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혹성강호-32화 (33/172)

혹성강호. 32. 데빌그라운드.

32. 데빌그라운드.

생각보다 손쉽게 재료들을 구했다. 광물독인 혈사암은 지나온 암석지대의 작은 협곡에서 찾아냈고, 식물독의 주성분인 오지팔엽초는 수림이 끝나는 곳에서 캤다. 이제 남은 건 야무치의 독, 놈의 어금니를 뽑는 거다.

‘다른 필요한 재료들도 거의 다 채웠고.’

배낭을 확인한 강흑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수림지대를 벗어난 터라 하늘을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저 푸른 하늘이 굽어보고 있는 앞 쪽, 초원이 펼쳐진 저 너머에 다시 원시림이 시작된다.저곳이 죽음의 땅이다.

“데빌그라운드.”

묵직한 숨으로 그 이름을 흘려낸 강흑성은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명심해라, 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면 절대로 발을 들여선 안 되는 곳이다.’

디디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는 곳이라 했다. 온간 흉악한 것들과 상상하지 못할 위험이 도사린 곳, 지나온 수림지대의 위험은 재롱 같은 곳인 거다.바로 그 위험 중 하나, 대표 괴수라 할 야무치를 잡으러 간다.

“어머니, 지금은 들어가도 될 때라고 판단합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강흑성은 담담히 말했다.어머니가 경고하신 말은 어린 강흑성, 힘없는 존재일 때다.지금은 그렇지 않다.때가 이르러 참된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다. 아버지의 영상과 기억이 도와주고 있다.

‘환골탈태까지 했습니다.’

그게 환골탈태가 맞다면 분명 강흑성 자신은 완전히 달라진 존재다.열여덟이 됐는데도 장작처럼 말라 열두어살 어린애 같던 모습이 이렇게 변한 거다.패천마혈의 마기를 흡수했고 아버지의 무공을 펼쳐내고 있다.

‘그분이 아버지가 맞다면.’

다 맞다.강흑성 자신은 활골탈태를 했고 기억으로 떠오른 그 남자는 아버지가 분명하다.어미니 말씀대로다.때가 이르렀고 아버지가 인도한다.

“데빌그라운드, 내 발을 잡진 못할 거다.”

흑청빛 안광을 풀어내며 결의를 던진 강흑성은 걸음을 냈다. 초원지대로 향하는 그 움직임을 삼백이가 따라갔다. 하늘엔 악마새들이 날았다.

* * *

“어?”

그렉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카이오란 이름의 캐리언족 아가씨가 밖에 나와 있어서다. 이제 해가 막 뜬 시간인데 명희와 샤이닌과 제닌과 진숙이와 나왔다. 병아리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뒤쪽 밭으로 간다.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옅은 황당함과 경탄을 품은 눈으로 그렉은 새삼 강흑성을 떠올렸다.병을 고치게 하겠다더니 정말로 그렇게 한 거다.탕약을 한 달은 먹어야 한다고 그랬는데 벌써 저렇게 움직이고 있다.물론 아직은 약해 보인다.

“창백한 거 빼고는 거의 다 나은 거 같잖아?”

거듭 경탄어린 음성을 흘려내는 그렉의 뒤로 박준이 다가왔다.

“저 아가씨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냐?”

그렉처럼 놀람과 옅은 경탄이 든 눈빛과 목소리.

“그러게요? 그런데 되니까 움직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 놀랄 노자네요. 하루 만에 저렇게 달라지다니 말이죠. 동생도 저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말해놓고 그렉은 흠칫했다. 박현은 왼다리가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부상이야 털어낼 테지만 다시는 이전처럼 걸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거다.

“방법이 있을 거야.”

이가는 숨으로 중얼거리듯 뱉은 박준, 그 얼굴을 그렉은 조심스레 응시했다.방법이란 말에 든 의미를 곱씹으면서다.분명히 박현의 절단된 다리를 거론한 거다.불구가 된 그 다리를 이전처럼 만들 방법이 있다고?

‘혹시?’

미간 좁히는 그렉의 귀로 박준의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기계다리를 이식하는 거야.”

사이보그, 박현을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다.다리 한쪽만이니 사이보그라고 하기엔 과한 표현이지만, 중요한건 기계다리를 구하기도 힘들고 이식하는 건 더 힘들다는 거다.그런 일은 중부지구인 대전에서나 가능하다.

“사장님.”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렉은 침을 삼키며 뒷말을 이어냈다.

“마음은 알겠지만 정말 위험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아시죠?”“알아, 중부지구는 블랙시티처럼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니까.”

그런데도 기계다리 이식을 말한 건 그만큼 박준의 마음이 간절하고 강하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렉은 의문이 더 커진다.

‘알면서 그런 소릴 합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그 말을 던진 그렉은 박준이 이어내는 말을 들었다.

“대륙으로 가면 된다. 거긴 방법이 있어.”

그렉은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대륙?’

어딜 말하는 지 안다.중국이란 나라가 있었던 땅, 신중화의 기치로 반화성전쟁을 일으켰던 자들의 땅이다.이름 하여 대륙전쟁.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중부지구 사령관 그리샴이다.그가 승리를 이뤄낸 그 땅을 말함이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황당함과 놀람을 품은 그렉의 눈을 돌아보지 않고 박준은 수림을 응시하며 말했다.

“거긴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온갖 것들, 그 말에 든 크고 깊은 의미를 그렉은 감지했다. 가보지 않은 땅이지만 무수한 소문들이 풀어져 나오기에 아는 곳, 짐작이 뒤따른다.

“기계다리를 구하고 이식수술을 받는 것쯤은 어렵지 않아.”“거길 간다고요?”

놀란 그렉의 반응을 무시하듯 박준은 차분하게 말했다.

“서해바다를 건너가면 된다. 그것도 어렵지 않아.”“아니 사장님?”“방법은 그것뿐이야. 현이를 저렇게 다리병신으로 살게 할 순 없다.”

격한 표현이 나왔다. 아무리 막말과 욕을 잘하는 사장 박준이지만 다리병신이란 말 같은 건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가 박준의 과거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지만 모른다. 그런데 이제 나온다.

“대륙에 대해서 나는 잘 알아.”

그렉은 좁힌 미간에 더욱 강한 골을 만들었다.

‘잘 안다고?’

어떻게 잘 아는지 박준은 말한다.

“그 더러운 땅에서 이십년을 굴렀다. 그래, 대륙전쟁의 한가운데 나는 있었지. 그 지독한 전쟁에 희생된 이들······ 정말로 지겹게 보고 겪었다.”

묵직한 숨으로 흘러나오는 회한, 박준이 던지는 눈길 속에 든 무게를 그렉은 느꼈다. 다른 이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겪은 자만이 아는 무게다.

“열여덟에 입대했다. 현이가 제 종족에게 돌아가고 난 직후지. 무엇 때문에 입대한 건지 지금도 잘 헤아려지지 않지만, 그때는 그래야 했어.”

아스라한 시선을 수림 쪽으로 던지며 박준은 계속 이야기했다.

“1군 산하 특전사에 배속돼 싸웠다. 신중화인지 지랄인지를 외치는 미친놈들하고 미치게 싸웠지. 그것들 정말로 지독했다, 대륙에 중화를 다시 피워내겠다는, 화성을 거꾸러뜨리겠다는 헛소리를 신앙으로 삼은 것들이었지.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핵심세력이라서 무섭기도 한 놈들이었어.”

허탈한 숨을 이어내며 박준은 피식 웃었다.

“그런다고 지들 뜻대로 되겠냐? 아주 오랜 옛날에도 그랬다던데, 중화를 외치는 족속들은 편협하고 왜곡된 가치로 세상을 호도하고 해를 끼치던 것들이라고 하더라. 신중화도 마찬가지였어. 그것들이 화성에 반기를 든 이유는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지. 지들 욕심 때문이었지.”

다 아는 이야기, 신중화는 결국 패망했다.

“어떻든 대륙은 이십년의 대륙전쟁을 겪으면서 아수라장이 됐지. 그 속에서 뒹굴며 난 많은 걸 봤다. 서른여덟이 되는 해에 제대를 신청했지. 군대내의 인연으로 매화검문에 입문했었는데, 음, 뒤는 좋지 않았고.”

그렉은 뜨거워진 숨을 후하고 풀어냈다.그 부분은 알고 있다. 매화검문 지부장의 돈을 털어 도망쳤다는 황당한 이야기.지금도 어이가 없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보다 놀랍고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대륙전쟁이다.

‘그랬구나, 이십 년 동안 이어진 대륙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았던 거구나.’

사장 박준의 과거 내력, 이제야 알겠다. 아니 아직 정확하게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전체윤곽은 알겠다. 열여덟에 군에 입대해 전쟁이 끝나는 서른여덟까지 대륙에 있었다. 그 후엔 돌아와 매화검문과 얽혔던 거다.

‘그런 내막이면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던 거 아닌가?’

매화검문의 보복을 피해서다.

‘여기가 그런 곳인가? 음, 그렇긴 하네. 이름만 남은 서울지구의 북쪽, 데빌그라운드로 가는 길목,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 거라곤 생각 못하겠지. 군 출신이지만 무공도 모르는 인물, 죽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어.’

그런 세상이니까 라고 생각하는 그렉의 귀에 박준의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흑성이가 현이를 낫게 해주면, 현이가 운신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바다를 건너갈 거다.”

결의에 찬 박준의 눈이 흘려내는 빛을 옆에서 응시하며 그렉은 서늘해진 숨을 흘려냈다.그렇게 시선을 돌려 수림 저편을 응시했다.박준이 기다리는 강흑성이 있는 곳, 불가해한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했다.

* * *

원시림, 지나온 수림지대와 비교하기 힘들게 거대한 에너지가 전신을 압박하는 곳이다. 데빌그라운드니 당연하다 하겠다. 머리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수들, 그 가지와 잎들이 만든 수림의 그늘이 암흑 같다.

‘야무치.’

목표를 생각하며 강흑성은 원시림을 헤쳐 나갔다.놈은 대포알 거머리들처럼 늪지 주변에 있을 공산이 크다.그러니 우선 물 냄새를 좇아가야 한다.이제 해가 중천에 올라갔으니 시간은 충분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저녁 장사 전에는 돌아가야지.’

이게 무슨 근자감인지 모르겠다.그라운드웜 야무치를 사냥하는 일이다. 오늘내일에 못 찾을 공산이 크다.사냥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그런데도 가슴속에 한 푼의 불안이나 염려, 의심도 없다. 자신만 있다.

‘응?’

걸음을 멈춘 강흑성은 바로 몸을 낮췄다.뒤따르던 삼백이도 붉은 눈을 번득이며 자세를 낮췄다.기운과 냄새 때문이다.분명히 피 냄새다.

‘기운의 숫자가······!’

감각 안에 들어온 숨소리가 하나 둘이 아니다. 수십 개다.정체가 뭔지 눈에 보인다. 거대수들 사이를 비행하는 것처럼 이동하는 그림자들이 있다.

‘붉은 혓바닥 원숭이들!’

그 놈들이다.그런데 여태 봐온 놈들과 다르다. 덩치는 사람만 하고 무기를 지녔다. 조악한 수준의 칼이라고 할지 몽둥이라고 할지, 그런 것들을 가졌다.놈들이 모인 장소에는 늑대사슴 세 마리가 해체되고 있다.

‘사냥을 했구나.’

붉은 혓바닥 원숭이들이 좋아서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고기를 썰어 나눠먹는 모습을 보며, 강흑성은 고요한 숨을 흘려내다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그런데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비명 같은 울음이, 경고음이 터졌다.

끼아악!

붉은 혓바닥 원숭이가 강흑성을 발견하고 내는 소리, 강흑성은 당황했다.

‘이런!’

전방의 거대수 위에 있던 놈의 기척을 못 느꼈다. 그게 수림 안으로 불어가는 바람과 그 안에 든 거대수 에너지의 순간적 교란 때문이란 걸 모른다.

‘왜지?’

이 순간의 의문, 아직 강흑성 자신의 무공화후가 일천해서란 결론으로 반응했다. 모여 있던 붉은 혓바닥원숭이들이 밀물처럼 달려오고 있다.쾅, 무지막지한 총성이 터졌다.삼백이가 경고소리를 내는 놈에게 t-rex를 쐈다.놈의 형상이 터져 흩어진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놈들이 온다.

‘기호지세.’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말, 배워 본적 없는 어려운 문자를 이에 물고 강흑성은 일어섰다. 마검 패천마혈을 움켜쥐고 무원진력의 호흡을 냈다.

‘죽인다.’

명료한 그 의지를 흑청빛 안광으로 뿜어내며 강흑성은 달려 나갔다.머리 위에서 작살 같은 무기를 던지는 원숭이들 속으로 검은 바람처럼 들어갔다.거대수의 몸통을 차고 훠돌며 검을 후렸다. 원숭이들을 갈랐다.

‘한 놈, 두 놈, 세 놈.’

동강내는 붉은 혓바닥 원숭이들을 지나가며, 베어버린 숫자를 세며 강흑성은 검과 자신에게 집중했다. 무원도법의 무의를 되새기고 좇으며 검을 펼쳤다. 이제 걸음마를 딛는 무공, 그 초식들을 하나하나 펼쳐냈다.

‘무원일격.’

앞에서 달려드는 원숭이의 목에 무원일격의 검을 찔러 넣은 강흑성은 그 몸통을 어깨로 쳐내며 나갔다. 좌우의 두 놈을 무원진격의 베기로 갈라버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놈은 무원혈을 쳐올려 심장을 쪼갰다.

‘무원신풍보.’

거대수들을 차고 원숭이들을 베고 그 몸통을 치고 나가며 강흑성은 무원신풍보를 전개했다.원시림의 짙은 그늘 속을 흘러가는 검은 유령처럼 움직였다.그 이동의 궤적 안에서 붉은 혓바닥 원숭이들은 흩어졌다.

‘무원비천각.’

피를 먹어 꿈틀거리는 검의 힘을 제어하며 강흑성은 발을 휘돌렸다.사천왕이 비상하며 내지르는 것 같은 발차기가 원숭이의 머리통을 날렸다.그 순간에도 삼백이의 총소리는 울려 퍼졌다.그런데 다른 것이 왔다.

‘뭐!’

엄청난 기감을 감지한 강흑성은 휘돌던 몸을 멈춰 세웠다.삼백이가 총을 쏘는 모습 뒤, 거대한 그림자가 바람처럼 다가온다.삼백이를 삼킨다.

‘야무치!’

그라운드 웜의 흉악한 형상을 향해 강흑성은 전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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