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24. 수림 속의 전투.
24. 수림 속의 전투.
“은신, 대기.”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린 브라이튼은 천산마갑슈트의 보호 속에 수림의 일부분이 됐다. 짙은 초록의 수림, 그 빛과 완벽하게 같은 컬러로 변한 슈트의 기능은 새삼 놀랍다. 체온 발산은 물론 숨소리조차 차단한다.
‘저놈들 뭐하는 거지?’
헬멧의 고글이 알려주는 거리는 32m다.그 거리에 몰려 있는 퓨리엔트 족은 정확히 마흔 명이다.긴장과 흥분한 얼굴로 서성거리고들 있다.
‘대여섯 명이 몰려다니며 사냥하던 놈들이 이젠 저렇게 무리로······’
최근의 변화, 주목하고 있는 위험조짐이다.소수로 무리지어 다니던 저들이 저렇게 다수의 조직으로 변해 가고 있다.이건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퓨리엔트족 내부에 뭔가 동기가 있거나 강력한 지도자가 생겼거나다.
‘카슨의 보고대로야.’
이곳에 퓨리엔트족이 많이 출몰하고 있고 원인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서를 냈었다.새삼 카슨이 가엾다.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죽은 건지 산건지도 모른다. 화성으로 후송됐기를 바랄뿐다.
‘치안총국에서 후송해 가긴 했는데······ 그들의 행사가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음, 그 정도 부상이면 화성에서도 손쓰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팔다리를 포함한 육체야 로봇으로 대체하면 된다.오히려 그걸 바라는 자들이 생겨날 정도로 요새는 인기다.바이오재생육체보다는 그게 낫다는 인식이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해 있다.
‘움바바족놈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생각을 눈앞의 현장으로 돌리며 브라이튼은 눈동자를 빛냈다.애초에 이 수림으로 진입한 게 그놈들 때문인데 퓨리엔트족만 보이고 있다.그래서 불안한 예감이 스멀거린다.여기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진돗개를 먼저 투입할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를 브라이튼은 삼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진돗개를 통해 명확히 확인 한 후에, 그 뒤를 따라 진입하는 건데 하는 후회다.그런데 진돗개는 이렇게 울창한 수림 속에선 간혹 오작동을 일으킨다.
‘로봇 개들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게 아니야.’
화성연구소에서도 원인을 못 밝히는 일이다. 현장에서 운용하는 정찰대와 군대에선 추측하고 짐작한다. 수림의 에너지가 작용해서 그런 거라고.
‘거대수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그 부분에 착안해서 요사인 거대수에너지 연구를 시작했다는 소릴 들었다. 지구에서 크리듐을 계속 생산해 내는 이상 화성에서 에너지가 부족할 일은 없지만, 지구가 망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만일을 대비함이다.
‘아무런 부작용 같은 게 없는 에너지가 크리듐 에너지지만······’
뭐든 많을수록 좋고 예상외의 결과가 닥칠 때를 대비하는 거다.
“열화상 모드로 변환 한다.”
대원들에게 지시한 브라이튼은 손목의 멀티폰을 조작했다.고글 안쪽 모니터엔 즉시 붉은 체열을 발산하는 퓨리엔트족들로 가득 찼다.그런데 다른 존재들이 포착됐다.수림 안쪽에서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다.
‘움바바족!’
그들이다, 저 커다란 형체를 모를 수 없다. 그들이 퓨리엔트족을 공격하는 거다.아니 더 정확한 상황은 움바바족이 퓨리엔트족을 쫓아오는 거다.캬이엔을 탄 다섯 명의 퓨리엔트족이 사력을 다해 도망쳐 오고 있다.
‘뭐?’
브라이튼은 눈을 치떴다.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전후를 연결해 알 수 있는 건 단편적이다.저 앞에서 저렇게 긴장한 모습으로 있던 퓨리엔트족은 도망쳐 오는 놈들을 기다린 거다.이 상황이 대체 뭘까?브라이튼의 의문을 무시하고 움바바족과 퓨리엔트족의 전투는 시작됐다.
* * *
“이거 마셔요 형.”
준후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웃는 얼굴로 물 컵을 내민다. 맑은 물이 가득 든 컵이다.
“고맙다.”
덤덤히 고개 끄덕인 강흑성은 물 컵을 받고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춘천이 원래 물로 유명한 곳이어선지 물맛이 아주 좋다.박준 사장이 자랑하는 샹그릴라의 우물 맛도 좋지만 이 물도 좋다. 이건 도시의 물이다.
“사장님이 구해준다고 하셨으니까 기다리면 될 거예요.”
준후의 안심하란 미소에 강흑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박준 사장을 향한 적개심과 살기를 대했을 땐 틀렸구나 했었는데 정말 다행이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라고······’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비용은 얼마가 든다든지 하는, 요구하는 것도 하나 없이 받아 들였다.돈이야 블루마운틴 가죽을 가져왔으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 하지만 온의상회 사장은 말이 없다.
“이렇게 일찍 문을 닫아도 되는 거니?”
강흑성은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온의상회는 가게 문을 닫았다.사장은 어디론가 나갔고 준후와 옥상에 올라온 참이다.점포건물들이 연이은 옥상엔 차양막이 쳐 있고 평상이 있었다.
“사장님 맘이죠 뭐.”
씩 웃는 준후를 보고 강흑성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주인 맘이지.’
주억거리던 고갯짓을 멈추고 강흑성은 준후에게 물었다.
“아직 사장님 이름도 모르는데, 알려 줄래?”
그게 무리한 일이 아니면, 이란 강흑성의 눈빛을 응시하고 준후는 대답했다.
“최창수요.”
그렇군, 하며 강흑성은 새삼 이름이 가진 의미를 되새겼다.자신의 이 이름도 그렇고 박준 사장도 그렇지만 온의상회 주인의 이름도 한반도식이다.서울처럼 사라진 이 땅의 옛 나라 대한민국사람들의 후예인 거다.
‘아버지도 한국인, 그 후손인 걸까? 그렇겠지. 그러니 내 이름이 강흑성이지.’
준후에게 시선을 돌린 강흑성은 궁금한 눈으로 물었다.
“넌 여기서 언제부터 일하게 된 거니?”
준후는 총명한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씩 웃는다. 강흑성이 묻는 이유를 안다는 듯이.
“사장님이 길러주신 거예요, 여기가 집이죠.”
준후가 내려다 만 말, 삼켜버린 게 뭔지 강흑성은 알았다. 온의상회 주인 최창수가 아버지라는 소리, 준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산다는 걸 알았다.
‘그렇구나, 이름도 당연히······ 최준후.’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던 강흑성은 미간을 좁히며 평상에서 일어섰다.노점거리 쪽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행색이 시민들과 다르다. 사냥꾼이나 유랑민 같은 복장, 피풍의를 길게 둘렀다.
‘살기!’
여섯 명의 사내들, 인간과 츄란족과 라이피언족까지 낀, 일행이 분명한 자들이 온의상회 앞을 지나갔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 금은방이 있다.
‘강탈?’
금은방, 정식금화나 은화가 아닌 금과 은을 사고팔며 취급하는 곳이다.저곳을 노리는 게 분명하다, 저 살기와 흥분된 숨소리들은 확실하다.그래서 황당하다. 블랙시티 춘천의 안에서 이런 일을 볼게 될 줄 몰랐다.
‘블랙시티를 터는 자들이라니!’
놀란 강흑성이 평상에서 일어서는 순간 일은 벌어졌다.여섯 명의 일행, 금은방을 노리고 다가간 자들이 일제히 피풍의를 젖히며 무기를 겨눴다.w-2000소총과 복합광탄 발사기로 무장한 강도단이다.그들의 머리위에 드론이 나타난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다.근두운이란 이름의 드론, 강도단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불을 뿜었다.미니건의 불벼락이다.콰르르르르, 귀를 찢는 소리에 눈을 부릅뜬 강흑성은 그 광경을 봤다. 금은방 앞에서 춤을 추며 흩어지는 여섯 명의 강도단, 참혹한 최후다.
* * *
“거리를 벌려라.”
속삭이듯이 명령을 내린 브라이튼은 뜨거운 눈빛을 내며 전투를 지켜봤다. 움바바족의 기습 같은 공격으로 시작된 싸움, 치열하고 무섭게 전개되고 있다. 역시 숲에선 움바바족이 무적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저 큰 몸으로 저렇게 움직이다니······!’
3m거구의 움바바족들은 표범처럼 날래고 맹호처럼 강하다.커다란 작두칼로 뿜어내는 칼빛은 나무들과 함께 퓨리엔트족을 동강내고 있다.그런데 퓨리엔트족도 역시 만만치 않다. 소총과 장도로 무섭게 대적한다.
으워엉!
움바바족 일인이 괴성을 지르며 퓨리엔트족의 장도를 작두칼로 후려쳐 동강냈다. 그 즉시 작두칼을 버리더니 퓨리엔트족과 맨손 대적한다. 싸움에 미친 움바바족의 특성, 퓨리엔트족은 권각술을 펼쳐 맞대응한다.
‘무천문계열 무공을 익힌 놈이구나.’
퓨리엔트족이 펼치는 무공은 정순하지 않지만 분명 그것이다.대전쟁 때 멸망한 십대문파 중의 한곳이 무천문.고무예인 태권도과 가라테를 기반으로 한 그 문파의 실전격투 무예다. 뻗어내는 손발이 흉기와 같다.퍽퍽, 움바바족이 맞는 소리가 선명하다.그렇지만 퓨리엔트족의 권각은 강력한 장갑 같은 움바바족이 근육 위를 강타할 뿐이다.괴성을 연거푸 지른 움바바족이 전차처럼 밀고 나오며 팔꿈치를 휘돌려 찍는다.
‘팔극권!’
브라이튼은 눈을 치떴다.움바바족이 지금 펼친 한수는 분명 팔극문의 팔극권이다.무천문처럼 대전쟁 때 멸문한 십대문파중의 한곳이다.팔극권을 바탕으로 펼치는 그들의 무예는 프락시안족에게 두려움을 줬다.
‘저 무공은 처음 보는 데······!’
무천문의 무천신권이나 무천도검술처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천문은 생존자들이 멸문과 함께 흩어져 어지러운 계파를 남기다 지리멸렬한 상태, 그 결과로 근본이 사라진 거리의 무공처럼 자취가 남아 있는 상태지만 팔극문의 팔극권은 다르다. 그들은 뿌리가 사라졌다.
‘대전쟁 때 프락시안 족의 공습으로 본문이 먼지처럼 흩어진 문파의 무공이······’
외부에서 활동 중이던 문파의 제자들도 거의 없었다.제일 늦게 대전쟁에 합류를 선언한 문파여서다.그렇지만 멸문,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거다.그런데 지금 그 문파의 무공을 보고 있다. 저 공격은 분명 팔극권이다.
‘팔극봉추!’
수련자의 숙련도와 깨달음 여하에 따라 위력이 천지차이라는 초식, 영상으로 봤던 그것이 분명하다. 움바바족은 역시 시늉만 내는 수준이다.그렇지만 타고난 신력의 육체와 불굴의 투쟁심이 퓨리엔트족을 몰고 있다.
‘움바바족이 전부 팔극권을 사용하고 있구나······!’
한 박자 늦은 깨달음으로 브라이튼은 눈동자를 빛냈다.수림의 일부가 돼서 거리를 벌리고 접전을 지켜보는 지금 온갖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사라진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는 움바바족, 흉악스러운 이 싸움의 원인.
‘쓸어버리고 확실히 알아보는 게 답이겠지.’
섬뜩한 안광을 헬멧의 고글 밖으로까지 풀어낸 브라이튼은 명령했다.
“공격 한다.”
천산마갑슈트의 은폐기능을 풀고 일어선 브라이튼은 수림에서 갑자기 떨어져 나온 귀신같았다. 그런 형상들 육십 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저게 근두운이에요.”
동요 없이 말하는 준후를 강흑성은 휘뜩 돌아봤다.원반 모양의 비행체, 준후만한 크기를 가진 저 드론이 방금 금은방을 털려던 강도단을 몰살했다.흔하게 있는 일이고 자주 본 때문인지 준후는 담담히 말한다.
“도시 외곽에 여기저기 개구멍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런 자들이 계속 들어온대요. 검문초소를 더 세우고 경비망이 뚫린 곳을 막아도, 잡지도 않고 저렇게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해도 침투가 계속 된대요.”
그렇다는 거다, 요사이 블랙시티 춘천의 상황이다.듣고 봤지만 놀랍다.블랙시티로 알려진 춘천에 저렇게 침투해 들어와 백주대낮에 강도질을 한다는 게 그렇다. 물론 저들은 내일이란 게 없는 자들이지만 황당하다.
“시장이 병중이거든요. 위독하데요.”
강흑성의 표정을 보고 눈치 챈 듯 준후는 내막을 말했다.
“후임 시장이 되기 위해서 자리싸움을 하는 거래요.”“자리싸움?”
되물음을 내고 강흑성은 의미를 깨달았다.말 그대로 현상 그대로다.차기 시장을 노리는 유력자들이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거다. 외부의 불온세력들을 불러들여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그렇게 되도록 손쓰고 있다.
“자치대장하고 부시장이 제일 유력하대요.”
온의상회 사장 최창수의 이야기, 그에게 들은 말을 준후는 하고 있는 거다.
“그 두 사람이 가진 권력이 제일 크고 막강하대요. 양보나 타협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피터지게 싸울 거라고 해요. 시장이 죽더라도, 후임시장을 지정하고 눈을 감아도 싸움은 안 그칠 거래요. 인정하지 않을 거래요.”
정해진 싸움, 춘천이 피로 물들 시간이 임박해 있다는 걸 강흑성은 깨달았다. 위독한 시장이 후임 시장을 임명한다고 해도 그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불복하면 그만, 블랙시티의 한계다.
‘화이트시티처럼 투표로 지도자를 뽑지 않는 이상.’
어머니가 생전에 해주신 이야기, 도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제 겪고 있다. 적호문 후예 ‘미래’에 잡혀 사는 동안에도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래도 도시 안 사람들은 도시 밖의 유랑민들에 비교할 수 없어.’
선택받은 이들, 도시에 사는 이들의 삶이란 그런 거다. 저 밖에서 사냥당하고 잡아먹히는 비참한 삶을 이들은 어렴풋이 상상만하지 알지 못한다.
‘비뚤어지고 기울어진 세상, 잘못된 세상.’
마음속에 근원적 분노가 차올라 강흑성은 뜨거움 숨을 삼키고 삼켰다.
“어? 전복 아저씨네?”
사람들이 몰려와 강도단의 몰살을 구경하는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가죽으로 된 경갑주로 온몸을 무장한, 등에는 장도를 걸쳤고 허리엔 핸드건을, 가슴에 모은 두 손엔 에너지빔 소총을 품은 사내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