쳐 걸었다.

* * *

임진강, 얼마나 오랜 시간을 흘렀는지 모를 저 강을 바라보노라니 기묘한 심회가 돋는다.브라이튼 자신의 종족이 지구에 정착해 살게 된 시간을 비교해 보니 그렇다.육백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한순간이다.

‘저 강이 흘러온 시간에 비하면, 지구의 세월에 대면.’

피식, 실소를 피워낸 브라이튼은 다시 강을 응시하며 심유한 눈빛을 흘려냈다.현재 이 강의 앞에 이렇게 온 이유, 현실과 임무를 곱씹었다.마검을 가졌다는 무인놈의 자취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으로 이어진 거다.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여기지.’

최근 들어 야수족을 비롯한 위험종족들이 출몰하는 곳이다.송골매를 띠워 살펴본 영상에 의하면 야수족들이 무리지어 전투를 벌이고 있다.본래 그런 것들이니 상관없지만, 싸우는 목적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한 거다.

‘뭣 때문에?’

이유 없이 싸우는 게 야수족들이지만, 그것도 옛일이다.인간들처럼 생각하고 계산하게 되면서부터는 이해득실을 따진다.소득 없는 일에 행동하지 않는 거다.그러니 이곳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가 있다.

‘노예사냥도 아니고, 돈이 되는 괴수헌팅도 아니고, 뭐지?’

미간에 내천자를 그린 채 브라이튼은 주상절리를 노려봤다.임진강의 세월만큼 오래된 세월을 함께해온 절벽에는 온갖 식물의 넝쿨이 자라고 있다.무성한 저 모습만큼이나 무성한 음모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박준 그놈이······!’

새삼 그놈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뜨거워진다.위험지역에서 술집이나 운영하는 놈이, 그렇게 하찮은 놈이 감히 데바족출신이며 북부 지구 정찰본대장인 브라이튼 자신을 협박한 거다.그렇다, 그건 분명히 협박이다.

‘그리샴 장군을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박준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런데 그렇다고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건 아니다. 그놈이 거짓말로 허세를 부린 걸 수 있다.그렇지만 그걸 확인하는 게 어렵다, 자칫하면 불똥을 맞는다.

‘정찰대를 못마땅해 하는 인물인데······’

박준과 아무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리샴 장군이 이곳으로 감찰단을 보내거나 한다면 뭐 되는 거다. 과실이나 비리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솔직히 이런 변방의 위험지역에선 실정에 맞게 운용하는 게 맞다.

‘누군들 FM대로 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정찰대를 운용하는 게 최고다.현지의 사정과 현황에 맞춰서다.그러다 보면 원치 않던 술잔을 넘길 때도 있고 예기지 않게 생긴 돈주머니를 챙길 때도 있는 거다. 그리샴 장군이 욕하는 거다.

‘전쟁 영웅, 당신만 잘난 게 아니야.’

대전쟁은 삼백년 전에 끝났지만 전쟁은 이후로도 있었다.가장 최근의 전쟁이 그것이다.대륙에서 기치한 신중화, 그 이름 아래 뭉친 인간과 야수족들의 반란을 그리샴장군이 진압했다.화성은 영웅훈장을 수여했다.

“박준, 지금은 내가 한발 물러섰다만······”

반드시 이 치욕을 갚아주겠다는 말을 뒤로 내려던 브라이튼은 눈썹을 확 세웠다. 송골매의 신호가 들어와서다. 멀티폰을 바로 켜 확인했다.

‘움바바족.’

그들이다. 그들이 은밀하게 주상절리 위 수림 속을 이동하고 있다.

* * *

고속철도가 다녔다는 교각은 블랙시티 춘천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됐다. 서울로부터 이어진 철도는 그 도시처럼 이제 흔적도 없지만 춘천엔 이렇게 남아 있다. 거대수들과 어우러진 풍경은 기묘하게 아름답다.

‘콘크리트 구조물과 방사능을 마신 거대수들의 조화라니······’

소양강 방향으로 뻗어 내려간 철길교각은 거대수들의 푸름에 뒤덮여 있다. 그 푸름 속엔 온갖 새들이 날며 지저귀고 있고 아래엔 장사치들이 있다.갖가지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의 노점거리, 그 속으로 강흑성은 갔다.

“전투화 팔아요 전투화!”

강흑성이 지나가는 걸 본 중년의 장사꾼은 전투화를 들고 더 소리친다.

“방수는 기본이고 용암을 밟아도 손상이 안 생기는 브리틀합금 밑창의 특제전투화요! 단돈 은화 두 냥! 날이면 날마다 이 가격이 아닙니다!”

은화열개가 금화 한 개의 가격이니 은화두개면 비싸진 않다.그런데 정말로 브리틀합금 밑창이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다.장사꾼이 하는 말 중에 진실로 들어야 할 것은 거의 없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었다.

“거기 청년 용사님! 전투화 좀 구경하시라고!”

소리치는 장사꾼을 무시하고 강흑성은 전투화노점을 지나갔다.바로 이어진 노점은 화성식품을 파는 곳이다.용기에 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먹거나 데워먹는 등,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들이 다양하게 쌓여 있다.

“자자, 구경하고 시식도 해 보세요. 이번에 신제품이 나왔습니다. 퓨리엔트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괴수, 캬이엔고기를 화성연구소에서 상품화해 출시했습니다. 아는 분만 아는 이 캬이엔 고기는 화성에서도 특급레스토랑에서만 손질해 파는 최고급육입니다. 한번 맛보면 절대로 못 잊을······”

힐긋 본 강흑성은 캬이엔 고기가 아닌 걸 알았다.그러면 그렇지, 말한 대로 최고급육인데 저렇게 시식용으로 내놓을 리가 없다.캬이엔은 많이 잡히지도 않고 대량사육도 안 된다.시식용 고기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똥돼지 듀란 고기에다 감미료를 친 것 같은데.’

나름의 짐작을 더듬으며 강흑성은 내쳐 걸어갔다. 노점 거리의 끝에 다다르니 정식 상점들이 이어진다. 잡화를 파는 곳부터 온갖 물품들을 거래 하는 곳들이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곳은 도검류의 무기를 파는 곳이다.

‘온의상회.’

사장 박준의 말 대로다. 찾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더니 정말로 그렇다. 상점 거리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도검류의 무기를 파는 곳은 더 없다.

‘독점이네.’

그렇다는 건 블랙시티의 내부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게 상납이든 다른 형태든, 그렇지 않으면 이 중심가에서 독점은 말이 안 된다.

‘박준 사장님 같은 사람이 주인이겠군.’

나름의 짐작으로 강흑성은 온의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애가 돌아보더니 미소 짓는다. 바로 다가와 넙죽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강흑성은 묵직한 눈빛으로 점포 안을 응시했다. 아이는 또 말한다.

“특별히 찾는 무기가 있으신가요? 말씀만 하시면 적합한 무기로 선별해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먼저 구경하시고 말씀해주셔도 되고요.”

강흑성은 간단명료하게 용건을 밝혔다.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사장님요?”“그래, 박준이 보내서 왔다고 말씀 좀 전해다오.”

기묘한 눈으로 강흑성을 올려다 본 열 살쯤의 남자아이는 바로 돌아섰다.

* * *

“푸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브라이튼은 잠수복기능을 해체했다. 멀티폰의 명령을 받은 천산마갑슈트의 부력은 바로 사라졌다. 수중이동을 가능하게 해준 헬멧도 들어갔다. 대원들을 돌아보니 모두 절벽아래 모여 있다.

“절벽 사잇길로 진입한다.”

대원들에게 지시한 브라이튼은 강물을 빠져나왔다. 도강해온 임진강의 반대편을 일별한 후 주상절리 절벽의 사이로 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은밀하고 빠르게 수림에 다다라 멈췄다. 뒤따라온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산개대형으로 움바바족을 뒤따른다.”

정찰대 세 개 팀 육십 명이 수림 속으로 귀신처럼 흩어져 들어갔다.강 건너에는 삼개 팀이 대기 중이다.북부지구 정찰대병력 열 개팀 이백 명 중에 여섯 개팀 백이십 명이 작전에 참여 한 거다.성과가 있어야 한다.

‘이런데 오두막이 있다니, 크기로 봐선 움바바족이 만든 것 같은데.’

수림이 시작되는 초입에 있는 커다란 오두막, 마치 임진강을 감시하는 초소 같은 그것을 지나며 브라이튼은 이 상황이 뭔지 다시 의문을 삼켰다.은밀히 기동하는 움바바족, 계속 몰려드는 야수족들, 분명 뭔가 있다.

-전방에 퓨리엔트족 발견.

슈트의 통신기를 통해 고막을 파고드는 부하대원의 보고, 브라이튼은 눈썹을 세우며 소총을 움켜잡았다. 동시에 미니건 사수들에게 명령했다.

“미니맘들은 앞으로 나서라.”

미니맘, 미니건을 든 대원들을 부르는 말이다.크리듐에너지벌컨포를 소형화한, 군대의 분대 지원화기로 제작된 무기가 미니건이다.저걸 발사하면 수림은 아작이 날 것이다.물론 게틀러의 벌컨이 더 위력적이긴 하다.미니건을 겨눈 대원들이 앞서나가는 뒤로 브라이튼은 걸음을 냈다.

* * *

“박준이 보냈다고?”

눈동자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온의상회 주인은 강흑성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예, 라는 대답을 들은 후에는 이렇다 할 말없이 보기만 한다.

‘무슨 일로 온 건지 용건도 안 물어 보는 구나.’

온의상회 주인의 칼날 같은 시선을 강흑성은 묵묵히 받아냈다.마음은 어서 용건을 밝혀 침을 구해 돌아가고 싶지만, 마주한 온의상회 주인의 눈길에서 모종의 예감을 느낀 터라서다. 상대는 결정을 하려는 거다.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

강흑성 자신에게 용건을 안 물어봤기에 찾아온 목적이 뭔지 알지도 못하지만, 박준이라는 이름을 대고 찾아온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러고 있는 상태가 말해 준다. 박준이란 이름이 결코 반가운 게 아니란 걸.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느릿하게 입을 연 온의상회 주인.사십대의 마른 얼굴에 형형한 안광을 내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그런데 뒷말이 나온다. 의미가 명확하다.지금 들은 말의 앞에 붙여도 뒤에 붙여도.

“박준이 말 안 해주던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강흑성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못 들었습니다.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라고만 들었습니다.”

깡마른 얼굴의 온의상회 주인은 의미모를 미소를 입가에 물었다.

“박준, 개자식.”

정말로 섬뜩한 살기를 느낀 강흑성은 미간을 옅게 좁혔고, 온의상회 주인은 용건을 물었다.

“뭘 도와주면 되나?”

찰나에 사라진 살기가 정말이었는지 어리둥절할 변화다.강흑성은 대답했다.

“침입니다, 침을 구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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