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강호. 39. 인간과 야수의 사이.
39. 인간과 야수의 사이.
“후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렉은 깊고 무거운 숨을 뿜어냈다. 시시각각 더해만 가는 이 긴장과 초조함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기억하지 않으려는 기억, 봉인해버린 과거, 샹그릴라에 숨어 살게 한 지난 삶이다.
‘피하고 싶어도 이젠 피할 수 없겠지.’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며 그렉은 이를 물었다.기호지세란 게 바로 이런 거다.과거를 숨기고 도망쳐 온 삶, 그러나 이제 이렇게 다시 총을 잡아야 한다.귀신대가리 정찰대를 상대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해야 한다,
‘이건 사장형제 때문도 흑성이 그놈 때문도 아니야.’
그렇다는 걸 안다. 피하고 숨었던 삶이 다시 비틀림을 회복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굴신하고 있지 말고 똑바로 서서 마주보게 하려는 거다.
‘예전처럼 도망치지 말라는 거지. 그래봐야 숨을 곳도 없고 결국 같으니까.’
다시 또 뜨거운 숨을 뿜어내며 그렉은 주먹을 움켜쥐었다.감춰둔 기억을 떠올리며 이 현실을 삭이고 받아내는 지금, 새삼 강흑성이란 존재가 경이롭다.그가 해내는 일들이 그래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렇다.
‘반은 인간 반은 타이그란.’
강흑성은 그런 존재다.그놈을 겪으며 했던 생각이 있다.타이그란족을 영도하며 세상을 구원할 존재인 타이그라툰에 대한 전설이다.강흑성이 정말로 그런 존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아주 특별하다.
‘그렇게 태어난 것부터가.’
눈을 감고 긴 숨을 다시 뿜어낸 그렉은 천천히 눈을 떴다.힘 있게 일어서 침대 위에 올려둔 핸드건을 잡았다.퓨리엔트족에게서 산 무기, 벨트에 착용했다. 그러며 사장 박준이 한 말을 떠올렸다.미안하다던 말.
“나도 어차피 더는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중얼거림을 흘려낸 그렉은 돌아서다 말고 숙소를 돌아봤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이 방에서 푸근한 잠을 청할 수 없을지도 몰라서다. 물론 강흑성이 돌아온다고 해도 당장 싸우러 나가지는 않겠지만, 시작은 지났다.피식,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려낸 그렉은 문을 열고 나갔다.
* * *
치이잉, 숫돌이 지나간 칼이 청명한 울음을 흘려낸다. 한 몸과도 같은 무기, 세상이 작두칼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대도, 무슬란은 강하게 움켜잡았다.
“원수들의 피로 흠뻑 적셔주마.”
칼에 대고 강력한 결의를 맹세한 무슬란은 숙소에서 나오는 그렉을 돌아봤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가 홀로 들어가는 걸 보며 생각했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다. 이일은 그렉과는 상관없는 일인 거다.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건 아니야.’
그렉의 눈이 그렇다.그런 마음이라면 몰래 도망쳐도 될 거다. 그럼 박준도 굳이 잡으려 하지 않을 거다.비밀 유지를 위해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런 대상으로 안 보고 있다.무슬란 자신의 판단도 그렇다.
‘지금 결과가 말해주니까.’
그렉은 동료다. 박준은 그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사장과 직원으로서 함께 일해 온 사이라서 누구보다 잘 알겠지만, 그렉의 동기는 강흑성이라고 했다.유난히 강흑성을 챙긴다는 거다. 같은 동족이라도 과하다 하게.
‘하프 타이그란.’
강흑성은 그런 존재다. 있다고 말만 들어봤지 살면서 본 적이 없다.반은 인간이고 반은 야수족인 거다.그렉과 같은 타이그란이다. 그러니 둘은 같은 종족, 그렉이 강흑성을 챙기는 마음을 알 것 같다.그러나 이새상은 피의 뜨거움보다 제 자신이 사는 게 우선이다.그러니 특별하다.
‘뭐가 어떻든 다 함께라는 거. 시작은 했다는 거지.’
눈썹을 꿈틀거린 무슬란은 숫돌을 다시 칼날에 대고 밀었다. 청명하게 칼이 울어대는 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지하밀실의 형제에게로.
* * *
“어차피 우리가 당한다면 혼자 도망친다고 해도 결국은 잡혀서 죽임을 당할 테니까, 그래서 같이 한다는 거 아닐까?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이야?”
혈색을 되찾아 가는 박현은 나름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냈다.
“아니다. 그렉을 너도 알잖아?”
단호하게 부정하는 박준, 박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 고갯짓을 느리게 이어냈다.
“그래, 형 말이 맞아. 그런 자가 아닌 것 같아.”
오래 겪지 않았지만 느낀다. 그렉은 등에 칼을 찌르거나 할 자는 아니다. 형 박준이 직원으로 부려서가 아니다. 물론 그건 신뢰의 반은 형성한다.
‘누구도 믿지 않는 형이 믿음을 보이는 자.’
그걸 떠나서 짧은 시간 겪은 그렉은 가벼워 보이지만 속에 깊고 무거운 것을 품은 자다. 그건 분명히 그가 살아온 과거, 사연을 품은 자다.
“과거를 숨기고 있는 것 같더라고.”
짐작을 낸 동생 박현에게 박준은 흐릿한 미소를 던졌다.
“과거 없는 자가 있겠냐?”
가볍게 받은 박준은 강흑성을 이야기했다.
“흑성이 그놈이 나타났던 날······ 그렉이 그렇게 행동하는 걸 처음 봤다.”
박준은 이야기를 이어냈다.강흑성을 품으려고 하는 그렉의 행동, 그 이유가 뭘까를 더듬어 찾아낸 답이다.그건 그렉이 가진 절망 속의 희망이다.
“그렉 그놈이 어디서 뭘 하다 이곳까지 흘러온 건지 모른다. 다른 야수족과 이종족들처럼 샹그릴라에서 술을 마시던 놈, 일하게 해달라고 해서 맺은 인연일 뿐이었다. 그런데 처음 본 그날 놈의 눈을 보고 알았지.”
형 박준의 입에서 나온 절망이란 한마디, 그 두 글자의 단어가 가진 의미에 박현은 새삼 숨을 떨었다. 누구보다도 깊게 가슴에 새긴 것이어서다. 그보다 큰 원한이란 불을 같이 품었지만,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그런 놈이었는데 흑성이를 만나고부터 눈이 달라지더라.”
옅게 미간을 좁힌 박준은 허공을 응시하며 계속 목소릴 이어냈다.
“기묘하다고 생각했지. 저자식이 왜 저럴까, 저 사는 거나 챙기면서 살지 무슨 오지랖일까, 하프 타이그란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여기지만 오바하네, 그런 생각이었지. 그런데 흑성이란 놈이 답을 알려주더라.”
답, 강흑성이 만든 일들이다.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이다.
“그놈이 뭔지 이젠 알려고 안 한다. 무슨 이유로 정찰대를 치려고 하는지도 알 바 아니다. 그놈이 찾아와서 기회를 주는 게 고마울 뿐이다.”
결론을 뱉어낸 박준은 동생 박현의 눈을 응시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을 수도 있다.”
박현은 눈가를 가늘게 떨었다. 형 박죽의 말이 현실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게 정상이지······!’
귀신대가리들을, 정찰대를 상대로 싸우려는 미친 짓이다. 죽는 게 당연하다.
“죽더라도 죽이고 죽자.”
마지막 말을 뱉어내고 씩 웃는 박준, 그 얼굴을 보며 박현도 웃었다.
* * *
엄청난 굉음과 화염의 확산, 강흑성은 암반 뒤로 몸을 움츠렸다. 계곡 위까지 퍼져 오른 폭발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뭔지도 짐작했다.
‘하늘 상어?’
본적도 없고 겪은 적도 없지만 그거라고 직감한다.박현과 무슬란이 이야기 한 그것임을 알겠다.상공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릴 때 모양을 봤다.촌음의 그 순간에 확인한 무기는 모양새가 상어를 정확히 닮아 있었다.
‘퓨리엔트족이?’
강흑성은 황당한 놀람과 충격으로 눈썹을 세웠다.이건 그런 결과다. 계곡 입구에서 공격하던 정찰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하늘상어는 정찰대와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다.그런데 지금 정찰대롤 공격하는데 사용됐다.
‘정말이야!’
고개를 든 강흑성은 계곡 입구의 결과를 보며 한기를 삼켰다.
* * *
폭발풍에 밀려 바닥을 구른 브라이튼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뭐!”
외마디를 토해낸 브라이튼은 얼어붙었다.뜨거운 폭발의 화염과 열기가 훑고 지나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크리듐 광산으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 부하들이 쓰러져 있다.동강나고 뭉개진 모습으로 사방에 널렸다.
‘하늘 상어!’
발작적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 브라이튼은 몸을 떨었다.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고, 이렇게 당한 결과를 믿을 수 없어서다.퓨리엔트족이 하늘상어를 날린 거다.정확하게 계곡 입구를 노려 각도를 조정했다.
‘함정!’
처음부터 이 일은 그런 것이다.자신들 정찰대를 유인한 거다, 지원이 올 때를 기다렸다.산 너머에서 지상발사를 했다. 하늘상어의 폭발은 계곡 밖으로 퍼져 나왔다.여섯 개의 칼날도 마찬가지, 대원들을 강타했다.
“대장!”
격하게 부르는 소리에 브라이튼은 흠칫하며 현실로 돌아왔다.2팀장이 낭패한 몰골로 뭐라고 또 외친다.안 들어도 알 소리, 후속대응이다.
‘이!’
뒤늦은 분노로 브라이튼은 치를 떨었다.미니맘들과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던 4팀과 5팀이 다 쓰러졌다.슈트덕분에 즉사를 면한 대원들은 제대로 몸을 못 가눈다.폭발력을 제대로 맞은 부하들은 처참한 모습이다.
“부상자들을 수습해라!”
소리쳐 명령한 브라이튼은 나마지 병력인 1팀과 2팀과 6팀을 이끌며 전진했다.그러며 하늘을 봤다.근두운들이 정확한 사격에 맞아 추락하는 광경이다.계곡 안쪽에서 솟구친 빔, 공격하던 놈들 중에 명사수가 있다.
‘퓨리엔트족 따위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달려가던 브라이튼은 눈동자를 경직했다.계곡 안에서 날아오는 물체 때문이다.돌덩이다. 그런데 계란만한 게 묶여 있다.
‘크레몬!’
그것이다. 폭발하면 폭심으로부터 반경 십미터는 초토화 시키는 폭탄이다. 그것에 합쳐놓은 돌덩이, 저것은 크리듐이다. 저건 피해야 한다.
“피해!”
소리쳐 외치며 브라이튼은 몸을 던졌다.그 순간 하늘상어와 같은 폭발의 힘이 휩쓸었다.낙엽처럼 굴러가 바위틈에 처박혔다.그렇게 봤다.연속되는 폭발, 그 속에서 정찰대원들은 휘날리고 있었다.
* * *
‘재대로 당하고 있구나.’
폭죽을 터트린 것처럼 연잇는 폭발에 강흑성은 머릴 움츠린 채로 감탄을 삼켰다.퓨리엔트족은 정말 무서운 함정을 판 것이다.정찰대를 유인한 것부터가 그렇고, 하늘상어에 이어 크리듐을 이용한 폭탄공격이다.
‘부상자들을 구하려는 정찰대의 다급함을 후려쳤어.’
정찰대는 완벽하게 당했다.늘 이겼고 적의 머릴 잘라왔기에, 자신들이 당할 거라곤 손톱만큼도 예상치 않았기에 당한 거다.반전을 이루자면 하늘상어에 당한 부상자들이 아니라 적의 다음 공격을 예측했어야 한다.
‘하늘상어까지 손에 넣고 공격한 적에 대해서.’
그런데 그러질 못했다. 공격당한 결과에 놀라고 당황했다. 분노가 앞섰고 이성을 흐리게 했다. 퓨리엔트족은 그것까지도 이용해 공격한 거다.
‘누구지?’
퓨리엔트족을 인도하는 자가 있다.사냥꾼 무리에 불과한 저들을 정찰대를 죽이는 존재로 바꾼 자다.저 계곡 안에 있다.아주 특별한 자다.
‘근두운과 송골매를 맞춰 추락시키는 자.'
암반에 몸을 밀착한 강흑성은 별이 뜬 하늘을 올려보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 * *
‘이 미친!’
부릅뜬 눈으로 브라이튼은 처참한 광경을 응시했다.크리듐을 결합한 크레몬 공격에 휘날린 부하들의 모습이다.1팀과 2침과 6팀, 절반이 쓰러졌다.자신처럼 휘날려 구른 부하들은 자신처럼 황당하게 보고 있다.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겨버렸다.북부지구 정찰대의 전력 반인 5개 팀 백 명이 수행하던 작전이다.적의 공격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생겼다.적의 전술애 당했다.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우릴 가지고 놀았구나, 내 머리 위에서······!’
뒤늦은 후회를 브라이튼은 악물었다.이건 수장인 자신의 잘못이다.적을 얕본 결과다. 냉정하고 지밀한 전술로서 대응하지 못한 패배다.입에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오만이 인원과 장비의 우세함을 다 말아먹었다.
‘이대로 끝은 아니다!’
으스러지게 이를 악문 브라이튼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퇴각한다!”
슈트통신기가 터지게 외친 브라이튼은 멀티폰으로 본부에 연락했다. 지원과 합공을 위한 대응, 그러나 지금 모습은 등 돌려 도망치는 모습이다.
‘쫓아와라!’
이번에 내가 받아쳐 주마, 그 각오를 삼키며 브라이튼은 달렸다.