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29. 돌아가는 길.
29. 돌아가는 길.
누더기가 된 돼지고기 봉투를 받아들고 준후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고기가 이렇냐는 물음의 눈, 그렇지만 이내 깨닫는다. 강흑성과 전복의 차림이 엉망이란 걸 보고, 폭발테러를 연결했다.
“팔호광장에서 조금 놀았다.”
전복이 선수 치듯 말하며 준후의 머릴 마구 헝클며 쓰다듬었다.그 순간 안에서 최창수가 나왔다. 팔호광장 테러의 상황이 시청에서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오고 있는 상황, 통행금지 명령이 막 떨어진 참인 거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시릿하게 빛나는 최창수의 눈을 본 전복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최창수는 더 강한 안광을 쏘아냈다. 그 눈을 마주 응시하며 눈싸움하듯 응시하던 전복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입맛을 쩝 하고 다신 후 입을 열었다.
“블랙블러드 살수 놈이 매화검문 노예매수자들을 공격했다.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던 것뿐이야. 물론 블랙블러드 살수는 죽였지. 아아, 내가 안 죽였어. 그래, 그런 놈을 본 것도, 무슨 짓을 한 건지 안 것도 우연으로 치고 왔어야 했는데, 여기 이 젊은 친구가 피가 뜨거워서 말이지.”
최창수의 시선은 강흑성에게 돌아갔다. 시리게 빛나는 무거운 눈이다. 그 속엔 놀람과 경계와 긴장, 바로 내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형?”
준후가 놀람을 삼키며 목소릴 냈다.열 살 준후도 엄중한 일임을 아는 거다. 게다가 강흑성에게 놀랐다.강해보이는 형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일을 할 거라곤 몰랐던 거다.그에 반응해 강흑성은 입을 열었다.
“살수가 우리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덤덤한 음성으로 입을 연 강흑성을 전복이 바라봤고 최창수는 여전히 시리고 무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준후는 전복과 최창수와 강흑성을 번갈아 보며 침을 삼켰다. 그들의 시선 앞에서 강흑성은 뒷말을 이어냈다.
“죽이려는 데 당할 순 없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낸 강흑성의 말, 당할 순 없다는 한마디에 든 것을 전복과 최창수는 읽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 거다.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일, 다른 자들의 폭력과 칼날에 무고하게 희생되는 현실, 그런 걸 증오해서가 아니다. 살기 위해서다.그래서 그랬다는 거다.참지 못하고 뛰어들어 블랙블러드 살수를 죽였다는 거다.저 눈이 그렇게 말한다.강흑성이란 이 청년이 속에 품은 칼이다.이 청년의 삶과 경험이다.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빛내던 최창수가 입을 열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차갑고 비정하며 동시에 서글프고 안타까운 결론과 현실이다.오늘 밤에 희생당한 이들만이 일이 아니란 거다.잘 안다, 그런 이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다. 약한 자들, 그들은 지금도 이 지구의 어디에선가 죽고 있다.
“세상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죽고 먹히고 있지. 그 누구도 그들을, 모든 불행한 자들을 돕고 구할 수 없다. 그건 신도 못한다. 망해버린 지구에서 숨 쉬는 자들은 스스로 생을 책임져야 한다. 못하면 죽는 거다.”
그렇게 벌어진 일이 오늘 밤의 일이란 결론, 모호하면서도 분명한 의미이고 연관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일이란 의미가 들었다.차가운 음성으로 연이어 낸 최창수는 더 차갑게 뒷말을 뱉어냈다.
“속에 뭘 품었든 네 거다. 네 거는 네가 관리하는 거다. 제어하지 못하면 주변에 피해를 준다. 그렇게 되면 너는 손님이 아니라 적인 거다.”
단호하고 명료한 경고, 강흑성은 알아들었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도 이미 알고 있다.그러나 그 순간 참을 수 없었다.철창 속에서 숯덩이가 돼 죽어가는 사람들, 노예로 잡힌 이들의 비명을 듣고 돌아버리기 직전이었지만 참았다.그런데 놈이 강흑성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에 결국 폭발했다.
“죄송합니다.”
강흑성은 고개를 숙였고 최창수는 돌아서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아침이 되면 돌아가라.”
내실로 사라져 버린 최창수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강흑성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바깥은 비상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자치대가 기동중이다.블랙시티 춘천의 밤을 흔들고 있는 비상사태, 잔혹한 세상의 밤이다.
“자자, 우린 하던 거 마저 하자고.”
전복이 고기봉투를 든 준후를 밀며 옥상으로 향했다. 준후는 어어 하며 밀려갔고 강흑성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축객령을 받은 상황, 어디서든 밤을 보내고 아침에 떠나야 한다. 옥상이 맞춤한 장소일 거다.
“배터지게 먹어보자!”
전복의 호기로운 소리 속에 밀려간 준후도 어느새 숯을 들추고 있었다.
* * *
신음 속에 고열이 오르기 시작한 박현은 이내 인사불성이 됐다. 그 곁에 앉아 잘려나간 다리를 지혈하고 상처를 동여맨 박준은 이를 갈았다.
“귀신대가리 이 죽일 놈들······!”
무슬란은 박준의 이가는 숨을 들으며 안타깝게 고개를 돌렸다.이미 내막을 다 이야기 한 상황, 자신의 가슴속에 든 원한은 더욱 크고 뜨겁다.눈앞에서 부족사람들이 몰살당했다.그걸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크리듐을 차지하려고 한 짓입니다.”
무슬란의 육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뒤로 두고 박준은 박현만 내려다 봤다. 세상이 흉악하다고 말하는 종족인 움바바족 동생, 피를 나눈 친형제는 아니지만 피보다 진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자란 형제다.
‘현아······!’
3미터 거구의 육체를 가진 동생은 정확히 열 살이 되던 때부터 더 이상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때부터 머리하나씩 크기 시작하더니 이만큼 커졌다. 그런 동생인데 지금 왼다리가 잘린 채 돌아왔다.
“의사에게 보여야 합니다.”
거듭된 무슬란의 말, 박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러고 싶기에 이를 더욱 악물었다.그런데 의사라면 블랙시티 춘천 같은 곳에 가야 한다.의식이 없어져 가는 박현을 데리고 거길 가는 일은 정말 어렵다.
‘차에 트레일러를 연결해서 태우고 가면 되겠지만······ 정찰대 놈들이 수색을 하고 있을게 분명한데, 만에 하나라도 놈들과 마주치면 끝장이야······!’
뜨거운 숨을 거듭 내쉬고 침을 연속해서 삼키며 박준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러노라는 데 그렉이 들어왔다. 지하실 분위기를 살피고 말한다.
“흑성이가 도움이 될 겁니다. 내일이면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박준은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그래! 흑성이가 돌아오지!”
절망 속에서 희망의 줄을 붙잡은 박준은 박현에게 말했다.
“현아 힘들어도 버텨라. 거의 죽어가던 자도 탕약으로 살려낸 놈이 그놈이다. 흑성이가 돌아오면 방법이 있을 거다. 하루 이틀만 참고 버텨.”
박준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박현은 팔을 꿈틀거렸다.
* * *
부옇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고기 먹던 평상에 늘어져 잠이든 전복은 코까지 골며 잘 자고 있다. 성긴 천막이 이슬을 막아주긴 했지만 야숙이나 같은데도 잘 잔다. 저렇게 아무데서나 자고 먹는 삶을 살아온 거다.
‘이제 가자.’
배낭을 챙기고 일어선 강흑성은 준후에게 간다고 인사를 할까 하다가 계단을 내려갔다.일층점포의 옆문으로 나가는데 기척이 느껴졌다.돌아보니 내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최창수, 그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문도 열지 않은 최창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한 강흑성은 자치대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춘천을 들고 나는 주관문인 온의동과 칠전동 사이에 있는 자치대, 아직 새벽이건만 불빛이 환하고 분주한 광경이다.
“신고하러 왔습니다.”
강흑성이 자치대원 하나를 향해 말하자 여럿이 한꺼번에 돌아봤다. 어젯밤의 사건으로 인해 비상상태를 유지하는 터라 다들 눈에 핏발이 섰다.전복의 말로는 자치대의 소행이라는데, 춘천의 내홍은 어떻게 되는 걸까.
“뭔데?”
강흑성은 침이 든 상자를 꺼내 열어보였다.
“구하려고 한 물건입니다. 구매해서 이젠 돌아가려고 합니다.”
기묘한 눈으로 침과 강흑성을 번갈아 본 자치대원이 손으로 가리켰다.
“안에 들어가서 카드반납하고 확인증 해달라고 해.”
자치대원들은 더 이상 강흑성에게 관심 가지지 않았다.강흑성은 자치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너무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 곳에 박스형로봇과 행정대원 한명만이 있었다.카드를 내밀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신고하러 왔습니다.”
행정직원은 힐긋 강흑성을 보고 내민 카드를 받아들더니 박스형 로봇의 가슴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로봇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작동했다.
“확인증.”
행정직원이 명령하자 카드를 삼킨 박스형로봇은 작고 네모난 종이를 뱉어냈다.확인증이다. 그걸 받아 들고 강흑성은 돌아 나왔다.그런데 누군가 시선을 던진다.돌아보니 그자다. 어젯밤에 시비를 걸던 자치대원.찡그린 표정을 지은 자치대원은 강흑성을 알아보자마자 몸을 돌렸다.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상대로부터 멀어져 가는 자치대원, 그를 응시하던 강흑성은 자치대를 나왔다. 춘천의 아침을 등지고 귀로에 들었다.
* * *
오한으로 떠는 박현의 상태를 지켜보며 박준은 밤을 새웠다.여자들과 아이들이 드나들며 걱정하고 간호를 했지만 박현의 고열은 심해져만 간다.여자들이 있는 게스트하우스엔 카이오란 다른 여자 환자도 있다.
‘흑성아, 어서 와라.’
박현은 간절하게 강흑성이 돌아오기만을 기원했다.살면서 이처럼 간절하게 바라고 기원한 적이 없다.카이오란 이름의 캐리언족 여자를 구하기 위해 블랙시티 춘천에 간 강흑성, 그 마음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다.
‘같겠지. 아니 그놈 마음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박준 자신은 동생 박현의 생명이 위험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거다.그에 반해 강흑성은 전혀 상관없는 남을 위해 블랙시티 춘천엘 갔다.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미친 짓이다.그런데 강흑성은 절대 미치지 않았다.
‘뭐 다른 게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그놈은 뭔가 달라.’
그렇다는 걸 느낀다. 아니 이젠 확실히 알고 있다.테스라의 독주머니를 맨손으로 잡아 뽑는 놈, 마검의 기운을 먹어치운 놈, 마인 묘진위를 이상한 탕약으로 낫게 해 준 놈, 그놈은 영웅놀이를 하는 게 아니다.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하는 놈.’
그런 존재가 강흑성이다.침을 구하러 춘천엘 갔고, 최창수가 분명 도와줬을 거다.박준 자신의 이름을 들은 순간 죽이려 했을 지도 모른다.그렇지만 강흑성이라면 안 죽을 거고 최창수라면 안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그래서 온의상회로 최창수를 찾아가게 했다.오늘 내일 돌아올 거다.
“어서 와라······!”
박준은 간절한 숨을 토하며 박현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삼백이의 신호소리가 지하실 스피커를 통해 퍼져 나왔다.
* * *
귀를 파고드는 휘파람새의 울음 같은 삼백이의 신호, 강흑성은 반가운 마음에 무원신풍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달릴수록 익숙해지는 신법,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그런데 삼백이가 보내는 신호음이 뭔가 다르다.
‘뭐지?’
미간 좁힌 강흑성은 삼백이의 형상을 봤다.저편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마주 달려온다.그런데 붉은 빛을 내는 눈동자가 빠르게 빛난다.위험과 걱정을 담은 눈빛, 삼백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강흑성은 알았다.
“사장님 동생이?”
멈춰선 삼백이와 눈을 마주했던 강흑성은 바로 샹그릴라를 향해 달렸다.
* * *
“어떠냐?”
가는 떨림을 담은 박준의 물음, 강흑성은 박현의 맥을 짚고 상처 부위를 살폈다.
“지혈과 응급처치를 잘했습니다.”
강흑성은 무슬란을 돌아봤고 무슬란은 묵직한 눈빛만 흘려냈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데?”
초조함으로 거듭 묻는 박준에게 강흑성은 그렉을 한번 응시하고 대답했다.
“사혈을 빼내고 혈도타통을 할 겁니다. 그 후엔 탕약으로 체내의 악기를 제거하고 원기를 보하며 정양해야 합니다. 한 달, 그 정도면 될 겁니다.”
한 달이라고 말한 강흑성을 박준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봤다.맥을 짚고 상세와 이후 회복경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의원이다.열여덟 살의 하프타이그란이 하는 말, 그러나 이미 증거를 보았다.
“흑성아, 너만 믿는다. 내 동생 현이 꼭 좀 낫게 해다오.”
강흑성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말하는 박준, 그렉과 무슬란은 고개를 모로 돌리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강흑성은 담담한 말로 거듭 확신을 줬다.
“안 죽습니다. 제가 안 죽게 할 겁니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강흑성은 필요한 것들을 찾기 위해 바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